매일성경 묵상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진 듯한 서러움이 들 때 [욥 21:17-34]
 – 2023년 11월 27일
– 2023년 11월 27일 –
반성적 지혜는 “과연 그러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지혜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원리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거나 그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예외도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고정된 원리의 틀 안에서만 창조 세계를 바라보려 하지 말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직시하라고 가르친다. 동시에 하나님을 어느 특정한 원리 안에 가둬둘 수 없다는 고백이다.
 
아직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했으므로 현실에서는 다양한 삶의 양상이 나타난다. 악인들이라도 기력이 넘쳐 기세등등하고 건강하며 안전과 번영을 누리기도 한다. 그들이 죽을 때조차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 친구들의 말은 한결같이 ‘의인은 흥하고 악인은 망한다’라는 법칙을 강조하지만, 이 법칙이 세상에서 그대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1. 악인의 심판이 드문 현실(17~22절)
욥은 7절부터 현실에서 풍요를 누리는 악인의 삶에 대해 언급하면서 세 친구의 “악인은 멸망한다”라는 규범적 지혜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빌닷은 18장 5~12절에서 “악인의 빛과 등불이 꺼지고 자신의 꾀에 빠져 재앙을 당한다”라는 말에 반박하는 모양새이다.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있느냐? 과연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그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신 적이 있느냐? 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이 된 적이 있느냐? 폭풍에 날리는 겨와 같이 된 적이 있느냐?” (새번역_17~18절) 친구들의 주장과 달리 현실에서는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재앙에 처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반론인 것이다.
 
덧붙여 욥은 “악인의 징벌이 후손에게 미친다”라는 친구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의 생애에 일어나지 않고 연기된다면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이 악인에 대한 처벌을 자손에게 내리시려고 쌓아 두신다(5:4, 20:10_엘리바스, 소발)”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에 대해 욥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자녀가 아니라 죄를 지은 그 장본인에게 갚으셔서 그가 직접 깨닫도록 하셔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욥의 주장은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말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렘 31:29~30; 겔 18:2~4).
 
욥은 친구들의 자만과 주제넘은 행동을 빗대며 하나님이 세상의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는데 누가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려 드느냐고 책망한다. 친구들은 전통과 유전을 통해 배운 제한적인 지식과 경험을 너무 의존한 나머지 욥이나 이사야가 지적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헤아릴 수 없는 권능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인간을 교훈하시는 스승이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친구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해 치우치게 주장하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배우시지 않는다. 죽을 인간이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가르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친구들은 자신들의 제한된 지식을 하나님께 강요하려고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기꺼이 하려는 친구들의 행태가 놀랍기만 하다.
 
 
 
2. 이분법과 충돌_인간은 모두 죽는다(23~26절)
욥은 의인과 악인의 이분법만으로는 현실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그 삶이 아주 평안하고 편안하여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고 뼈 안의 골수까지 풍족하지만(24절), 누군가는 평생토록 한 번도 좋은 것을 맛보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다(25절).
 
욥은 이 두 경우를 묘사하며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의 이분법을 적용하지 않는다. 잘 먹고 잘사는 이에게 의인이라고 하지 않고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악인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았다. 인과응보의 원리와 무관한 현실을 묘사한 것이다.
 
더 나아가 평생 행복하게 살았든, 고통 속에 살았든 간에 그 둘 모두에게는 죽음이 찾아온다(26절)고 말한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 같다는 것이다. 이 주제는 반성적 지혜가 다루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전도서에서도 죽음은 지혜자나 우매자나 모두에게 찾아온다고 했다. 반성적 지혜가 “모두가 죽는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규범적 지혜가 이 사실에 침묵하기 때문이다. “의인에게는 생명이, 악인에게는 멸망이”라는 인과응보의 이분법이 “인간은 모두 죽는다” 사실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3. 현실을 신앙의 눈으로 왜곡하지 말라(27~34절)
욥은 친구들의 인과응보 논리가 자신에게는 “폭력”이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27절 “너희의 생각을 내가 다 알고 있다. 너희의 속셈은 나를 해하려는 것이다.” 새번역_27절) 에서 “해하려는(하마스)” 단어의 뜻은 상호 관계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폭력을 의미한다. 즉 욥은 인과응보의 원리 안에 자신을 가두려는 친구들의 시도가 곧 폭력임을 표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이 원리 안에 가두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폭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악인은 존재할 수 없다(28절)는 친구들의 말에 욥은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다들 알려줄 것이라고 말한다(29절). 악한 자에게 어둠이 드리우는 재앙의 날에 그들이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날에(30절), 대체 누가 그에게 그가 한 짓을주겠다. (31절). 악인이 죽고 난 후라면 그가 저지른 악에 대한 보응을 그 악인에게 갚아줄 수 없다는 것도 인과응보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욥은 악인의 죽음이 임박하고 죽은 후에 다 잊힐 것이라는 친구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악인이 누리는 영화가 그가 죽어 매장될 때도 계속되고 있음을 증거로 제시한다. 악인의 발자취가 완전히 끊어지고 사람들에게 잊힐 것이라고 빌닷은 주장했으나(18:17~21), 현실에서는 악인이 죽으면 그를 추종하고 옹호하던 많은 자들이 무리를 지어 무덤에까지 그와 동행해 주며 그의 무덤을 지켜주기까지 한다고 반발한다. 악인이 죽어서까지 이런 대접을 받으므로 그가 묻힐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길 정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욥에게 있어 친구들의 위로는 ‘조롱’을 넘어서(21:3), ‘헛된 위로’이며 친구들의 말은 거짓이다. 앞서 2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기 말을 경청하고 처지를 이해해 주는 것이 그가 친구들에게 원하는 진정한 위로였다.
 
하지만 친구들은 욥의 처지에서 이해하려고 한 것보다 그를 죄인으로 낙인찍고 욥을 조롱하며 회개를 강요하여 그에게 헛된 위로를 준 것이다. “헛된(헤벨)”이라는 단어는 전도서 저자가 인생의 허무함을 토로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헤벨에는 “우상”이라는 뜻도 있어서 본문에서는 친구들의 말이 욥에게 허무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틀에 박힌 사고만을 주장하는 것이 거짓된 것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도 내포한다.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방법으로 악인과 의인을 대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친구들은 계속해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사상을 주입하려고만 한다. 이는 욥을 위로하거나 도우려는 의도는 분명히 아니다. 친구들의 이런 태도에 육신에 난 악창이 몸을 썩어들어가게 하듯, 마음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나는?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죄악과 심판 사이가 즉각적일지 혹은 주님의 심판의 날에 이루어질지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그런데 친구들은 자신들이 아는 하나님이 전부인 양 확고하게 말한다. 하지만 겸손해야 한다. 내가 아는 지식이 전부가 아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배우시지 않는다. 죽을 인간이 하나님을 가르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친구들은 자신들의 제한된 지식을 하나님께 강요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높은 권세자들은 물론 천사들까지 다스리신다. 그런 하나님께 유한한 인간이 세상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어불성설이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어떤 자는 죽기까지 평안하고 풍부하게 산다. 또 어떤 자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 하지만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든지 죽는 것은 똑같다. 악인이라고 의인보다 더 힘들게 죽은 것은 아니다. 이런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 공의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악인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친구들의 권면은 거짓이다. 복잡하고 부조리한 현실 경험을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욥은 그들이 자신을 위로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고난받는 자신을 악인으로 몰아갈 생각만 한다고 반박했다. 나는 어떤 생각과 태도로 고난받는 이들을 맞이하나? 실제적인 위로를 하고 있을까?
 
 
*인생을 공식 안에 다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그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단순한 이론 하나로 다 설명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가르치려 드는 일이다. 건강과 부를 누리는 사람이 있고 질병과 고난 속에 살다가 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둘은 똑같이 흙으로 돌아간다. 그 마지막을 보면 누가 의인이고 악인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게 인생이다.
 
*친구들은 악인들은 잊히고 그가 살았던 자리는 자취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럴까? 그렇지 않다. 악인들이 죽을 때 그 뒤를 따르는 지지자들의 행렬이나 그 무덤을 지켜주는 사람들,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람들을 보라. 그 악인은 아마도 자기를 묻은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길 것이다. 그렇지만 악인은 하나님께 기억되고 심판을 받는다.
 
 
*어설픈 충고는 약이 아니라 독이다. 아무리 애정을 담았다고 하나 건조하게 판에 박힌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모른다. “잘 알지도 못하면”이라는 말을 괜히 듣는 것이 아니다.
 
*욥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신앙이라는 핑계로 미화하거나 은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정의로움을 질문했다. 악인의 번영과 평안한 현실을 빗대어 하나님이 과연 정의로운 분인가를 질문한다. 그의 말은 하나님 앞에 불경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는 불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런 현실에서 아무 소리도 못 하는 이들이야말로 종교중독자이다. 욥은 자신의 복잡한 내면을 정직하게 표현하였고 투명하게 살고 싶었다.
 
*삶에서 신앙이 힘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신앙이 삶의 동력이 되기는커녕 습관화되고 의식화되어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주일에 교회에 안 가면 큰일 날 것 같아 억지로 가는 때도 있다. 예배에 참석해도 전혀 전처럼 감격스럽지도 않고 기도하여도 확신할 수가 없는 마음의 상태라면 욥의 말과 그의 질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있느냐? 과연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그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신 적이 있느냐? 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이 된 적이 있느냐? (17~18절)” 이렇게 하나님이 부재 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이 현실을 이겨낼 믿음과 의지를 달라고 정직하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정직한 기도의 끝은 단호한 확신으로 갈무리된다. “죄인은 제 스스로 망하는 꼴을 보아야 하며, 전능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한다(20절).” 욥은 먼 훗날 하나님께서 현재의 불의와 악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믿음을 붙잡고 있다. 단지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단호한 의지로 하나님을 향해 토로했다.
 
*지금 우리는 정의가 실종된 시대에 살고 있다. 난무하는 비리와 불법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욥의 아내가 처절하게 외친 것처럼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편이 덜 억울해 보일 수 있는 억울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정의가 작동하지 않는 시대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불행한 세대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반드시 작동한다. 그날을 굳센 의지와 믿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주님, 얕은 지식으로 인생과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겠습니다.
*주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겠습니다. 충만할 때도, 좌절할 때도, 메마를 때도, 그저 주님 앞에 가장 먼저 몸부림치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종교중독자는 되지 않겠습니다.
*주님, 정의가 작동되지 않는다고 해서 정의로우신 하나님마저 잃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견디는 인내와 바라는 소망으로 이 시기를 지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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