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의 신학이 탁상 신학이 될라 … [욥 36:1-33]
 – 2023년 12월 13일
– 2023년 12월 13일 –
욥의 세 친구가 세 차례에 걸쳐 말한 것처럼, 엘리후도 세 번에 걸쳐 말했다. 마지막 발언(36~37장)에서 엘리후는 욥의 말을 비판하는 형식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자신의 지혜를 설파한다. 1~25절까지 일관성 있게 규범적 지혜의 어휘와 주제들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남은 인생을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고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징벌을 받아 죽게 될 것이라는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이분법이 단순하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엘리후는 욥에게 고난의 신앙적 의미와 목적에 대해 교훈한다. 그의 말은 한마디로 고난이 하나님의 훈련 도구인데, 욥이 하나님의 충고(기회)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 교육을 위하여 제공한 고난에 반항하고 있다는 것이다(1~16절). 엘리후는 욥에게 그의 능력과 부유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없다고 경고하며 인간이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다고 충고한다(17~25절).
 
 
 
1. 엘리후가 자신의 지혜를 밝힌다(1~4절).
엘리후는 자기 지혜의 정수를 욥에게 소개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요청한다. (“나를 잠깐 용납하라”_2절 상). 하나님에 대해 욥에게 알려주고 싶은 지혜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2절). 그는 자신의 지혜를 출처를 “먼 데서(3절)” 왔다고 말한다. 이는 장소의 이해를 통해 살피면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낯설고 신비한 곳에서 자신의 지혜가 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 된다. 즉,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지혜라는 점을 부각하는 것이다. 또는 시간적으로는 아주 오래된 과거를 가리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규범적 지혜가 아주 오랜 옛날에서 지혜의 출처를 찾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본문 중심의 해석은 “먼 데”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3절은 “내가 멀리서 나의 지식을 가져와서 나를 만드신 분이 의로우심을 밝힐 것입니다.”(새번역) 인데, 이를 직역하면 “나의 의(올바름)를 나를 만드신 이에게 준다”인데, 무엇이 올바른지를 아는 지혜가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4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는 거짓일 수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엘리후가 본격적으로 욥에게 자신의 지혜를 가르치려고 하고 있다.
 
 
 
2. 공의로우신 하나님(5~7절)
엘리후의 지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5절은 위대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도 위대하다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 지혜로 다스리는 세상은 “공의로운 세상”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은 권선징악이 실현되는 것이다(6절). 그리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시선은 의인에게 고정되어 있다. 자기 뜻을 따라 사람 사람을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신다(7절). 이 구절은 “의인들을 왕으로 삼으신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규범적 지혜에서 왕은 공의와 정의의 상징이다. 왕은 규범적 지혜를 구현하는 의인의 이상형이다.
 
 
 
3. 고난을 주시는 이유인 하나님의 징계(8~16)
의로우신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악행과 교만으로부터 회개하고 죄악에서 돌이키기 위함이다. 만약 누군가 고난의 사슬에 묶이거나 재앙의 그물에 얽매이게 된다면(8절),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강해졌다고 교만하게 행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9절). 9절의 “교만(이크갑바루)”으로 번역된 단어는 “그들은 스스로 강해졌다”라고 직역할 수 있다. 교만해진 그들의 잘못된 행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고난과 재앙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앙을 만나면 “죄악에서 돌아오라”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교훈을 들어야 한다.
 
고난이 닥친 사람들 앞에는 두 가지 갈림길이 놓여 있다. 순종과 불순종이다. 11절은 만약 재앙이 닥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그분을 섬긴다면 그들은 남은 인생을 행복하고 기쁘게 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다면 그들은 결국 죽음에 넘겨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죽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무지” 때문이다(12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마음이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 그들에게 징벌이 임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외치지도 못한다(13절).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 자신의 무지로 인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내려진 심판은 하나님이 주신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14절 a절).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자들의 운명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고난이라는 방법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이라는 경고에 귀를 연 사람들을 “고난의 입”에서 꺼내셔서 아무 괴로움도 없는 넓은 곳으로 넘겨주시다. 그곳에는 지방질이 풍성한 진수성찬으로 가득한 식탁이 있다(16절). 이것이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경고 가르침에 순종한 이들의 운명이다.
 
 
 
4. 그러므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17~25절). 하나님은 높으시다(26~33절).
엘리후는 규범적 지혜의 일반론을 욥에게 적용한다. 욥이 당하는 고난을 보니, 그것은 분명 악인과 무지자에게 내려진 징벌이었다(17절).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면 첫째, 돈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많은 뇌물을 준다 해도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18절). 아무리 많고 대단한 재물의 능력이 있어도 욥을 고난에서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9절).
 
둘째, 악이나 어둠 같은 부정적인 것을 추구하면 안 된다(20~21절). 악한 것으로 향하지 않도록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선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낫다(21절).
 
셋째,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께 누구도 ‘당신 잘못했어!’라고 말할 수 없다(23절). 그런 놀라운 하나님께서 친절하고 세심하게 교훈을 가르쳐주시므로(22절) 마땅히 찬양해야 한다. 엘리후는 욥은 하나님을 원망해도 다른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24절).
 
넷째,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아주 멀리 있는 사람, 혹은 아주 옛날 사람부터 다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다(25절). 그런데 과연 욥은 그렇게 하고 있는가? 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바라보고 있다면 그들 중 누구에게도 고난과 재앙이 임할 리가 없다.
 
엘리후의 지혜는 세 친구가 말한 규범적 지혜에 비해 새로운 지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지혜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먼 곳’에서 기원했다고 했지만, 그 지혜는 누구나 다 아는 흔한 지혜였다. 좋게 바라보면 자기 확신이 강한 것이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정작 그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다.
 
 
 
나는?
-고난에 관하여서는 누구도 전문가일 수 없다. 엘리후는 자신이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고난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인 양 말했다. 자신의 지식이 거짓이 아니며, 건전하고 온전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지식을 뽐낸다.
 
-고난받는 욥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으나, 엘리후는 멀찌감치 서서 하나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 모든 지식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막상 고난에 처하면 욥처럼 질문하고 항의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교육하신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전능하고 의롭기에 악인과 의인에게 모두 공평하게 공의를 행하신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해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공의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 족쇄로 묶어버리신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도록 고난을 허용하신다. 악행에서 돌이켜 선행을 하도록 고난이라는 확성기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고난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자기 삶에 열중했을 텐데, 고난을 당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비록 본문의 욥에게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하시고 유익하게 하신다는 것은 진실이다(시 11
9:71)
 
-고난에는 양면성이 있다. 욥은 고난이 인간을 노예처럼 만든다고 불평했으나(7:1~2), 엘리후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의인의 길에 서게 된다고 말한다. 고난 속에서 어떤 사람은 더 악해지고, 더 망가진다. 하지만 교만한 자신을 성찰하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난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성숙의 기회가 된다. 나에게 고난은 끝없는 불평의 시간일까? 끝끝내 순종하는 계기가 되는가?
 
 
-고난 가운데 힘들다고 악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엘리후는 욥에게 고난 가운데 빠지기 쉬운 해결책을 선택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분노에 빠져 맘이 상하거나 돈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죽음으로 도피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은 또 다른 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고난을 극복할 수 없으며, 오히려 화를 자초하여 더욱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엘리후는 욥의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의 결과라고 단정한다. 욥이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것은 많은 재물 때문이며 욥은 다른 악인들처럼 밤을 사모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엘리후는 다른 세 친구처럼 욥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책망했지만, 엘리후는 단 한 걸음도 세 친구의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단순하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기도하고 고민해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엘리후는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 폭풍우와 함께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은 미물들도 아는 사실인데 욥은 모른다고 책망한 것이다. 하지만 엘리후는 정작 자신이 하나님이나 된 듯이 욥을 추궁하고 정죄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자기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는 착각이다. 엘리후가 딱 그 모양이다. “….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2절) 엘리후는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하나님을 위하여 대변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호기와 패기가 있어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바울의 권면을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엘리후는 말과 행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게 한다. 그가 쏟아내고 있는 수많은 말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들어맞을까? 곱씹어 읽고 또 읽어도 엘리후가 말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을 난해한 분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확신에 찬 행동이 도리어 하나님을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 설교하는 나와 같은 목사들이 유념해야 할 부분이 아니겠나!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많이 보게 되는 요즘이다.
 
*왜 이런 느낌을 지울 수 없을까? 엘리후의 신학은 탁상 신학, 골방 신학이다. 길거리 신학이 아니다. 엘리후가 말하는 것처럼 “악인을 징계하시고 가난하고 약한 자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속한 사회는 악인 번성하고 거짓말쟁이가 승승장구한다. 의로운 이들은 핍박받거나 손해 보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역사가 이를 보여주고 있질 않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전 재산과 생명을 바친 독립 유공자 후손들의 비루한 삶과 친일 행적으로 호의호식하던 친일파 후손들은 여전히 잘 먹고 잘산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리들과 그의 후손들은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서 정치를 좌지우지하지만, 이를 막아선 충성스러운 군인들과 후손들은 철저히 짓밟혔다….
 
*이런 세상에서 엘리후가 말하는 악인을 징벌하시는 하나님, 의인을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믿음은 이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신학은 “정직한 신학”이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하나님을 조화하여 억울한 자의 눈물과 약한 자의 고통, 의로운 자의 소외됨을 이해하고 흡수해야 한다. 이를 포용하지 못하는 신학은 관념일 뿐이다.
 
*말씀(신학)이 삶이 되게 하는 것은 매우 개별적이고 특수한 인생 각자의 현실을 이해하고 약자의 고통과 슬픔을 체휼(처지를 이해하고 불쌍히 여김)하여야 한다. 약자의 아픔과 슬픔을 교감할 줄 모르는 신학은 성령의 부재 신학, 싸구려 신학이다.
 
*엘리후는 세상 이치를 다 아는 듯 잘난척한다. 그는 욥이 뉘우칠 줄 몰라서 벌을 받는다고 면전에서 구박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말고 달게 받으라고 재판관처럼 다그친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를 모르는 이는 욥도 욥이지만, 정작 엘리후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르는 것이 없는 척한다. 자기만의 신념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꼰대다. 교만하고 강퍅하다.
 
 
 
 
*주님,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허투루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약자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할 줄 모르고 자기 신념에 사로잡힌 꼰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따뜻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영혼을 죽이는 사탄의 학문이 되지 않는 신학을 추구하겠습니다.
*주님, 성경의 언어로 말한다고 생명력이 있다는 착각을 버리고 삶으로 성경의 언어를 펼치겠습니다. 늘 조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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