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이방인을 위한 하늘잔 [막 8:1-13]
 – 2024년 03월 01일
– 2024년 03월 01일 –
두 번째 큰 무리를 먹이시는 사건이 등장한다. 주님은 사흘 동안 자신을 따르던 무리가 주린 상태가 되자 불쌍히 여기셨다. 그대로 되돌려 보낼 수 없어 제자들을 불러 오병이어의 기적과 꼭 닮은 기적을 행하신다.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일원으로 함께 성만찬에 참여하는 모습을 그리려고 한 듯 보인다. 다시 유대 지역으로 돌아온 후 만난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시험하려고 표적을 구했다. 그들의 요구에 주님은 깊이 탄식하시며, 이 세대에 아무런 표적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1. 칠병이어의 기적(1~10절)
주님은 여전히 데가볼리 지역에 계신다(그 무렵_1절). 못 듣는 사람을 치유하신 기적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주님께로 모여든 큰 무리는 아마도 못 듣는 사람을 치유하신 소식을 듣게 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사흘을 지냈고 먹을 것이 없었다. 3절의 언급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는 것으로 보아 사흘 동안 계속 먹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이 언급은 주님께서 직접 하신 것이다. 주님은 영적인 문제뿐 아니라 육체적인 부분도 관심을 보이시고 세밀하게 살피신다.
    
한편 이미 오병이어를 경험한 제자들은 주님의 문제 제기(2~3절)에 그때와 별 차이 없는 아쉬운 반응을 보인다. “이 빈 들에서,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이 모든 사람이 먹을 빵을 장만할 수 있겠습니까? (새번역_4절).” 오병이어를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무지와 불신앙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이 복음서를 읽는 성도들은 지속해서 불신앙과 무지의 태도를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그만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역사였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바로 직전의 수로보니게 여인과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 친구들의 믿음보다 못한 듯한 제자들의 모습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은 스스로 거룩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었다.
    
제자들의 반응에 주님은 “떡이 몇 개나 있느냐(5절)”고 물으신다. 제자들은 일곱 개라고 대답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기적 이후에 남은 일곱 개의 광주리와 함께 이방 민족을 향한 메시아 잔치의 충만함과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또 특이한 것은 오병이어에서는 떡과 물고기를 함께 들어 축사하셨지만, 먼저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 후에 생선을 들어 축사하신다(6~7절). 헬라어 본문도 이렇게 구분되어 있다. 특히 “축복하다(7절_율로게오)”는 고전 11:24; 눅 22:19에서 성만찬을 나타낼 때 사용하였다. 마가는 이 단어를 통해 떡과 물고기를 따로 축복하시는 이 모습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성만찬에 참여하는 그림을 그려보지 않았을까 싶다.
    
사천 명 정도의 무리를 먹이신 주님은 그들을 흩어 보내신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이동하신다. 추측하건대 갈릴리 서편 지역으로 이동하신 듯하다.
    
    
    
2.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세대_11~13절)
유대 지역으로 돌아오신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만나신다.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려고 표적을 구했다. 7장을 시작하며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주님과 논쟁하였고, 칠병이어 기적 이후에 또다시 논쟁하신다. 그들이 요구한 표적이 어떤 것인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주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메시아로서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요구한 듯하다. 마가는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주님은 깊이 탄식하신다.
    
그들은 이방지역에서 돌아온 주님께 기다렸다는 듯이 “힐난(수제테오_논쟁, 토론)”했다. 문맥상 주님께서 유대 전통을 무시하고 부정한 이방인들과 무분별한 교제를 일삼는 것에 분개한 듯하다. 무엇보다 날로 높아져만 가는 주님의 명성을 어떻게든 제어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올무에 빠뜨릴 수 있는 질문을 가져와 던진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에서 “표적(세메이온)”은 일반적인 기적과 다른 신학적 의미가 있는 기적을 의미한다. 즉,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은 주님의 사역을 통해 확증할 수 있는 명백한 구약적 증거를 의미한다. 직접적인 표현으로 “당신이 구약에서 예고한 메시아라는 표적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이에 주님은 깊이 탄식하신 것이다. 무리들을 향한 탄식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표적을 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도 이어진다. 마태는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 16:3~4)”라는 주님의 평가를 첨가했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역으로도 이미 충분한데도 확실하게 하늘로부터 온 표적인 예수를 거부하는 그들(바리새인들)에게 줄 다른 표적은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하신다.
    
주님은 그들을 떠나 배를 타고 건너편 벳새다로 가신다. 마가는 “그들을 떠나”라는 표현을 통해 지리적인 이동뿐 아니라 이 세대를 위해 사역하지 않으시겠다는 의지를 담아냈다.
    
    
    
나는?
-주님은 변함없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챙겨온 양식이 동났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사흘 동안이나 함께 한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이는 단지 먹을 것이 없어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말씀에 주려 있었던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오병이어 때와 달리 가까운 마을도 주변에 없었던 것으로 추측 된다. 주님은 먹지 못한 채 먼 길을 돌아갈 무리를 여전히 “목자 없는 양 “같고 돌봐줄 부모가 없는 “고아”처럼 바라보시며 깊이 애통해하셨다. 그리고 영적인 필요와 육체적인 필요를 나누지 않고 배고픔을 채워 주셨다. 물론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나라이다.
    
-칠병이어도 제자들이 가진 작은 것으로 큰 무리를 먹이셨다. 제자들에게는 사천 명을 먹이기에는 턱없는 것이었지만, 주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 아무리 스스로 생각하기에 보잘것없고 부족한 것이라도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채움을 허락하신다. 아쉽게도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다. 불과 얼마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으나 여전히 주님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능력도 신뢰하지 못한다. 제자들의 눈은 가지고 있는 적은 음식, 빈 들이라는 현실에만 고정되어 있다. 당연히 눈을 돌려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혹시 제자들처럼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주님이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걱정만 하고 있지 않는가?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셨다. 그리고 일곱 광주리의 떡이 남았다. 이는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얼마나 풍성할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적이다. 유대 지역에서의 기적에 이어 이방지역에서도 광야에서 만나의 기적을 재현하신다. 지금 우리의 삶의 현실에 얼마나 도전이 되는지 모른다. 계절상으로 봄이 가까워져 왔지만, 여전히 나라와 경제는 차디찬 겨울이다. 경제의 봄은 아직 느껴지지도 않는다. 새해를 시작하며 올해는 더욱 나빠질 것이라고만 한다. 이때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주님의 돌보심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을 기대한다. 더 나아가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가 더욱 힘들 약자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깊이 탄식하신다. 그리고 다시 표적을 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려고 다른 특별한 표적을 요구하였다. 주님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시고 깊이 탄식하셨다.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마음이 지금까지의 표적을 보고서도, 더 나아가 더 큰 표적을 보아도 주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완악함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3일 동안 굶었어도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집에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유대 지도자들은 주님을 시험한 것이다. 그간 주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들었음에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한 것이다. 표적을 더 보여준들 믿지 않을 것을 아셨기에 주님은 깊이 탄식하실 수밖에 없었다. 안 믿기로 작정한 이 시대의 궤변에 믿음의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주님, 여전히 믿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지 하여 두렵습니다.
*주님, 여전히 또 다른 표적을 구하며 주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이 소름이 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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