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란? [삼하 17:15-29]
 – 2022년 10월 17일
– 2022년 10월 17일 –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후새의 전략은 아히도벨의 전략을 무력화 시켰다.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후새는 위급함을 감수하고 이 소식을 다윗에게 급히 전한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선택에 좌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마하나임으로 피난한 다윗에게 세 사람이 찾아와 필요들을 채워준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1.긴박한 후새와 동역자들(15-21절)
압살롬의 오판으로 다윗은 피난의 시간을 벌게 된다. 후새는 이 소식을 지체하지 않고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아릴고 빨리 사람을 보내서 “광야 나루터”에서 밤을 보내지 말고 강을 건너라고 전한다. 그렇지 않으면 몰살 당할 거라고 경고한다(15-16절).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과 사독의 아들 아하마아스는 성 밖의 로겔 샘터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윗왕에게 소식들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압살롬에게 밀고를 당한다.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난 줄 알고 기지를 발휘한 한 여인의 도움으로 우물에 숨어 위기를 모면한다(17-20절). 재빨리 다윗에게 달려가 후새의 소식을 전달하고 날이 샐 때까지 다윗을 따르는 모든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넜다(21-22절). 그리고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러서야 압살롬은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 땅에 진을 쳤다(24-25절).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윗을 위한 충성이 귀하고 귀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반역의 무리에 동참하기를 거절하고 충실하게 다윗에게 충성하는 이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다윗은 후일을 도모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은 헌신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합을 통해 단단히 세워져 간다.

*우리 공동체도 함께 마음을 모으고, 더욱 주님의 뜻에 가까이 서기 위해 서로 도우며 서 나가기를 기대한다.



2.마하나임의 귀인들, 반전의 은혜(27-29절)
한편 요단강을 건너 들어간 마하나임에서 암몬 족속의 도성 랍바에서 소비(나하스의 아들), 로데발에서 마길(암미엘의 아들), 로글림에서 바르실래(길르앗 사람)가 찾아왔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배신 당한 다윗과 그 무리들을 위해 “침대, 이부자리, 대야, 질그릇, 밀과 보리, 밀가루, 볶은 곡식, 콩과 팥과 볶은 씨(28절), 꿀과 버터, 양고기와 치즈(29절)를 가져와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들은, 그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굶주리고 지치고 목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꿀과 버터와 양고기와 치즈도 가져다가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었다.”(새번역_29절)

“그들이 광야에서 굶주리고 지치고 목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자발적으로 챙겨 온 것이다. 전쟁통에 고통 받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린 것이다.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의 애환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단지 먹을 것, 마실 것 뿐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용품도 챙겨왔다. 즉, 전쟁물자를 챙겨 온 것이다.

*온 이스라엘은 압살롬의 편에 서서 다윗을 배신 했지만, 이방인 암몬 족속은 다윗을 배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 도리어 충성한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도움을 역시, 서로 연대하여 힘을 합해 준비해 왔다.

*이스라엘은 다윗을 배신 했는데, 이방인은 충성한다! 이 기막힌 반전의 은혜가 다윗을 충분히 위로하고 격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다윗을 도왔을까? 먼저 소비는 암몬 족속의 나하스의 둘째 아들이다. 일전에 나하스의 장례때 다윗이 보낸 조문 사절단을 하눈이 조문단의 수염을 깍고 의복을 잘라 조롱하고 내쫓은 사건으로 인해 다윗이 공격하여 정복할 때 소비가 암몬의 왕이 되도록 돠와 주었다. 이 은혜를 기억하고 다윗이 어려운 때 직접 나와 영접한 것이다.

또한 마길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도왔던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울 왕가의 사람이기에 다윗의 대적일 수 있는데,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고 극진히 대우하고 돌보자, 다윗에게 위기가 닥치자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이같이 찾아 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머무는 마하나임 주변의 성인 로글림의 큰 부자였고 당시 나이로 약 80세의 지역 원로였다. 그는 다윗과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다윗의 통치 기간동안 훌륭하게 나라를 통치하여 자신이 사는 지역에 평안을 누리고 있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들이 챙겨서 가져온 물자들은 앞으로 압살롬과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될수 있는 군량미과 필수품들이었다. 이 물품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형식적으로 다윗을 영접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며 앞으로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물품들로 채워서 찾아왔다. 다윗의 군대가 충분히 싸울 수 있는 병참이 채워진 것이다.

*다윗의 피난길은 급히 떠나왔기에 모든 부분에서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소비와 마길, 바르실래가 찾아와 그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워 주었다. 그들의 방문은 다윗과 그의 군대들에게 충분한 재정비의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새 힘을 얻어 전쟁 준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다윗에게 은인들이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세 사람을 통해 필요를 채움 받은 듯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보내셨음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감람산을 맨발로 오르며 통곡하며 간구한 기도를 기억하고 계셨다. 시편 3편의 간구들에 응답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후새와 사독, 아비아달, 요나단, 아하마아스, 한 귀한 여인, 소비, 마길, 바르실래를 연이어 보내시며 다윗과 함께 하여 주심을 보여 주셨다. 다윗의 간구를 기억하셨고, 다윗의 필요를 채울 이들을 그저 황량한 마하나임의 광야에서 채움 받는 경험을 하게 하셨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시고, 아침마다 내리는 만나로 배를 채우며, 낮의 뜨거운 열기를 구름 기둥으로, 밤의 추운 한기를 불 기둥으로 도와 주신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을 채우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3.아히도벨…(23절)
본문에서 간략히 그의 최후를 기술하지만, 꼭 되짚어 봐야 할 인물이 아히도벨이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과적인지만, 다윗에게도 인정 받았던 모사인 그가 압살롬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이치다. 장남은 이미 죽었고 존재감 없는 둘째는 이미 논외가 되었다. 그리고 출중한 외모에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있는 셋째 압살롬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이치일 터이다.

그렇지만, 방법이 잘못됐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정당한 절차와 방법으로 지도자 경쟁에 서도록 도와 주었어야 했다. 그에게 왕에게 어울리는 성품과 인품을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압살롬의 모사로 서는 것을 선택했다. 왜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선 압살롬은 가까이서 보니 더 형편없는 지도자임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헤브론에서 봉기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예루살렘에서 다윗에 대한 그의 계략을 너무도 가볍게 무시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지도자로서 상호아을 읽고 판단하는 안목이 형편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후새라는 인물이 내놓은 자신이 보기에 너무도 형편없는 전략을 선택하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자신이 선택한 왕이 통치철학도 없고 정세를 바라보는 안목도 없으니 좌절했다.

압살롬이 자신의 계략을 외면하자 그도 미련없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여정서 절망스런 마음과 고뇌를 되새기며 갔는지, 집에 도착하여 집안 일을 정리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다. 사무엘서 저자는 아히도벨이 이렇게 한 이유를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라고 진단했다. 압살롬의 말로가 어떻게 될 지 그의 지혜로운 안목으로 뻔히 보인 것이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그 지혜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올바로 가르치는대 활용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이 가시질 않는다. 자신이 인정하고 추대한 압살롬의 한계를 보았을 때 그가 느꼈을 절망감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미련없는 책임을 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압살롬을 겪어보니 희망이 아니라 절망속에 사는 삶이라면 차라리 죽음이 낫다고 여긴 것이다.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더라도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지혜에 자신이 발목을 잡혀서 너무도 기본적인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또 생각했더라도 그 긍휼을 기댈 용기가 없었다.

*나의 선택과 결정이 때로 절망과 한숨에 휩싸이게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다시”라는 기회를 기꺼이 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주님께로 나아가면 언제든지 “다시”라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그러니 주님께 나아감을 스스로 포기하면 안 된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쉽사리 포기하지 말자.



나는?
-다윗이 피난길의 여정을 요단 동편의 마하나임으로 잡은 이유가 무엇일까? 묵상을 하다 왜 요단강을 건넜을까? 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천혜의 자연적인 방어선을 기댄다는 전략적인 이유일 수 있겠지만 왜 “요단 동편 마하나임”이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자리잡은 지리를 잘 이해하고 당시 정치적인 역학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일단 요단 서편,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헤브론이 위치한 유다 지파, 그리고 사울 왕가의 지파 베냐민, 가장 규모가 큰 지파이지만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에 밀려 지도자를 배출하고 있지 못하는 에브라임 등이 자리 잡은 유다 중앙 산지 지역은 압살롬의 반역세력의 근거지이기 때문에 어디로 피신 해도 다윗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요단 동편의 길르앗과 암몬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지역이었다. 실제로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기다렸다는 듯이 구호물품을 가지고 방문했다는 것도 이 지역의 다윗에 대한 정서가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마하나임이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상대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물론 요압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이곳에 머물러 있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흐름들을 주관하고 계셨기에 다윗의 마음에 요단 강을 건널 생각과, 마하나임에 거할 계획을 주신 것이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이 반란 가운데 함께 계심을 다윗에게 확신시켜 주셨다. 후새와 사독, 아비아달를 통해, 그들의 아들 요나단과 아하마아스, 한 귀한 여인의 목숨을 건 충성을 통해서 보여 주셨다. 또, 소비와 마길, 바르실래를 통한 위로로 확인시켜 주셨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주님, 다윗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들을 통해 내가 바라보아야 할 공동체를 봅니다. 서로의 안위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구체적으로 돕기를 “넘치도록 돕는” 하나님 나라 가치에 충성된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자기 지혜에 빠져 스스로 절망을 불러들이는 삶이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주님의 긍휼을 더 의지하는 겸손함으로 “다시”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는 결국 “충성과 헌신, 위로와 격려의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때로 배신하는 이들도 찾아오겠지만, 여전히 함께 있어주는 이와 같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는 증거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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