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엘리후_소리 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가 되지 말아야 하는데…[욥 32:1-22]
 – 2023년 12월 09일
– 2023년 12월 09일 –
3-31장까지 욥과 세 친구의 긴 대화가 끝나고 32~37장까지 엘리후의 독백이 네 차례에 걸쳐 계속된다(32:6~33:33; 34장; 35장; 36~37장). 욥과 세 친구의 말을 비판하고 나름대로 새로운 의견을 내놓으려고 했다.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의 대화를 듣고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점과 세 친구의 욥에 대한 정죄와 무능한 반박에 매우 화가 났다. 그는 이제 친구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욥과 논쟁하겠다고 선언한다. 엘리후가 욥에게 말하려고 하는 의견은 그의 안에 있는 전능자의 영이 주신 지혜로운 깨달음이며 그것을 공평하고 정직하게 진술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1. 엘리후의 등장(1~5절)
마침내 세 친구와 욥의 긴 대화가 끝났다. 그런데 긴 대화의 끝은 침묵이었다. 욥은 여전히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은 이런 욥의 모습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것이다. 해답 없이 끝난 대화였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후가 등장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의 이름이다.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라고 소개된다.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의 의견을 종합하여 비판하고 사람이 고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새로운 각도에서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의 의견도 욥의 고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한테서 오는 해답만을 애타게 기다리게 한다.
 
엘리후의 등장은 그가 “화났다”라는 설명으로 시작한다. “화”라는 말이 이 단락에서 4회나 등장한다. 엘리후가 욥과 세 친구의 대화를 들으면서 그들을 향해 분통이 끓어오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엘리후는 왜 이렇게 화를 냈을까?
 
이는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더 의롭게 여기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욥이 자신이 범죄했고 이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세 친구에게 화가 난 것은 욥의 분명한 죄를 끄집어내지 못하면서 그를 정죄하는 데만 힘을 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제대로 욥에게 반박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들이 결국 할 말을 잃고 침묵하는 모습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2. 그가 잠잠했던 이유(6~10절)
그는 화를 내며 자신이 잠잠했던 이유(6~10절)와 이제는 자기가 나서서 말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11~22절)에 관해 설명을 이어간다. 먼저 자신이 욥과 친구들보다 나이가 어리므로 그들을 존중하여 그가 깨달아 안 것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잠잠히 있었다고 고백한다(6~7절).
 
그런데 욥 친구들의 말을 끝까지 들었지만, 나이를 먹고 오래 살았다고 해서 더 지혜롭거나 무엇이 옳은지를 깨닫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실망감을 나타낸다. 그는 지혜가 나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을 통해 나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연장자가 더 지혜롭다”라는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생각을 접어두고 “자신의 의견(10, 17절)”을 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엘리후는 하나님 영의 도움을 입어 의견을 제시할 것이므로 연륜이 많은 욥과 천구들이 자신의 나이 적음을 문제 삼지 말고 그가 앞으로 진술할 지혜로운 말을 들으라고 종용한다.
 
 
 
3.세 친구를 책망하는 할 말 많은 엘리후(11~22절)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그들이 합당한 말로 욥에게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누구도 욥의 변론을 확실하게 반박하지 못했고 그의 견해가 옳지 않다는 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에게 “우리가 욥에게 대답할 지혜(진상)를 찾았으나 욥을 추궁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는 핑계를 대지 말라고 확실히 못 박는다. 이런 핑계를 대는 근본적인 이유가 그들이 욥의 변론에 반박할 증거를 찾지 못하고 욥의 논리를 뒤집을 만한 지혜가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힌다. 자신은 욥의 친구들처럼 뚜렷한 증거도 없고, 논리적으로도 반박하지 못하면서 욥을 죄인으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방법과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욥과 논쟁하겠다고 선언한다(11~14절).
 
욥의 세 친구는 강력하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한 욥에게 할 말을 잃었고(1절), 이제는 엘리후의 단도직입적인 유창한 언변과 논리에 말문이 막혀 다시 할 말을 잃는다(15절). 이런 욥의 세 친구의 모습을 본 엘리후는 마음에 더 큰 답답함을 느낀다(16절).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고 세 친구가 각자 욥과 논쟁했듯이 이제 그도 자신의 몫을 찾아 욥과 논쟁하겠다고 선언한다(17절).
 
엘리후는 마음에 할 말이 가득했다. 그 이유는 욥과 세 친구의 대화가 합리적으로 오가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분이 가득 차고 할 말이 마음에 계속 쌓였지만, 아직 의견을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지혜로운 생각을 불어넣어 준 전능자의 영이 이제 그에게 말하라고 다그치고 있었다(18절).
 
마치 주둥이가 꽉 찬 밀봉한 포도주 통이나 포도주를 가득 넣은 새 가죽 부대처럼 할 말이 그의 목구멍까지 차올라 말을 안 하면 터질 것만 같다(19절). 엘리후는 계속해서 자신이 말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또 자신은 사람의 낯을 보거나 누구의 편을 들어 비위를 맞추지 않고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깨달음을 주신 그대로를 말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자신이 정직하고 공평하게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을 그 자리에서 데려가실 것이라고(22절) 단호하게 말한다.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의 대화 동안(3~31장) 그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속히 말하고 싶었으나 기다리느라 얼마나 답답했는지 구구절절 답답한 자기 심정을 토로하고 정작 욥을 향한 자기 의견 제시는 아직 시작도 못 했다.
 
 
 
나는?
-욥은 자기의 결백을, 친구들은 현재의 고난은 욥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전제하며 논쟁을 이어왔다. 논쟁은 그쳤지만, 생각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욥은 친구들의 말로 상처를 입었고, 친구들은 욥에 대해 마음을 닫아 버리게 되었다. 논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생각이 넓어지고 상대를 살리는 것임을 간과한 것이다. 내 주장만 고집하기보다 상대방의 주장을 들어주는 열린 마음과 경청의 자세가 필요하다.
 
-엘리후가 지금까지 말을 삼가고 잠잠히 참고 있었던 것은 나이 든 사람의 지혜를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도 하나님께 받은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나이 든 어른의 지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고 어린 사람이라고 해서 억누르거나 무시해도 안 된다. 오랜 전통에 따른 지혜도 있지만, 새로운 인식에 따른 지혜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공동체는 연장자의 연륜을 존중하고, 연소자의 참신한 안목에도 귀를 기울이기를 소망해 본다.
 
 
-욥의 말을 꺾지 못하자, 친구들은 하나님이 추궁하실 것이라고 말했다(13절). 이에 엘리후는 친구들의 말이 최선이 아니며 하나님을 들어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며 자신이 욥의 말에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혹 나에게도 하나님을 핑계하며 나의 무지와 나태함을 변명할 때는 없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엘리후는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이제 쏟아내려 한다. “내 속에 말이 가득하다, 내 배는 봉한 포도주 통 같다”라고 말 속에 그의 열정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열정이 넘칠 때 종종 내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고 다른 이의 말을 들어주지 못할 때가 많다.
 
*쏟아놓으면 내 마음은 시원할 수 있지만,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고 치유되고 회복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엘리후의 분노하는 모습에서 과연 그가 욥의 말을 그의 처지에서 잘 들어줄 수 있을까 싶다.
 
*나이 어림으로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으나 듣자 하니 연륜이 많다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며, 어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전능자의 숨결로 깨닫게 하시는 것이며 자기에게는 사리 분별을 잘하게 하는 그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지혜일까? 착각일까?
 
*착각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이 간혹 드러날 때가 있다. 엘리후가 말하기 위해 기다렸고, 누구에게 잘 보이거나 사람의 영광을 위해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런 소신과 인내가 좋기는 한데, 과연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깨달은 것의 한계를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면 이런 패기 넘치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젊었을 때 교회의 문제점들, 교회 어르신들의 문제점들을 향해 얄팍한 신학 지식과 설익은 열정으로 판단하고 날 선 비판을 했던 기억들이 난다. 패기와 열정은 넘쳤으나 이해와 사랑은 부족하기 그지없었다. 엘리후는 그런 사람이다. 그가 볼 때 어떤 이는 불의하고, 어떤 이는 영성이 부족하며, 어떤 이는 어리석어 보였다.
 
*엘리후의 말이 자칫 사랑이 없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내 안에 참지 못하고 쏟아내고 싶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참으시고 분노를 쏟아내지 않는 이유를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고전 13:4)”이다.
 
 
 
*주님, 엘리후의 소리가 소리 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처럼 들릴까 염려됩니다. 그런 언행이 저의 언행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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