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내가 아는 하나님의 한계 [욥 36:26-37:24]
 – 2023년 12월 14일
– 2023년 12월 14일 –
전형적인 규범적 지혜를 설파한 엘리후는 26절부터 전혀 다른 지혜를 이야기한다. 그 지혜는 인간이 알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지혜이다. 그 지혜가 펼쳐지는 무대는 하늘이다. 비와 구름, 천둥과 번개, 바람과 폭풍우, 눈과 우박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겨나는지 설명한다. 그런데 엘리후가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
 
욥을 통하여 제시되는 반성적 지혜의 특징은 규범적 지혜의 원리가 기계적으로 항상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는 것과 선명한 이분법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지혜이다. 따라서 반성적 지혜는 인간의 활동 영역이나 이해 범위의 한계를 초월한 것들이 존재하고 선과 악, 옳고 그름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을 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엘리후는 자연현상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능력을 찬양한다. 그리고서 욥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오묘한 일을 생각해 보라고 요청하며 하나님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진다.
 
 
 
1.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심(36:26~37:13)
엘리후는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이제 자연을 다루는 하나님의 능력을 진술한다. 물방울이 안개가 되고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겹겹이 쌓인 구름이 다시 비가 되어 만물을 이롭게 한다. 그렇게 내리는 비로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과 풀과 꽃들도 먹을 것이 풍성해진다. 천둥 번개가 하늘에서 내리치며 온 땅을 떨쳐 울리면, 서방 세계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엘리후는 이러한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인간을 돕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며, 인간의 한계이다.
 
37:1~8에서 하나님은 천둥과 번개로 말씀하신다. 사람은 천둥과 번개가 치면, 그 엄청난 소리와 번쩍이는 빛에 압도되어 공포를 느끼고 부들부들 떨게 된다. 그리고 위험을 감지하면 본능적으로 숨는 동물처럼 도망친다. 엘리후는 천둥과 번개가 실상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한다. 천둥과 번개의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상 현상을 만들어 내신 하나님을 잘 말해준다.
 
그런데 엘리후는 그 천둥과 번개를 만드시는 것이 악인들을 징계하고 선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여전히 욥은 죄를 범한 당사자이므로 천둥과 번개로 심판을 받기 전에 속히 회개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9~13절에서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징계도 하시고 긍휼도 베푸신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으로 북풍이 불게 하시고 얼음을 얼게 하시며, 남풍을 보내어 봄이 오게도 하신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일련의 순환도 인간과 땅을 징계하고 축복하시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 인간이 관여할 것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2. 놀라운 일을 깨달으라(37:14~24)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한 엘리후는 이제 화살을 욥에게 돌린다. 그는 욥에게 자기 말을 잘 듣고 가만히 좀 있으라고 요청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는 자신의 무죄 주장을 자기 말을 듣고 반성하고 회개하라는 의미이다. 엘리후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 욥의 무지함을 일깨운다. 이 부분에서 엘리후는 구름 속의 번개가 번쩍거리는 현상에 관해 설명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조종하시고 구름을 떠다니게 하시는지 그 방법과 방식을 아느냐는 것이다. 엘리후는 이것을 ‘완전한 지식’이라고 불렀다.
 
14~20절을 통해 엘리후는 인간 이해 밖의 일에 대해 조심하고 겸손해야 함을 요청한다. 엘리후는 욥에게 자연의 이치를 아느냐, 자연을 움직일 수 있느냐고 거듭 묻는다. 그것은 인간이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자연의 신비와 이치를 통해 인간의 무지와 무능을,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또 21~24절을 통해 하늘의 태양도 잘 보지 못하는 인간들이 북쪽(고대인들의 사고에 북쪽은 하나님의 성이 있는 곳)에서 비취는 찬란한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정의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크고 올곧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저 하나님의 지혜와 정의에 감탄하고 찬양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나는?
-엘리후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상 현상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을 잘 말해준다. 그런데 천둥과 번개를 만드시는 것은 악인들을 징계하고 선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위해서라고 해석한다. 범죄시했으니, 천둥과 번개로 심판받기 전에 어서 회개하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엘리후의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시다. 인간이 감히 가까이할 수 없고, 인간도 도무지 쓸모없는 존재인 것처럼 묘사한다. 엘리후의 논리라면 인간은 도무지 쓸모가 없어 하나님께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그저 하나님을 바라보며 놀라고, 경외하고, 찬미해야 하고, 무조건 수긍만 해야 하는 존재밖에 되지 못한다.
 
-힘들고 괴로워도 입 다물고 있으라는 하나님이 되어 버린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무정하신 분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인간의 본분은 오직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일 것이다.
 
 
*엘리후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 욥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부정한다. 자신이 욥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다는 비교 의식을 드러낸다. 기상 현상을 들먹이는 의도는 하나님 앞에 불손한(?) 욥을 비난하기 위한 맥락이다. 하나님에 대한 자기 지식으로 남과 비교하며 우위를 가지려는 불순한 의도로 읽힌다.
 
*욥이 몸부림치며 자신의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시도를 자기변명과 하나님에 대한 의문으로 일축하며 정죄하려는 것이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을 인격적인 창조주로 믿기에 질문하고 또 질문하며 답답함을 해소하려 하나, 엘리후는 인간의 절박한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배제하고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 침묵과 수용, 이해를 강요하고 있다.
 
*인간다움이 파괴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현실 속에서 그가 당하는 고통과 비애에는 관심이 없다. 긍휼과 동정의 마음이 전혀 없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설명하는데 열을 올린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맹신하게 하는 자기 지식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더욱 무지하게 만든 꼴이 된 것이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단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다. 고난받는 이유가 죄를 지어서만 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채찍을 통해 교정과 훈련의 목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때로 그 목적을 뛰어넘는 더 큰 뜻 안에서의 고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인과응보에 기초한 하나님의 섭리가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과율에 얽매이지 않으시기에 인간의 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대부분 유예하시며 다함이 없는 은혜와 은총으로 인간을 보듬으신다. 그래서 우리가 산 것이다.
 
 
 
*주님,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천착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겠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으로 하나님을 믿기보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더욱 믿으려고 몸부림치겠습니다.
*주님, 내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경로로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를 기다립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