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호기롭게 가르치지만, 공허할 뿐….[욥 33:1-33]
 – 2023년 12월 10일
– 2023년 12월 10일 –
엘리후는 양비론자로 등장한다. 논쟁하며 맞서는 욥과 친구들의 의견이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세 친구의 규범적 지혜나 욥의 반성적 지혜, 그 어디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지혜는 과연 무엇일까? 그러나 막상 엘리후의 주장을 들으면 당황하게 된다. 세 친구와 욥의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 다 틀렸다”로 시작된 엘리후의 주장은 “둘 다 맞다”로 귀결된다. 엘리후의 지혜는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를 혼합하는 지혜였다.
 
 
 
1. 하나님의 대변인? (1-12절)
1~12절은 엘리후가 자신이 말해야 하는 정당성을 설명한 후 직접 욥을 향하여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지혜와 정직함으로 욥에게 대답할 것임을 밝히고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꿋꿋하게 선포한 것은 하나님께 불경한 태도이며, 사람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다고 반박하는 내용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대변인과 지혜의 대표자로 자처하며 자신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동일시한다. 엘리후는 욥에게 할 말 있으면 하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정직하고 진실하게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영으로 말할 것이라고 공언한다(1~7절). 그의 말과 태도에서 자신감이 느껴지지만, 고난을 겪고 있는 욥에 대한 연민과 동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이럴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의 일부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대리인 행세를 하며 교만하게 굴거나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는 않을까?
 
엘리후는 지금까지 욥의 진술을 거론하며 반박한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불의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원수로 여기시고 공격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일은 욥의 말처럼 그의 불의 때문이 아니라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욥이 하나님께 변론을 요청하는 것은 불경건하거나 불의한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자기와의 관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엘리후도 욥의 세 친구와 다를 바 없이 자기가 알고 있는 논리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쟁변하는 욥을 공격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논리로 모든 것을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엘리후가 욥의 불의를 증명하기 위해 내세우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의 진심이다. 그 마음에는 거짓이 없고, 정직함뿐이다. 심지어 마음의 정직이 그대로 그의 혀로 옮겨져 오직 진실만을 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심으로 말한다 한들 그것이 곧 진리는 아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렘 17:9)”이라고 했다. 엘리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혀의 말이 진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들 그것이 곧 진리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며 교만이다. “내 진심이 곧 하나님의 진심은 아니다.”
 
*흔히 “내 진심을 왜 몰라주느냐?”고 항변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본다. 내 진심을 몰라준다고 서운해하는 이들이 꽤 많다. 내 진심보다 상대방의 진심을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또 엘리후는 자신도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며 욥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죽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엘리후는 지금 욥과 동등한 처지에서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나님의 대리인이 된 듯한 모습이다. 말의 내용은 평등한데, 말하는 태도는 평등해 보이질 않는다. 고통으로부터 초월한 자리에 서서 온몸으로 고통과 싸우는 욥에게 “내가 너와 다르지 않다”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향한 우리의 조언은 종종 그 내용보다 태도를 통해 전달된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대변하기 전에 그의 마음을 먼저 품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엘리후는 자신이 하나님의 대언자인것처럼 자처한다. 마치 하나님이 말씀하시듯 말한다. 재판장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의 의도는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다. 사람보다 크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이신지 자신조차 전혀 모르고 있다.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만, 신앙과 아무 상관 없을 때가 훨씬 많았다. 종교적인 미사여구의 화려한 사용이 곧 그의 신앙을 증명하지 못한다.
 
*종종 자신의 진심과 멋진 말에 속기도 한다. 하나님을 위한 사심 없는 말 속에 교만과 위선이 숨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위한 사심 없는 말 속에 교만과 위선이 숨어있다.” 그러므로 ” 하나님처럼 말하려고 하지 말고 사람답게 말하자!”
 
 
 
2. 그대를 가르치리라(13~33절)
13~18절은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뿐 아니라 여러 방법을 통해 뜻을 계시하신다고 밝힌다.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관심이 없어 듣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악된 행실을 버려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시기 위해 꿈이나 환상, 질병이나 고통을 통해서라도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죄를 깨닫고 그 죄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이다.
 
19~22절을 통해 엘리후가 묘사하는 징계받는 사람의 파리함은 욥의 상황과 일치한다. 즉, 욥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엘리후는 현재의 고난과 고통은 욥을 연단하고 교만하지 않도록 하여 결국 생명을 주시려는 의도라고 비슷하지만 다르게 설명한다. 엘리후는 욥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듣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엘리후도 역시 욥이 어떤 죄목으로 징계를 받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23~28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이 중보자를 보내서까지 인생을 구원하신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구원할 힘도, 의로움도 없는 불쌍한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회복된 자가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30~33절은 친구들은 고난을 죄의 결과로 이해했으나 엘리후는 고난이 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계시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엘리후는 친구들과 비교하면 고난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욥에게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지 말고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넓게 보면 엘리후의 주장도 인과응보의 확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 역시 세 친구처럼 욥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해하기보다 욥의 고통을 분석하고 설명하려 들었다.
 
엘리후의 말을 읽고 있으면 욥의 상황을 공감하지 않고 계속 가르치려는 것을 보게 된다. 그의 가르침이 옳은 것은 있을지 모르나, 공감 없는 가르침이기에 공허하기만 하다. 또 고통 중에 있는 이에게 한 수 가르치겠다는 사람의 마음보다 매정한 것은 없다.
 
 
 
나는?
-엘리후의 가르침이 공허하게만 다가온다. 공감은 아예 고려하지 않는 메마름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그런데 그의 모습에서 요즘 목사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그저 가르치고 확정하는 자세가 부담스럽다. 그 모습이 오늘날 목사에게 보여서 더더욱 그렇다.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고통의 문제”에서 고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통은 주목해 달라고 고집스럽게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고통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지만 C.S 루이스의 고통에 대한 성찰은 참으로 귀 기울일 만하다.
 
-우리 삶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야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평안의 상태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교훈하신다. 그러나 좋은 환경과 상황 때문에 그 소리가 속삭이듯이 작게 들린다. 전자의 것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듣지 못한 거다. 누구 잘못인가?
 
-그러나 고통은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엄밀히 말하면 듣지 않았던 소리를 듣게 한다. 쾌락이 배제된 채 맞닥뜨리는 고통은 하나님의 소리를 더 크게 들리게 한다. 나를 깨우게 하고 다른 세상을 보게 한다.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서 더 먼 곳, 더 깊은 곳, 더 넓은 곳을 보게 한다. 흔들리지 않았으면 절대로 보지 못할 나라는 존재 너머의 무언가를 보게 한다. 그래서 고난은 더 성숙하게 하고 더 나아가게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이지만 고통은 그렇게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엘리후는, 이 고통의 문제를 자신의 지식과 감정, 영적인 경험으로만 바라보며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가혹하리만치 “고통에 대한 지식을 가르칠 뿐”이다. 고통당하는 자를 공감하지 못하는 가르침은 비수일 뿐이다.
 
*내가 이런 엘리후와 같은 모습이 아니길 바랄 뿐, 그저 공감을 먼저 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더 충만했으면 좋겠다.
 
 
 
 
*주님, 엘리후의 거침없는 가르침이 욥의 마음을 더욱 뒤흔들고 있음을 느낍니다. 저도 혹시 엘리후처럼 고통당하는 자에게 공감보다 가르침을 우선하지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보다 삶을 공감해 주는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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