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정의를 말하지만 정의롭지 못한 속내 [욥 34:1-30]
 – 2023년 12월 11일
– 2023년 12월 11일 –
세 친구의 규범적 지혜와 욥의 반성적 지혜 모두 틀렸다고 화를 낸 엘리후가 내놓은 것은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를 나란히 붙여 놓은 것뿐이다. 이제껏 욥과 친구들의 발언에서 언급된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전능자로서 세상을 정의로 다스리심에 대해 설명한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된다.
    
엘리후에 따르면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강력하게 주장한 나머지 하나님의 정의로움에 의구심을 품어 하나님을 비방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다. 그는 세상 모든 이들을 감찰하시며 그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 앞에서 제외될 자는 없는 것이다.
    
    
    
1~9절에서 엘리후는 욥이 자신의 무죄를 호언장담하며 하나님을 잘 믿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 것을 지적하며 그가 악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욥의 일관된 주장은 자신이 이런 고난을 받을 만큼 죄가 없다는 의미에서 의롭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신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알고 싶고, 해결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고난받는 자는 자기 말을 들어주고, 그의 말 그대로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0~15절에 드러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않으시고 전능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다. 의로우시기에 악한 자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시고 전능하시기에 인간의 모든 일을 다스리신다. 감히 육체를 입은 자가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다. 엘리후 하나님의 이해는 옳다. 하지만 빠진 것이 있다. 바로 “긍휼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심판하는 의인 동시에 인간을 용서하는 의이다. 무고하게 고난받는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의로움이라는 것이다. 안 그래도 힘든 그를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추궁하는 것은 결코 의로움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옳고 그름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것보다, 고난받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의로움이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
    
16~25절에서는 사람을 외로 대하지 않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왕이나 귀인, 부자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일 따름이다. 아무리 강성하고 세력을 떨쳐도, 부귀를 자랑하여도 한순간이다. 남몰래 못된 짓을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의롭든지 의롭지 못하든지 간에 누구나 고난받는다. 고난은 적어도 모두에게 공평하다.
    
26~30절에서 악인은 반드시 망한다. 욥은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망한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그러나 엘리후의 대답은 결국 악인이 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아서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공의대로 갚으신다. *내 눈앞의 현상만 보고 반응하기보다 하나님의 섭리와 공의에 대한 좀 더 긴 안목과 호흡으로 반응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다. 욥은 자신이 무죄하며 결백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죄 없는 자신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이 불의하시고 불공정하시다는 주장과 같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결코 죄 없는 자를 박해하시는 분이 아님을 역설해도 공의와 선의로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도, 재물의 많고 적음도 고려 사항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의 정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을 숨길 수 없다. 심판을 위해서 조사나 재검토가 필요 없을 만큼 모든 피조물의 마음속 의도까지 하나님은 아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길을 걷고 있는지 잘 아시고 심판하신다. 따라서 아무도 그가 침묵하신다고 정죄하며 따져 물을 자가 없다고 말한다. 엘리후 역시 친구들처럼 감찰하시는 눈앞에서 욥 자신도 모르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고난을 겪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엘리후는 지혜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욥이 잘못을 가려내려고 시도한다. 그는 자신의 무죄와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을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라고 비방한다. 욥을 악인과 함께 다니며 하나님 믿어도 아무 소용 없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엘리후는 욥을 상대로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를 알아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욥을 정죄하는 자리까지 나아간다. 정의는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지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넘어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리까지 가고 있지는 않는가?
    
*엘리후의 말대로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하지 않으시는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에 따라 판단하시지 않고 그 행위를 따라 공평하게 갚으신다. 결코 공의를 굽히는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믿기에 결국 악인의 멸망을 믿는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21:7). 욥의 교만과 질문은 이것이었다. 엘리후의 말처럼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왜 현실에서는 악인이 더 형통하냐는 것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를 강조하여 욥의 불의를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욥의 현실은 결코 권선징악의 구도로 설명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정의는 권선징악보다 크고, 인과응보보다 넓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나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지만, 정의가 곧 하나님은 아니다.
    
*엘리후는 욥의 불의를 증명하기 위해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연설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심판에 목마른 분이 아니시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하나님의 정의 핵심은 은혜이다.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않고 공정과 공평으로 대하는 그 정의는 약한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비롯된다.
    
*세상의 불의한 권력자가 아닌 고난받는 이를 향해 정의의 칼날을 든 엘리후가 아쉽고 아쉽다. 엘리후는 자신이 옳고 욥과 세 친구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품의 단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너무도 비겁하다.
    
*앉아서 정의를 따지기보다 일어서서 정의를 행하는 하나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정의로움을 이야기하나 정의롭지 못한 그의 속내가 보여 씁쓸하다.
    
    
    
    
*주님, 비난을 넘어 정죄까지 서슴지 않는 엘리후가 세 친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옳은 가르침, 정의로움을 이야기하지만, 정의롭지 않습니다. 이런 길을 닮아갈까 두렵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