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혼란한 시기, 다양한 사람들 [삼하 16:1-23]
 – 2022년 10월 15일
– 2022년 10월 15일 –

다윗의 도피 생활 중에 일어난 마음이 꺾이는 사건들을 다룬다. 특히 이 과정에서 다윗에게 헌신적인 신하들과 적대시하는 이들의 모습을 대조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의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

 

1.시바(1-4절)
감람산을 지나 광야로 들어서기 전에 므비보셋의 하인 ‘시바’가 음식을 챙겨서 나아왔다(1절). 시바는 음식을 싣고 온 나귀 두 마리는 다윗의 가족들이 타고, 빵과 여름 과일은 신하들이 먹고, 포도주는 누구나 광야에서 기진할 때 마시라고 가져왔다고 말한다(2절). 이 말을 듣는 다윗은 감동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바가 섬기는 므비보셋은 압살롬을 지지하고 예루살렘에 있다는 말에(3절) 확인절차도 없이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가 가질 것을 명령한다(4절).

시바는 사울의 신하였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사울의 전 재산을 주었고 그 관리를 시바에게 맡겼었다. 그런데 다윗이 압살롬에 쫓겨 예루살렘을 떠날 때 시바는 음식을 한 아름들고 찾아와 다윗을 위로하면서 므비보셋을 모함한다. 결국 자기가 섬기는 주인의 재산을 혼란한 시기에 찬탈하고 만다.

*자신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 거짓말을 마다하지 않는 전형적인 사람이다. 예사로이 거짓과 친구처럼 지낸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이 당연하게 보인다.

*다윗은 쫓기는 와중에 시바가 가져온 나귀와 음식들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바의 말만 듣고 경솔한 판단을 내린다. 십분 그럴수 있을 것이라 이해가 된다. 눈 앞에 놓인 음식들과 과일, 그리고 포도주 더미들은 이제 막 시작된 도피 생활의 든든한 격려가 될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바의 말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확인하고 공치사를 해도 늦지 않을 텐데…. 아쉽다.

*살다보면 마음이 앞서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꽤 있다. 특히나 어려울 때 큰 위로와 격려를 맛보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시바의 행동을 기억하고 조금만 더 신중해 지자.

 

2.시므이(5-8절)
바후림 마을에 가까이 이를 때 사울 집안의 친척인 시므이가 따라 붙으면서 줄곧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한다. 다윗을 향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 불한당이라고 저주하며 사울의 집안 사람을 다 죽이고 왕이 되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그 피값을 갚으신다. 압살롬의 손에 넘기신다. 이는 마땅히 받아야 할 재앙”이라고 외친다.

시므이도 사울의 신하였다. 그는 사울에게서 다윗에게 왕권이 이전되는 과정에 꽤 불만을 가졌던 것 같다. 다윗이 파난을 가는 길목에 나타나서 험담과 욕설, 돌을 던지며 저주하였다.

*그의 저주는 전혀 맞지 않는 가짜뉴스다. 그에게는 블레셋의 손에 사울왕과 그의 아들들이 죽은 것과 그의 집안에 멸문지화를 당한 것에 대한 왜곡된 뉴스가 있었다. 다윗과 상관 없는 최후였지만, 마치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인냥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 불한당”라고 비방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야 압살롬을 통해 그 죄값을 받으신다고 통쾌해 한다.

*진실을 알고 있어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고 듣고 말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사실보다 자신의 뇌피셜을 더 사실처럼 여긴다. 이런 자세는 말씀을 말씀으로 듣지 않고 자신이 듣고 싶은 뇌피셜로 듣게 한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읽고 들어도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 가능성이 크다. 두려운 일이다.

 

3.아비새(9-14절)
시므이의 저주는 집착에 가까웠다. 호위병에게 둘러 싸여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돌을 던지며 저주했다. 이 모습을 보고 듣고 있던 아비새는 격분하여 당장 그의 머리를 자르겠다고 아뢴다(9절). 하지만 다윗은 이렇게 대답한다. “스루야의 아들아, 나의 일에 너희가 왜 나서느냐?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그가 나를 저주한다고,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삼하 16:10 새번역) 그리고 모든 신하들에게 말했다. “생각하여 보시오. 나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도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하물며 저 베냐민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혹시 주님께서 나의 이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 한 저주 대신에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삼하 16:11~12 새번역)

*아…. 다윗의 마음이 매우 유연해 졌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에게 보였던 편향된 모습과 또 다르다. 생각이 깊어지고 태도가 매우 유연하다. 이제 막 압살롬을 피해 도피하는 생활을 시작한 짧은 시간들이 흘러 갔지만, 다윗의 성품이나 인격이 성숙 했음을 보여준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시므이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아비새를 만류하며 그의 칼을 내려놓게 한다.

*한편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들으며 억울했을 것이다. 그의 저주의 말에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의 말은 모함만이 가득한 말들이었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굳이 자신이 직접 하지 않더라도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억울하니 자신의 입장을 전혀 몰랐을 시므이를 불러다 앉혀 놓고 조근 조근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시므이는 다윗의 입장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이런 그를 상대로 얼마나 설명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다윗은 어떤 변명도, 칼을 들어 시므이를 치지도 않는다. 그리고 담담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무엇보다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그 자체만으로는 억울하고 틀린 말이지만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더 악한 죄를 기억하고 스스로 그 저주를 하나님의 저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계심을 믿으며 자신이 한 일과 당하는 일의 연관성을 굳이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직면하며 자신의 과거로 인해 당하는 억울함을 보시고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 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아마도 감람산을 오르며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 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수긍이 간다. 다윗의 예리하게 날 선 영성이 돌아왔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보고 듣고 생각한다. 시므이의 일방적이고 무식한 저주도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을 바라는 신앙고백으로 승화시킨다. 나에게도 이와 같은 예리하게 날이 서 있지만, 유연하고 부드러운 영성으로 목회하기를 갈망한다.

*아비새의 충성스러움도 눈에 띈다. 무수한 호위병들이 있었지만 시므이의 저주에 반응한 사람은 아비새 뿐이었다. 묘하게도 이렇게 막장의 저주와 같은 사건이 너무도 허망한 히든 카드로 설명이 끝난다.

 

4.후새(15-19절)
다윗의 충성스러운 신하 후새가 거짓으로 압살롬에게 전향했다. 자신의 다윗을 향한 복심을 숨기고 예루살렘에 이제 막 입성한 압살롬에게 나아가 충성을 맹세한다. 후새 자신이 다윗의 친구임을 압살롬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이 친구를 대하는 그대의 우정이오? 어찌하여 그대의 친구를 따라서 떠나지 않았소”(새번역_17절) 라고반응하였다.

*그럼에도 압살롬도 귀가 얇아서 인지 진지한 마음의 판단이 아쉽다. 아마도 다윗이 예루살렘을 빠져 나간 것에 대한 승리감에 고취되어 예리하게 판단하지 못한 듯 하다. 이런 압살롬에게 후새는 “주님께서 뽑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뽑아 세운 편이 되어 함께 지낼 작정”이라고 고백하며 접근한 것이다. 후새는 압살롬에게 자신이 이제 누구를 섬기겠냐고 반문하며 전에 부왕을 섬긴 것 처럼 섬기겠다고 다짐하였다(18-19절).

 

5.아히도벨(20-23절)
그는 다위싀 모사였지만 압살롬의 모사가 되어 새로운 왕권 창출에 앞장 섰다. 결정적으로 다윗 왕이 왕궁을 지키라고 남겨둔 부인들과 동침할 것을 첫 번째 정책 건의로 내어 놓는다. 이와 같은 행위는 다윗 왕에게는 패배감을, 압살롬과 함께 하는 무리들에게는 한껏 사기를 드높이고 더욱 단단하게 결집시키는 효과를 가져 올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이렇게 임금님께서 부왕에게 미움받을 일을 하였다는 소문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면, 임금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더욱 힘을 낼 것입니다.”(새번역_21절)

사무엘서 저자는 이와같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새번역_23절)

어떻게 이렇게 기막힌 묘수를 생각할 수 있느냐이다. 그런데 이런 극찬의 표현중에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라는 평가가 몹시 씁쓸하다. 이와같은 표현은 그만큼 아히도벨의 지혜와 지략이 뛰어나다는 표현 이겠지만, 당시 관습상 다윗의 후궁들도 엄연히 압살롬의 어머니들이었다. 이방나라에게 점령 당하면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아들에게 어머니가 그것도 백주 대낮에 “온 이스라엘”이 지켜볼 수 있는 가운데 이런 짓을 하라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 여쭙고 받은 말씀처럼 인식하다니…. 몹시도 씁쓸하다.

*설마 진정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의 입에 이런 말을 담아 주셨을리 없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시다. 사람의 생각이나 상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분이시지만, 인륜을 무시하는 분은 아니시다.

*사람들이나 다윗이나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말을 이와같이 여기는 것은 평소에 그의 지략과 지헤가 그만큼 예측을 불허할 만큼 지혜로웠다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반란의 무리가 예루살렘에 아무런 저항 없이 입성하고 이제 제 딴에는 가장 먼저 중요하게 해야 할 것이라면 내놓은 정책이 다윗의 부인들을 공개적으로 범하게 하여 다윗의 왕위를 계승 했다는 것을 백성에게 보여 주려한 끔찍한 범죄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행위는 밧세바 사건 이후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선언 하였던 하나님의 저주(삼하 12:11-12)의 성취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러한들 압살롬이 이 저주를 성취하는 당사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다윗이 암몬과 다말 사건만 적절하게 처리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을 수 있다.

 

나는?
-시바의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에서 나라와 민족의 혼란이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기회로 밖에 보지 않는 비열함과 이기적인 모습이 보인다. 자신만 잘 된다면 나라의 흥망성쇠는 아랑곳하지 않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이다. 혼란한 틈에 거짓된 모함을 능청스럽게 잘 활용하여 잠시의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런데 아주 잠시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악은 오래가지 못하게 하신다.

-오늘날 시바와 같은 무리들이 드러내놓고 모함과 속임수로 나라와 민족을 혼란스럽게 한다. 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위기의 시대에 이들은 그저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망과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상관 없다는 듯이 말하고 행동한다. 너무도 뻔뻔스럽기에 깊은 한숨만 나온다.


-시므이의 편향된 뇌피셜이 광야로 향하는 다윗을 직격했다. 자기들의 이익과 정치적 야욕을 위해 확성기를 틀어대며 온갖 혐오스러운 말로 난동을 부렸던 이들이 생각나게 한다. 그들의 배후에서 끊임없이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이들도 생각난다.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대로만 해석하는 그들의 뇌피셜이 아비새처럼 분노하게 만든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시므이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질책으로 듣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계기로 삼는다. 겸손하고 유연해진 다윗이 오히려 더 놀라울 지경이다. 얼마나 답답할지 가늠하기도 곤란한 광야로의 도피 생활 초입에 만난 시므이의 인격살인에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므이의 광란의 저주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칼을 빼려는 아비새의 마음을 진정 시키며 이 모든 수치를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모든 것이 잘 되는 권력의 정점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감람산을 맨발로 오르며 통곡할 때 회복된 하나님을 향한 예리한 영성이 인간적인 분노보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게 하였다.

*오랜 시간 자기 마음대로 반응하고 결정하였던 것에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마음과 뜻을 가늠하며 결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하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에서 진정 필요한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을 먼저 회복 시켜 주셨다.


-아히도벨의 첫 번째 정책이 다윗의 왕권의 권위를 백성들 가운데서 철저히 무너뜨리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의 혼란과 분열의 시간 직후 처번째로 내어 놓은 정책이 전 정권 탄압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인격살인”이었다. 세상은 늘상 이런 형태로 권력이 이어져 왔다. 세상에서는 당연한 방법이고 이치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시기에 그 왕권을 대리통치하는 인간 왕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야 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나 다윗,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지혜와 지략을 당연히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신뢰하였다.

-그런데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세상보다 더한 추잡스러운 첫 번째 전략적 정책이라니….압살롬조차 “이제 우리가 무슨 일부터 해야 될지 의견들을 내어 보시오(새번역_20절)” 했을 때 예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정책들이 사람들에게는 마치 하나님의 응답처럼 여겨진 것도 통탄스럽다.

*마치 오늘 날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 말을 천연덕스럽게 전하는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이들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성경과 상관 없는 말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인 양 스스로 자부하고 착각하며 전하는 목사들도 문제인 것이다.

*다윗의 통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별력이 평안한 태평성대의 시간을 지나며 무뎌 질대로 무뎌 진 것이고, 모사로서 자신의 정책 건의 무게를 하나님 앞에서 생각한다면 결코 낼 수 없는 정책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첫 번째로 낸 아히도벨의 마음도 도무지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 없는 것 이었음을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의 입에서 전해지는 말의 무게를 늘 잊지 않아야 하리라.

 


*주님, 다윗 주변의 사람들의 면면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먼저임을 늘 잊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주님,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에 시바나 시므이 같은 이들이 더욱 우리의 정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럴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올곧게 살아가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나의 이익보다 손해가 되더라도, 나의 명예가 드높여지지 않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말씀에 곧은 생각, 따듯한 성품으로 살기를 결심해 봅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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