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단단히 세우시는 하나님 [욥 38:39-39:30]
 – 2023년 12월 17일
– 2023년 12월 17일 –
산 염소의 임신과 출산이 욥의 고난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굳이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대답이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르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일까? 나의 기대가 잘못된 것일까?
    
규범적 지혜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지혜와 무지, 선과 악, 옳고 그름, 정결과 부정이다. 특히 39장에서 언급되는 동물들은 레위기의 규정에 따르면 모두 부정한 짐승들이다. 정결한 것은 좋은 것이고 부정한 것은 나쁜 것이라는 가치와 시각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런 동물들을 언급하신 의도가 무엇일까? 까마귀, 사체를 먹는 매와 독수리 모두 부정한 동물들이다. 그렇다면 이 동물들은 “나쁜” 동물들인가?
    
또, 노아의 방주에는 모든 짐승이 탔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이 없었다. 왜 “좋은” 짐승들만 골라서 태우지 않았을까? 그때 부정한 짐승을 다 없애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이다. 하지만 레위기의 구분은 단지 제사를 드리기에 적합한 짐승이냐 그렇지 않으냐가 정결과 부정을 나누는 차이일 뿐이었다.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짐승이라도 나쁜 짐승이거나 더러운 짐승이 아니다.
    
시간 여행과 우주여행을 시켜주신 하나님은 이번에는 사파리 투어로 초대하셨다. 신비한 동물의 세계이다. 그러나 본문의 기록 목적은 앞장에서 기후나 별자리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목적이 아닌 것과 같다. 야생동물들의 습성을 알려주는 목적이 아니라는 의미다. 굳이 태초로 시간 여행을 하지 않아도, 굳이 저 높은 하늘로 올라가지 않아도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본문의 목적이다. 인간의 지식은 지극히 한정적인 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1. 야생, 광야 빈 들의 짐승조차도(38:39~39:12)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첫 번째 야생동물은 사자이다(39~40절). 사자의 먹거리를 염려하시거나 먹이 주는 법을 알려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까마귀를 이어 언급하신다. 야생의 동물들은 인간의 생활 양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산다. 그런 동물들을 인간은 책임져 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자나 까마귀를 언급하시는 이유는 이런 야생의 동물들조차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어린 사자와 까마귀에게 누가 먹을 것을 제공하느냐고 물으시며 하나님께서 어린 사자에게 사냥하는 법을 알려주셔서 먹이를 구하게 하셨다. 까마귀는 어떤가? 사자와 비교되는 연약한 날갯짓하며 헤맬 때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셔서 키우시는 하나님이시다(39~41절). 맹수로부터 연약한 새 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을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은 고대 근동의 신관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고대에는 인간들이 신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특히 자기 백성을 특별한 은혜로 먹이시고 입히신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광야의 여정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일용할 양식을 삼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주님께서도 무엇을 먹을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공중의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신다고 하셨다(마 6:19~34).
    
39:1~4절은 산 염소와 암사슴의 번식능력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예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을 번식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려주신다. 하나님께서 산 염소와 암사슴의 예를 통해 각 동물의 생식 방법(1절), 생식 주기(2절), 새끼 낳는 방법(3절), 홀로 야생에서 살아가는 방법(4절)을 정하셨음을 알려주신다. 동물마다 다양한 생존 방식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의 주기와 생식 주기와 방법을 따라 살아간다.
    
또 39:5~12절은 들나귀와 들소에 대하여 논하신다. 산 염소와 암사슴의 이야기와 함께 중요한 핵심 단어는 6절의 “들(아라바_건조한 사막), 소금 땅”이다. 4절의 “빈 들”과 함께 사람이 생활할 수 없는 공간이다. 7절의 “성읍, 나귀 치는 공간”과 대비된다. 야생동물들은 인간이 길들이는 동물이 아니다. 들나귀나 들소는 원래부터 자유로웠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이 목초지를 찾아 두루 다니며 먹거리를 스스로 찾는다. 사람이 제공하는 꼴이 필요 없다. 들소가 아무리 힘이 좋은들 사람이 일을 시킬 수 없다(11절). 논밭의 추수를 도울 리 만무하다(12절). 하나님께서 이들의 야생성을 주셨다. 야생동물들은 인간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인간의 능력으로 이들을 다스릴 수 없다. 이들의 야생성을 억누르고 굴복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2. 타조와 말, 매와 독수리(39:13~30)
타조는 지혜 없는 동물로 그려진다. 날지도 못한다(13절). 어디 나무 위나 덤불 속에 둥지를 만들어 자기 알을 보호하지도 않는다. 그냥 땅바닥에 알을 낳고 흙으로 덮어 둘 뿐이다(14절). 누가 지나가다 밟을까 걱정되지만, 타조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15절). 자기가 낳은 알이지만 자기 것이 아닌 양 막 대하고 애써서 낳은 것이 수포가 될까, 걱정조차 하지 않는다(16절).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타조에게 그런 지혜와 명철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17절). *지혜와 명철은 규범적 지혜에서 매우 중요하다. 지혜와 명철이 없으면 죽는다.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세 친구와 엘리후가 “지혜 타령”을 그토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타조는 지혜와 명철이 없어도 잘만 살아간다.
    
사람이 말을 타고 전쟁에 나가 살아남으려면 지혜와 명철이 필수다. 하지만 타조는 기마와 기병을 보고 비웃을 뿐이다(18절). 사람들이 그 귀한 지혜와 명철로 전쟁이나 벌이는 것이 타조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이다. 18~25의 말은 야생마가 아니다. 길들인 말이다. 전쟁터에서 적들과 맞서고 있을 때(21절), 칼과 화살과 창과 투창이 빗발치면(22~23절) 군인들은 무서워 뒷걸음치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두려움도 겁도 없다(22절). 적들의 나팔 소리에도 멈추지 않고 세차게 땅을 박차고 나간다(24절). *”두려움과 공포”는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에서 자주 언급된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나 타조와 말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 어느 곳이나 지혜와 명철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필요 없는 공간도 창조 세계 안에 존재한다. 오히려 지혜와 명철을 잠식하는 두려움과 공포가 지배할 수도 있다. 인간의 행동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두려움과 공포에 영향받지 않고 잘 살아가는 피조물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다른 존재에게도 꼭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매와 독수리는 새 중에서 가장 강하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엄청난 속도로 나는 매와 높은 곳에 둥지를 크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불편한 곳에 만들었을까?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독수리는 상관 하지 않는다. 매는 피를 철철 흘리는 사체를 먹으니 부정하기 그지없지만 인간의 정결과 부정함이 독수리들에게는 전혀 무관하다(30절). *인간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것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세계가 있다. *또 매와 독수리의 강함과 뛰어난 능력은 자신들의 새끼들을 먹이는 데 주로 사용되고 있음을 표현한다. 모든 생물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강조된다.
    
*동물들에 관한 질문에 답을 하시면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욥의 지혜가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것 중 무엇 하나도 쉽사리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인간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것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세계가 분명 존재한다.
    
    
    
나는?
-살아가다 보면 뜻하지 않게 고난을 만나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 앞에 깊은 절망에 젖기도 한다. 예기치 않은 고통을 만나 힘겨운 여정을 걸을 때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떻게 견뎌야 할까?
    
-먼저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믿어야 한다(38:39~39:12).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굶주린 사자와 까마귀에게 먹이를 마련하여 주는 이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으신다. 산에 사는 염소가 언제 새끼를 치는지, 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신다. 새끼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새끼를 배고, 낳고, 어미 곁을 떠나기까지 돌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들나귀와 들소 같은 동물들이 척박한 광야, 빈 들에서 누비고 다닐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 덕분이다. 하나님의 손길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는 생물은 없다.
    
-하물며 자기 백성을 돌아보지 않으시겠는가?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고난 속에 있는 자기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해야 한다(39:13~25). 타조는 날개가 달렸으나 날지 못한다. 재빠르게 달릴 힘을 가졌으나 알을 돌볼 지혜를 가지지 않았다. 알이 밟혀 깨지거나 들짐승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타조를 어리석은 짐승으로 만들고 지혜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에게는 강한 힘과 흩날리는 갈기를 주셨다. 위세 당당하게 나가 싸울 힘과 용맹을 주셨다. 콧김을 내뿜으며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낸다.
    
-누군가에게는 지혜를 주시고 누군가는 용맹을 주신다. 누군가에게는 평안과 안락을 주시고, 누군가에게는 거친 고난과 고통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39:26~30). 매에게는 높이 솟아올라 먹잇감을 노릴 수 있는 날카로운 눈매를 주셨다. 독수리에게는 험준한 바위틈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험준한 요새를 터 삼아 살아가는 모습이 신비롭기만 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에게 열악한 환경을 이기고 살아갈 능력을 주신다.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감각과 사냥감을 포착하는 예리한 본능을 허락하신다.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이기는 능력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동물의 세계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지혜와 능력으로 너끈히 보존하신다. 하물며 인간에 그 자비와 사랑 안에서 모든 역경을 이겨갈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시지 않으시겠는가? 은혜로우신 손길과 섭리를 믿으며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눈에 쓸모없어 보이는 짐승들과 광야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존재한다. 세 친구와 엘리후가 가지고 있던 인간 중심적인 경직된 세계관으로는 볼 수 없다. 그 시각으로는 혼돈이 징벌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편 자신이 잘 모르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는 욥도 문제이다. 인간이 꿰뚫어 보지 못하는 훨씬 복잡한 세계가 자리한다. 하나님은 능히 이 신비스럽고 파악할 수 없는 질서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경외이며, 지혜이다.
    
    
    
    
*주님, 보지 못하는 것이라도 질서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세계를 든든히 서 있게 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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