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영안이 열려 온전히 보일때까지 [막 8:14-26]
 – 2024년 03월 02일
– 2024년 03월 02일 –
예수님의 경고와 벳새다 맹인 치유 이야기가 등장한다. 제자들의 깨달음을 주제로 다룬다. 배로 이동하는 중에 떡 준비하는 것을 잊은 제자들이 서로 수군대고 주님께서는 비유의 교훈으로 제자들의 주의를 명령하시지만 깨닫지 못한다. 주님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둔한 마음과 망각을 여덟 개의 질문을 통해 질타하시고, 두 기적 사건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제자들의 믿음을 촉구하신다. 마가는 벳새다 맹인 치유 기적을 마지막으로 갈릴리 사역 기술을 마무리한다. 맹인 치유의 특징은 주님께서 한 번에 치유하지 않으시고 두 번에 걸쳐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맹인의 눈뜸이라는 주제는 제자들의 보지 못함이라는 주제와 절묘하게 대비를 이룬다.
    
8:11-13과 본문의 연관성은 두드러진다. 앞 단락에서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다양한 기적들에도 불구하고(특히 직전의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표적을 구하는 문제를 드러냈다. 그리고 본문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두 차례나 겪었음에도 떡의 문제로 고민하는 제자들을 보여준다. 4:11-12에서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 비밀이 주어졌다고 했음에도 그들은 하나님 나라 능력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주님의 안타까운 가르침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1.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14~21절)
제자들이 떡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다. 제자들이 난감해했다.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라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라는 표현은 지속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하려는 사람들의 태도를 빗댄 것이 확실하다. 직전 단락에서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표적을 구했다가 거절당한 시간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헤롯의 누룩”이라는 표현은 마가복음에서는 아직 헤롯이 주님을 직접적으로 해치려는 의도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표현한 것은 다소 의외다. 하지만 12장에서 헤롯당이 바리새인과 더불어 주님을 잡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함께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누룩”이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악하고 잘못된 가르침이나 영향력을 언급할 때 쓰였다(마 13:33; 고전 5:6~8).
    
제자들은 주님의 경고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서로 수군거리다가 자신들이 준비해 오지 못한 떡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16절).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악한 영향력을 말씀하신 것을 자신들의 당면한 문제인 떡 없음에 대한 것으로 관심을 제한한 것이다. 이에 주님은 “어찌 떡이 없으므로 수군거리느냐? (17절)”라고 책망하신다. 직전 칠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고, 갈릴리 지역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떡 없으므로 의논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실망스럽다. 주님은 제자들의 실망스러운 행동의 원인을 “알지 못함, 깨닫지 못함, 마음의 둔함” 때문임을 밝히신다(17~18절).
    
특히 “깨닫지 못함”은 4장에서 비유를 가르치실 때 외인들(이방인들)의 특징으로 말씀하셨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큰 광풍을 만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을 묘사할 때도 “깨닫지 못함”의 주제가 다시 드러났다(6:52). 본문에서는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새번역_21절)” 라고, 안타까워하신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은 예레미야 5장, 이사야 6장, 에스겔 12장 등을 생각나게 한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하고 완악해진 상황을 경계할 때 주로 등장했다. 주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과거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의 상태를 오병이어 기적과 칠병이어 기적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깨닫지 못함을 직면하게 하신다(19~20절).
    
제자들이 그 놀라운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깨닫지 못한 것은 각각의 사건들이 가지는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의 답답한 무지함에도 주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시며 가르쳐 주신다.
    
    
    
2. 벳새다 맹인을 고치심(22~26절)
갈릴리 사역을 마감하는 마지막 이야기로 마가는 벳새다의 맹인 치유 기적을 기록한다(22~26절). 마가는 이 사건을 전반기 갈릴리 사역의 종결임과 동시에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시는 주님의 후반기 사역의 시작을 알린다.
    
그런데 벳새다 맹인 치유 사건은 특이한 점이 있다. 이 맹인이 한 번에 치유되지 않고 두 번에 걸쳐 치유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맹인의 눈뜸과 제자들의 보지 못함이 절묘하게 비교되고 있다. 갈릴리의 최북단 벳새다에 도착한 주님에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려와 주님께 안수를 요청한다. 7:31~37의 귀먹고 말 못 하는 자를 치유하신 사건과 짝을 이룬다. 전개 과정도 엇비슷한데, 사람들이 환자 한 사람을 주님께 데려와 안수를 요청하고, 주님은 그를 따로 데려가 무리로부터 분리한다. 그리고 독특한 치유 행위를 선보이시는데 환부에 침을 뱉으셨다. 그런데 귀먹고 말 못 하는 자의 치유는 사람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본문의 치유는 환자의 회복 과정을 자세하게 다룬다.
    
주님께서 맹인의 손을 잡으시고 그를 마을 밖으로 이끄신다. 그리고 은밀하게 치유 행위를 베푸신다. 눈에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신 후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신다. 그는 사람들이 나무처럼 보인다고 말하며 아직 온전한 시력을 얻지 못했음을 보여준다(23~24절). 앞서 “에바다”라고 선언하신 후 곧바로 귀가 열리고 입이 풀어졌던 것과(7:34) 비교가 된다. 그래서 자칫 주님의 능력이 단번에 고칠 만큼 충만하지 않은 것인지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완전히 보지 못한 상태에서 서서히 회복되도록 하신 것일 수도 있다. 주님께서 다시 안수하신 후 그때 모든 것이 밝히 보였다(25절).
    
서서히 시력이 회복되는 맹인의 기적은 제자들의 보지 못함과 선명하게 비교된다. “떡”을 가져오지 못함으로 불안해하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눈앞에 계시는 참 떡이 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맹인이 사람들을 나무처럼 본 것처럼 제자들이 잠시 떡으로 근심한 것은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시력이 흐려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마가는 맹인 치유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묘사하려는 의도를 담았다. 맹인을 치유하신 기적 이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등장한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보이는데, 맹인은 주님의 1차 치유를 통해 시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지만 그 치유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으나 완전한 고백은 아니었다. 심지어 주님께서 베드로를 그 고백 직후에 꾸짖기까지 하셨다. 맹인은 두 번째 치유를 통해 시력을 완전하게 회복한다.
    
제자들의 “깨달음과 보게 됨”에 대하여 암시하는 치유 사건이다. 벳새다 맹인의 육체적인 어두움은 제자들의 영적 어두움을 가리키고, 주님의 단계적 치유를 통해 맹인이 시력을 회복한 것처럼 제자들의 깨달음과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도 더디기는 하나 꼭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나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14~16절). 그들의 누룩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의미한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고 헤롯은 헤롯 왕가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 나라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영향력을 제자들이 받지 않도록 경계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세력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점검하고 점검하셨다. 주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고도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구한 그들은 자기 입맛에 맞을 때까지 어떤 진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권력을 위해 경건을 가장하고 진리를 억압하는 헤롯 역시 경계해야 한다.
    
-바리새인의 엄격한 율법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에 따른 자기들만의 천국을 꿈꾸는 종교적 이상이나 사상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로마제국의 하수인으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 왕국 세우기에 혈안인 헤롯의 정치적 야망이나 야욕을 멀리하라는 뜻도 있다. 그들이 꿈꾸는 “제사장 나라”, “헤롯 왕국”은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거나 충돌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 성향이나 종교적 신념이 달랐으나 메시아를 위협하고 주의 나라를 대적하는 일에는 의기투합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시작하시는 주님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동경이나 추종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임을 분명하게 밝히신다.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와 내가 꿈꾸는 나라가 어긋날 때, 우리도 언제든 하나님 나라와 그 왕을 대적하는 편에 설 수 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처럼 교회 안의 전통이나 정치적인 야합이 만들어 내고 채색되어지게 하는 이 시대의 누룩은 어떤 것일까? 성경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를 변색시키거나 퇴색시키는 누룩은 무엇일까? 깨닫고 깨달아 경계하고 경계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잘 반영하고 드러내는 더온누리 공동체여야 하리라. 혹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처럼 참된 교회의 모습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영향력에 마음과 생각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는가?
    
    
-제자들이 떡을 챙겨오지 못함으로 염려한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주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떡이 없는 현실을 근심한다. 그간의 가르침이 이처럼 참담한 것에 대해 주님은 깊이 애통해하신다. 나는 주님의 마음과 가르침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을까?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어 있느냐? (새번역_17절 하 – 18절)”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생생하다. 제자들은 누룩에 대한 말씀을 떡에 관한 이야기로 착각할 만큼 우둔하고 무지했다. 주님께서 떡을 챙겨오지 않은 자신들의 부주의함을 책망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주님께서 무리를 먹이신 기적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와 망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님 앞에서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한 바리새인이나, 참 떡인 주님과 함께하고 있으면서 수중에 떡 없으므로 근심하는 제자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뜻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주님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이방 여인의 순전한 믿음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체들의 이 모습, 혹시 지금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다. 데가볼리에서 귀먹고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치시는 방식과 비슷하게, 주님은 그를 따로 밖으로 데리고 가셔서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여 고치신다. 그런데 단번에 치유하지 않으시고 단계를 거쳐 치유가 일어난다. 이 사건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인 제자들이 서서히 깨닫게 될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지금은 제자들의 영적인 시력이 맹인과 다를 바 없다. 주님을 믿고 따를 만큼 영적인 눈이 열렸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온전히 깨달을 만큼 영안이 밝아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더 배워야 했고, 더 깨달아야 했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벳새다의 맹인을 두 단계로 치유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처럼 점점 희미하게나마 주님을 보게 될 것이고, 주님의 뜻을 알아가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후에 밝히 깨닫게 될 것이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제자들의 영안을 회복시킨 주님께서 나의 어두운 눈도 밝히 보게 하실 것을 바라본다.
    
    
    
*주님, 하나님 나라를 세상 나라처럼 채색하거나, 변색시키거나, 퇴색시키지 않겠습니다.
*주님, 제자들을 차근차근 변화로 이끄시는 주님의 인내하심이 도전됩니다. 나도 차근차근히 해보겠습니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영안이 열려 온전하게 보일 때까지 주님을 꼭 붙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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