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 [삼하 11:14-27]
 – 2022년 10월 05일
– 2022년 10월 05일 –

범죄한 다윗이 폭주한다. 밧세바와의 간음죄를 감추기 위해 살인교사까지 거침이 없다. 다윗이 자신의 간음죄를 덮기 위해 더 큰 죄들을 불러왔다.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의 행위를 아주 악하다고 평하셨다. 한편 요압의 행동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야와 같은 장수가 죽도록 다윗의 명령대로 행한 것은 충성이 아니었다.



1.죄의 늪에 빠지다(14-15절)
충직한 우리야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한 계획에 동조하지 않자 밧세바와의 죄를 감추려고 우리야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더구나 우리야를 죽인 명령이 적힌 편지를 우리야 손에 들려 보낼 정도로 잔인하다. 죄를 숨기려고 더 큰 죄와 타협한다. 완전히 죄의 늪에 빠진 형세다. 간음죄가 살인교사죄로 이어진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묻고 하나님의 궤를 모시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다윗의 모습은 온간데 없다. 정욕과 은폐에 물들어 추악해 진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죄로 죄를 감출 수 없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현명하게 회개 하는 것”이다. 회개하고 바로잡아 이에 따른 처벌을 받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2.착각의 늪에 빠지다(25절)
다윗은 우리야를 살해하기 위해 요압과 공모한다. 자신의 죄를 감추고 완전 범죄를 꿈꾸던 다윗은 우리야가 전쟁터에서 전사했다고 꾸미기 위해 요압에게 우리야를 선봉에 세우라고 명령한다. 결국 우리야는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평상시 부하들의 전사에도 가슴 아파하며 슬퍼하던 다윗이었다. 심지어 사울이나 아브넬과 같은 원수의 죽음에도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의 죽음 앞에서 너무도 태연하다. “너는 요압에게, 칼은 이 편도 죽이고 저 편도 죽이기 마련이니, 이번 일로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여라. 오히려 그 성을 계속 맹렬히 공격하여서 무너뜨리라고 전하여, 요압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여라.”(새번역_25절)

그저 태연하게 전쟁 중에는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평소의 다윗답지 못하다. 다윗은 간음죄로 인해 올바른 생각과 판단이 불가능해 진 것이다. 죄의 영향력이 무서운 것은 죄에 대한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다윗은 우리야의 전사로 인해 자신과 밧세바와의 간음죄가 은폐되고 더 나아가 충성스러운 부하의 부인을 신속하게 거둠으로 내막을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주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간음이 들통남으로 실추 될 수 있었던 명예가 고스란히 지켜졌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범죄로 인해 마땅히 감수했어야 할 수치를 모면하기 위해 더 큰 죄로 죄를 덮은 것이다. 다윗은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되었다고 여긴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보게 하는데, 다윗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심을 완전히 잊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보고 계셨다.



나는?
-다윗은 하나님께서 공의와 정의로 통치 하시는 분임을 몰랐을까? 자신이 왕의 자리에 있으니 그 대상이 아니라고 착각했을까? 자신이 짓는 죄를 다 알고 계시고 결국 그 행한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닐까? 다윗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하기에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한 흔적들이 너무도 선명하다. 그런데 밧세바 사건은 이 모든 그의 걸음들이 무색해 진다.

-죄가 이렇게 무섭다.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던 다윗을 순식간에 돌변하게 만든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될 때, 그 순간이 하나님과 가장 멀어질 수 있는 때임을 잊으면 안 된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존경을 받는 왕이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누구보다 많이 받은 왕이었다. 그렇더라도 인간은 죄에 대하여 얼마나 무방비한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모델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얻었던 최고의 칭송 중에 하나인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던 권력이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한 사악함과 강포함으로 사용 되었다. 바울이 탄식한 그 탄식이 이런 모습의 다윗을 보며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을 외면할 수가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충성스러운 우리야를 바라보면 속상하다. 다윗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함께 전장을 누빈 용사마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아무것도 모른 채 우직하게 자신의 손으로 시행하는 것을 보노라니 속상하고 속상하다. 자신의 죽음 명령서임을 알지 못하고 요압에게 건네는 우리야의 모습이 아련하다.

*요압은 너무 너무 아쉽다. 이스라엘의 장군이라면 우리야와 같은 37명의 용사중의 한명을 사지로 내몰라는 다윗의 명령을 거부했어야 했다. 이것은 부당하다고 외쳤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권력의 개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연합은 이리도 잘 들어맞는다. 요압은 벅어도 본문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를 수행하다. 적어도 이 순간은 다윗의 개가 되고 말았다.

*밧세바가 우리야의 죽음으로 인해 통곡하는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다윗이 자신과의 간음을 감추기 위해 이 모든 일을 진행하였다는 것을 알았을까? 만약 알고도 이리 슬피 울었다면 그녀의 슬픔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한 위선일 뿐이다. 하지만 다윗이 행한 일을 모르고 남편의 죽음의 소식을 받았다면, 이제 그녀는 과부로서 막막한 삶을 시작해야 할 터이다. 그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의 울음일까? 밧세바의 통곡이 어떤 속내가 담긴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애도기간이 마치자 마자 다윗의 부인이 되면서 이 또한 우리야의 죽음만 애처롭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밧세바를 거두는 다윗을 백성들의 눈에 보기에는 충성스러운 부하의 부인을 책임지려는 성군의 모습으로 비쳐질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완벽하게 감추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계셨다. 다윗을 향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27절)고 하셨다. 매우 불쾌하다는 의미이다. 사울에게 악하다고 반응하셨던 그 반응이 다윗에게 보일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윗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죄는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든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주님, 죄의 늪에 빠져 죄에 죽어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도리어 잘 되간다며 안심하는 다윗의 모습이 민망합니다. 저도 언제든지 이렇게 될 수 있는 인간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부디 죄에 쉽게 빠지지 않도록 늘 도와 주십시오.
*주님, 하나님 보시기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다윗과 같은 행동, 주님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주인처럼 행동하지 않도록 분별력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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