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자! 즐거이 외치자! [시편 95:1-11]
 – 2023년 12월 27일
– 2023년 12월 27일 –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을 이어받은 한글 성경에는 표제가 없으나 70인역 성경에서는 “다윗의 찬양 시”라고 표제를 붙였다.
    
본문의 전반부는(1~7절) 가을 축제(초막절) 예배에서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을 의지하여 하나님만 경배하고 찬양하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며 창조주이시고, 목자이시기에 마땅히 경배해야 하고 소리높여 찬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위대하신 왕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를 찬양하는 예배로 부르는 시이다. 동시에 후반부는(7b~11절)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일을 근거로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권면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예언자적인 신탁의 성격을 띠 완악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향해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경고를 전한다. 어떤 특정한 상황인지 구체적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왕권이 약해진 때, 완악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다독이며 신실한 순례의 길을 가도록 촉구하는 시이다.
    
    
1. 구원의 반석인 하나님을 예배하자(1~2절)
구원의 반석인 하나님께 피하고 그 앞에 나와 감사한 마음으로 찬송하며 경배하자고 말한다. 구원이 필요한 위기의 상황에 진정한 도움은 하나님밖에 없다.
    
첫 마디가 “오라! 여호와께 기쁨으로 소리치자!”이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기쁨과 환호성으로 노래하자는 호소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해 외치자”라고 요청한다. “구원의 반석”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신적인 용사로 묘사할 때 사용한다. “외치다”라는 동사는 전쟁 신호를 알리며 함성을 지르거나 승리를 외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온갖 위험과 위협들에서 구원하시는 전사이신 여호와를 향해 기쁨의 함성을 외치다는 뜻이다.
    
이 상황은 힘껏 외치는 포효의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감사로 그 앞에 나가자”라는 문장을 직역하면 “그의 얼굴 앞에서 만나자”라는 말이다. 이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자는 의미이다. 회중들이 축제 예배에 참여하여 “노래로” 그를 향해 크게 외치자는 것이다. “외치자”라는 말의 반복은 감사와 노래들로 하나님 얼굴 앞에 머물며 “노래로(비즈미로트)” 쩌렁쩌렁 울리게 하자는 의미이다.
    
    
    
2. 창조주이신 위대하신 왕, 하나님을 노래하자(3~7절)
찬양해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밝힌다. 하나님은 “크고”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3절). “크다”라는 형용사를 두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는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신들 위에 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양해야 한다.
    
시인은 땅의 깊은 곳, 산들의 높은 곳이 그의 손안에 있는 그의 것이라고 노래한다(4절). 사람의 눈에 발견되지 않는 깊은 곳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가장 높은 곳 모두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이다. 온 세상이 그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라고 고백한다.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노래한다. 바다도 그의 것이고 그가 만드셨다. 그의 손이 마른 땅도 지으셨다(5절). 고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다와 삶의 터전인 육지를 조성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촉구한다. 특히 시인은 “굽혀”, “무릎을 꿇자”라고 구체적으로 경외함을 표현할 것도 주문한다. 이는 완전한 복종의 모습이며 피조물인 우리가 마땅히 취할 자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전인격적이다. 말뿐 아니라 행동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찬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시인은 두 가지로 압축한다. 먼저, “여호와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7a 절). 둘째, 우리는 그의 목초지에 있는 백성, 그의 손에 있는 양이기 때문이다. (7b 절). 이 구절은 시편 23편이 생각나게 한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목자라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의 손에 있는 양’이라는 표현에 담긴 이미지는 우리를 하나님의 돌봄을 받는 양으로 묘사된 것이 틀림없다.
    
이 모습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왕 위에 군림하는 압도적인 왕이 아니라 양을목자가 되신 하나님이시다.
    
    
    
3.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7c~11절)
7절 후반절은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으로 마치 예언자들이 신탁하듯 선언한다. “오늘”이라는 단어는 현재의 시간과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95편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것이라면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회중에서 선포하는 말이 된다. 8~11절은 출애굽 이후 광야 여정 중에 있었던 사건과 비교하여 선포한다.
    
므리바에서처럼, 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고 선포했다(8절). “므리바”는 “다툼, 논쟁”, “맛사”는 “시험”이라는 의미로 유혹하는 것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므리바와 맛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며 하나님께 반역한 대표적인 장소들이다. 그들은 당시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하시는가를 물으며 의심했다. 그것을 “완악한 마음”으로 정의했다.
    
완악함이란 “마음의 냉혹함이나 완고함, 무감각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단단한 쇠처럼 마음이 경화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시 상황을 덧붙여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했다고 하셨다(9절). 이는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넌 기적, 애굽의 병사들이 죽은 것, 광야에서 신선한 먹거리를 주신 기적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했다. 비난할 목적으로 주도면밀하게 바라보았다. 하나님을 향한 이 시선은 광야 40년이 몹시 불쾌하게 채워졌다. 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며,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한 백성이라고 한숨 쉬셨다. 특히 10절의 “근심하여(쿠트)”로 번역된 단어는 “역겹다, 몹시 싫어하다. 미워하다”라는 의미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똑바로 걷지 않고 이리저리 주변을 헤매며 방랑했다. 아마도 그 방랑의 시간을 빗댄 표현인듯 하다.
    
그들의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마음은 결국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여정에서 배움을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뜻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고대인들에게 “마음”은 의지의 자리, 의사결정 기관으로 인식되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환호하며 찬양하여도 하나님은 오래된 일들을 기억하시며 자기 백성이 그 길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들의 완악한 마음과 의지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광야 세대의 실패에 초점을 맞추어 간곡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완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분노로 결국 그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신 것이다(11절). 언약 백성의 완악함을 그만큼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의지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것도 무섭도록 신실하시게 동일하다. 완악한 마음을 향한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찬양, 예배로 나아감…. “굽혀 무릎을 꿇고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기쁨으로 교제하도록 길을 열어주셨지만, 함부로 나아가도 괜찮은 분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감사와 찬양으로 나아가 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 그것도 지체하지 말고, “오늘” 순종해야 한다.
    
-결국 진정한 찬양은 노래가 아니다. 순종이다. 순종이 없는 찬양은 뜬구름 잡고, 찬양이 없는 순종은 율법적이 될 수밖에 없다.
    
-구원의 반석인 하나님께 찬양해야 한다. 감사의 찬양과 시를 지어서, 즐겁게 찬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 속에서 찬양이 그쳤다면, 위태로운 신앙이라는 적신호다. 어떤 인생도 하나님 없는 인생을 자신할 수 없다. 하나님 없는 안전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삶 속에 찬양의 감각이 날 서 있는지 늘 돌아보아야 한다. 찬양은 순종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찬양은 묵상의 열매이기도 하다. 주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곱씹을수록 찬양은 절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쁨이 있고서야 참된 찬양의 고백과 하늘의 기쁨이 삶 속에 깃든다.
    
-므리바와 맛사는 언제든지 우리의 삶에서 반복될 수 있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저항한다. 목자가 되신 하나님의 인도함을 뿔로 들이받는 염소와 같다.
    
-목자가 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갈 때 물이 필요할 때, 생수의 강이 터진다. 빵이 필요할 때 벧세다의 오병이어 잔치가 재현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영원한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
 
 
*견지망월(見指忘月)_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라는 뜻이다.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과 하나님 나라이다. 그런데 유독 우리의 신앙풍토는 구속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 나라를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다분하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개회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6.25전쟁과 혹독한 근대화의 시기를 지나면서 혹독한 이 땅에서의 삶보다 내세를 강조한 측면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속은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한 원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은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생성하게 한다. 시민권을 받았으니 당당하게 그 나라의 질서와 가치를 따라 살아내야 하리라. 미래의 죽어서 가는 천국을 막연하게 바라보기보다 지금, 오늘 여기가 하나님 나라임을 인식하고 누리며 살아야 한다.
 
*교회는 세상 질서와 다른 원리로 사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욕심을 버리는 것을 경쟁하는 곳이다.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를 교회에서 할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얼마나 많이 썼느냐가 우리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지금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세상의 가치로는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7절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 손의 양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새번역)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목자로 고백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다. 그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하나님이시다(3절). 우리의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권능과 위엄으로 백성들을 억누르는 하나님이 아니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다.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시 23:1~3).
 
*그러나 이렇게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을 맞서고 헤쳐나가야 할 것이 많다. 애굽에서 해방된 직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 오랜 종살이에서 해방된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거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받는 과정이 그랬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선대했지만, 이스라엘은 스스로 목이 곧은 백성이 되었다(출 33:3). 고집 세고 원망과 불평에 적수가 없을 만큼 교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비록 “그러므로 내가 진노 중에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새번역_11절) 라고 말씀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기록된 성경을 통해 잘 안다.
 
*므리바와 맛사는 나도 언제든지 직면할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물이 없어 깊은 갈증으로 헤매일 때, 생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는 감사함으로 살아야 하리라.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시선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시험하면 안 된다.
    
    
    
    
*주님, 구원의 반석이고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완악함의 얼굴이 빼꼼히 머리를 내밀 때 광야의 므리바와 맛사의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결심과 순종으로 헤쳐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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