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섣부른 판단, 잔인한 정죄 [욥 34:31-35:16]
 – 2023년 12월 12일
– 2023년 12월 12일 –
아무도 반응하지 않지만, 엘리후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 나간다. 욥의 말을 인용하여 반박하고 무엇인 문제인지 짚고 검증하는 형식을 따른다. 본문에서도 엘리후의 지혜는 세 친구의 규범적 지혜와 욥의 반성적 지혜가 뒤섞여 있다. 엘리후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이 두 지혜를 구별하면 좀 더 이해가 쉬워진다.
    
엘리후 말의 특징은 타인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지혜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혹은 “지혜자라면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라는 식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타인의 입을 통해 말하는 형식도 취했다. 이것은 자신의 지혜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출일 수도 있고 권위가 부족한(나이가 어린) 자신이 설득력을 획득할 수 있는 수사법이기도 하다.
    
엘리후는 두 번째 연설을 통해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한 후 욥이 참된 회개를 해야 할 것을 촉구한다(34:31~37). 그리고 35장에서도 욥이 공의롭지 못하고 지혜롭지도 못하다고 비판을 이어간다. 엘리후는 욥을 두 가지로 공격하는데, 욥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는 것과 욥이 의롭다고 주장한 것에 대하여 공격한다. 이를 공격하며 결론 내기를 욥은 죄인이며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자라고 결론짓는다.
    
    
    
1. 욥을 향한 책망을 멈추지 않는 엘리후(34장 31~37절)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 마지막 부분으로 욥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을 반박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욥이 지혜가 없는 무식한 자라고 비판한다.
    
34:31~33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고백을 해야 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했는지를 확인한다. 엘리후의 이 질문은 욥이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이다. 32절에서 “깨닫지 못한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라는 구절은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가르침을 받아 지혜로워져야 한다는 압박이다. 33절의 문장에 담긴 의미도 욥이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결과로 지금 고난을 받고 있으며 전적으로 욥에게 그 책임이 있음을 분명하게 표현한 도발이었다.
    
34:34~35는 자신의 이런 주장의 객관성을 세우기 위해 ‘슬기로운 자들과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다. 그런데 자기 말을 듣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곧 지혜로운 사람인 것을 강조하며, 자기 말이 옳음을 강요하고 있다. 엘리후는 지혜로운 이들의 입을 빌려 욥이 무식하고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34:36~37은 엘리후는 욥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식하므로 계속해서 시험을 받기 원한다고 저주한다. 현재 받은 벌은 충분하지 않은데, 이는 욥이 하나님께 아직 죄를 자복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밝힌다. 37절에서는 이런 욥의 모습을 “반역”이라는 단어를 통해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반역으로까지 보고 있는 엘리후의 시각을 여실 없이 드러내고 있다. 엘리후는 욥이 무식해서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가 재앙을 받게 되기를 기원하는 말로 끝을 낸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결코 죽이는 것이 아니다. 엘리후는 욥이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무죄를 주장하고,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태도에 격분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무지의 극치를 달리는 욥이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묵살하고 자기주장만 되풀이한다고 비난한다. 그럴 거면 계속 고난받으라는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고난 겪는 이를 향한 나의 말과 태도는 어떠할까? 같은 어려움을 겪더라도 각자의 성격과 신앙의 수준과 환경이 달라서 대처하는 방법들이 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법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자기 경험을 따라 조언하고 권면할 수는 있지만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자기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악담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잔인하다. 비록 자기 생각에 욥이 어리석고 고집스러워 지혜자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심각한 재앙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욥에게 그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 계속되기를 원한다는 기원을 하는 것이 과연 지혜자다운 언행일지 의심이 간다.
    
    
    
    
2.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35장 1~16절)
35:1~3에서 엘리후는 욥의 주장과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먼저 욥이 정말 정의롭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의로운 것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욥이 죄 없는 상태에서 재앙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의 정의인 인과응보대로 행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며, 그럼, 하나님이 불의하고 욥이 더 정의롭다는 말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9장 22절에서 욥이 제기한 무죄한 자나 악인이 동일하게 멸망 당한다는 문제와 관련하여, 21장 15절에서 인용한 악인들의 무례한 말을 근거하여 욥이 의로운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주장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엘리후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욥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귀에 들린 대로, 욥의 의도를 공감하지 못하여 곡해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5:4~13의 엘리후는 계속해서 욥과 함께 토론했던 세 친구를 자신의 연설 대상에 포함한다. 그는 세 친구의 말이 자신보다 덜 지혜로워서 욥을 설득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한 수 가르치겠다고 언급한다. 그는 하늘의 구름을 예로 들어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 세상에서 멀리 계신지를 표현한다. 이것은 인간이 죄를 짓거나 의로운 행위를 해도 결코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이런 주장의 핵심은 8절을 통해 그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는데, 인간의 행동은 오직 인간에게만 영향을 미치며, 의로운 행동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인 것을 분명히 한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여 자신의 억울함과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왜 하나님께서 욥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시는가에 대하여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먼저 10~11을 통해 시편 기자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고 탄원하던 기도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12~13을 통해서 교만한 악인들이 부르짖음은 헛된 것이며, 이를 하나님은 듣지도 관심을 가지시지도(돌아보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35:14~16을 통해 엘리후는 이 두 가지의 문제가 모두 있다고 언급한다. 욥은 죄를 자복하며 부르짖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릴 뿐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욥은 하나님께 벌을 받는 죄인이다. 그의 생각에는 욥은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를 짓고 있으며 지금 받는 고난만으로도 벌을 다 받은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16절에서 이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도 받기 어려운 욥이 계속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지식이 없는 태도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의 세 번째 연설의 결론은 욥이 스스로 주장한 의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비판하고 그가 죄인임을 단정하며 마무리한다.
    
    
    
나는?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하나님은 우리를 초월하여 계시지만 우리와 무관한 분이 아니심을 엘리후가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35:1~8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무죄를 변호해 주시기를 바라는 욥의 태도와 하나님을 잘 믿고 바르게 살아도 아무 유익이 없다는 욥의 불평에 대해 반론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한다. 엘리후는 하늘에 높이 뜬 구름의 진로에 사람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듯 욥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선에 보태거나 빼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욥의 무죄함과 의로움의 간구와 불평에 반응하여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반응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다. 당신의 백성과 자녀들이 고난받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지 않으신다. 고난 겪을 때 십자가의 고통으로 함께 아파하신다. 나는 믿는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욥에게 폭풍 가운데 오셨듯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 어느 곳이든, 하나님 나라 백성이 있는 곳에 함께하신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35:9~16을 통해 하나님께서 욥의 요청을 뭉개버리시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성 없는 짐승들도 하나님이 가르치시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침묵하시는 까닭은 “교만” 때문이다. 악인들은 순전히 자기의 필요와 이익을 따라 하나님을 부르니 하나님이 들으실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엘리후는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욥의 간절함을 철저히 “자기중심주의”라는 교만이 숨어 있다고 여긴 것이다.
    
    
*엘리후는 욥의 무죄 주장과 자신의 고난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태도에 경악한다. 자신의 의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주장하는 욥이 어이가 없다. 하나님은 이런 한 인간의 악행이나 경건한 삶에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엘리후의 말대로 라면 왜 욥의 죄악에 대해서는 이렇게 잔인할 정도로 반응하셔서 심판하실까? 엘리후는 이 의문에도 대답해야 했다. 이것이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엘리후 자신의 주장도 모순이 아닌가? 하나님이 인간과 상관하지 않고 그들의 삶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구태여 심판은 왜 하실까? 심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틀어진 것을 바로잡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 방편 중 하나가 아닌가?
    
    
*엘리후는 사람이 그들의 교만으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실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들으시기에 헛된 것이기에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욥을 향해 질타한다. 즉, 욥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책임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욥에게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엘리후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이 다 끝나지 않았고 그렇기에 아직 더 받아야 할 고난의 심판이 있다고 말한다. 욥은 받은 고난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데, 엘리후는 이제 시작인데 무슨 엄살이냐고 화를 돋운다.
    
*엘리후 그가 진정 지혜자인가? 그가 욥의 친구 맞는가? 참 잔인하다. “섣부른 판단, 잔인한 정죄”가 이 아침에 나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다. 욥을 또다시 무너뜨린다.
    
    
*교회 안에 엘리후와 같은 이들이 심심치 않게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한 영적 체험이 마치 모든 진리와 은혜 자체인 것처럼 여기는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이다. 문제는 그들의 시각에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같은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의 삶에 대해 엘리후처럼 “받은 고난이 고통스럽다고 토로하는 지체들에게 이제 시작인데 무슨 소리냐? 라며 호통치는 무뢰함을 당연하게 행사한다. 이게 무슨 참담한 일인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에서 조선시대 문인이 남긴 말을 인용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욥은 아직 이 차원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곧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아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바로 그때 두 눈으로 주를 뵌다. (42:5).
    
*엘리후나, 욥이나, 세 친구나, 지식으로 아는 하나님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단지 학습된 지식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께서 친히 들려주셔서 깨우쳐지는 그 순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변화되고 승화된다. 누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고난에 대해 유식하겠는가? 그 지식이 넘치겠는가? 지식은 고난에 들어가면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니 고난 중에는 섣불리 자신의 지식으로 말하거나, 그 지식을 자랑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와 계신 분이시다. 엘리후는 배운 지식으로 하나님을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로 확신하나,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세운 공식들을 자주 허무신다. 엘리후는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아는 수준은 아니였다.
    
    
*엘리후를 통해 선명하게 가다듬는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수준의 지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에 대해” 알기 위해 어설픈 선지식에 얽매여 높은 하늘 위에 계신 우리와 상관없는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나열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의 일상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지금 이 역사의 한복판에 계시는 하나님, 나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살린다.
    
    
    
    
*주님, 저에게 하나님에 대해(knowing abut)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knowing GOD) 지식을 날마다 더해 주십시오.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여 알게 된 만큼 정직하게 전하게 해주십시오.
*주님,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주님을 사랑하여 알게 된 지식의 은혜로 이전과 달리 보이는 말씀의 은혜를 주십시오. 그 말씀으로 저도 살고 저에게 맡겨주신 교회도 살리겠습니다.
*주님, 지식이 출중한 잔인한 엘리후와 같은 사람보다 사랑하는 삶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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