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은 아마사를 군지휘관으로 삼고 온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길르앗 땅에 진을 친다. 다윗은 마하나임에 도착한 후 면밀하게 자기와 함께 있는 백성들을 살펴서 군대 조직화 하였다. 모든 백성을 세 떼로 나누어 요압과 아비새(요압의 동생이자 스루야의 아들), 잇대(가드 사람) 세 사람에게 각각 맡겼다. 그리고 함께 전쟁터로 출정하겠다고 선언하였다(1-2절).
이 때 온 백성은 결코 함께 나가서는 안 된다고 하며 성에 머물며 백성들을 도와 줄 것을 요청한다. 당연한 이치다. 아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아가는 데 직접 전장에 서면 안 될 일이다. 다윗은 성문 곁에 서서 출정하는 모든 백성들을 환송한다.
그러면서 특별히 요압과 아비새, 그리고 잇대에게 부탁했다. “나를 생각해서라도, 저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주시오.” 왕이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달라고 모든 지휘관에게 부탁하는 말을, 온 백성이 다 들었다.(새번역_5절) 그렇게 진군한 다윗의 군대는 그 날에만 에브라임 숲속에서 이 만명이나 죽였다(7절). 이 전쟁에서 압살롬도 다윗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요압에 의해 결국 죽는다. 압살롬과 그의 군대는 허무하게 단 한번의 전투로 무너졌다. 왜 그랬을까?
1.압살롬 군대의 패전과 전사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다윗과 함께 한 군사는 약 4천명이었다고 한다. 7절에 따르면 압살롬의 군사들 중 에브라임 수풀에서 죽은 병사가 2만명이라고 했으니 최소 이 만명의 군사가 다윗의 4천 군사를 공격한 것이다. 그럼에도 압살롬의 군대는 다윗의 군대에게 완전히 패한다.
압살롬은 에브라임 수풀에서 자신의 군대가 패배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 노새를 타고 도망친다. 그러나 큰 상수리나무 가지 아래로 지날 때 자신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꼼짝도 못하고 매달리게 된다. 다윗의 부하들이 이를 확인하였고 결국 요압이 창으로 찌르고 주변에 있던 열 명의 부하들이 그를 죽였다. 첫 번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 것이다.
2.왜 패하고 전사 했을까?
삼하 17:14은 아히도벨이 제시한 좋은 계략을 물리치고 후새의 계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심판하시기 위함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한다.
혈통적으로 보면 이복형인 암논의 죽음 이후 차기 왕위 계승자는 압살롬이었다. 그렇다면 차분하게 다윗에게 왕이 해야 할 수업을 받았으면 될 일이었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다음 왕은 압살롬 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성급함”이 문제였다.
압살롬의 성급함은 놀라우리만치 치밀하게 반역을 준비하여 실행하고 아버지 다윗을 죽이기 위한 첫 번째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기 계획대로 성급하게 덤빈다면 결국 실패하고 만다.
또, 압살롬의 죽음은 그의 지나친 자만심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머리 숱이 많아 무거워지면, 해마다 연말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는데, 머리를 깎고 나서 그 머리카락을 달아 보면, 왕궁 저울로 이백 세겔이나 되었다.”(새번역_삼하 14:26) 사무엘서 저자는 압살롬의 외모에 대하여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백성들이 칭찬 하는 사람이었음을 강조했다.
특히나 압살롬의 머리털은 너무도 풍성하고 아름다워서 1년에 한 번만 머리털을 자르고 그 머리털의 무게를 왕의 저울로 달아서 자랑하였다고 까지 언급 하였다. 그런데 그토록 자랑하였던 그 머리털이 너무도 허망하게 그가 죽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자신의 자랑거리가 죽음거리가 되어 버렸다.
음… 일단 전쟁에 출정하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압살롬의 머리는 전장에 서는 전사의 머리는 결코 아닐 것이다. 준비가 되지 않는 장수가 전장에 나온 꼴이다. 이는 압살롬은 실전 경험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전장에서 길고 아름다운 머리털은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기에 이에 대한 대처가 분명했어야 했을 것인데…. 상황이 그랬었는지 모르지만, 압살롬의 준비는 미숙했다.
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서 모인 군사들도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 하다. 물자적인 준비는 매우 풍성했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군세는 최소 2만명이었지만, 이에 맞서 나오는 다윗의 군대는 4천명이었다는 것은 이들의 패배가 전략이나, 규모의 문제이기 보다는 정신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여기에 압살롬은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를 이미 만들어 놓았다. 그 기념비를 놓아 둔 곳을 “왕의 골짜기”로 불렀고, 기념비의 이름을 “압살롬의 비석”으로 명명 하였었다(18절). 반란이 성공하자 의기 양양하게 이를 알렸겠지만, 자신감 있게 출정한 첫 번째 전투에서 허망하게 죽고 만 것이다. 기념비에 걸맞는 삶은 살지 못한 것이다.
이로 보건데 압살롬이라는 인물은 허영심이 가득했고 자기 과시의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외모는 특별하고 허세는 가득했으나, 다윗보다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윗을 능가하는 통치철학이나 지도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훗날 압살롬의 난이 평정되고 다시 평화가 찾아 깃들었을 때 사람들이 랍살롬의 비석(기념비)를 바라보면서 어떤 말을 했을까? 왕의 골짜기에 있는 그 비석은 근처를 지난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헛된 것을 추구하다, 허영과 과시로 산 삶의 끝이 자신이 자랑하였던 머리채가 자신을 죽게 만든 어처구니 없는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라고 기억하게 할 뿐이었다.
*한편으로 이런 인물이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의 왕위를 갈망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자기 능력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자리를 탐하다 결국 수치스럽게 죽게 될 것을 그리 왕권을 집착하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해보지도 못하고 죽은 한심한 사람으로 기억할 뿐이었다. 혹시 나도 이런 무모함에 취하지 않기를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밖의 것을 추구하며 허여외게 살기 보다 나에게 주신 오늘 이라는 삶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누리며 감사하며 사는 복된 삶이기를 바래본다.
나는?
-사무엘서는 유독 특출한 아버지 아래 실패한 아들들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다 전장에서 죽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사사였지만 아버지의 길을 따르기 보다 자기 부귀영화에 더 마음을 쏟아 뇌물을 받고 재판하기 일쑤였다. 다윗의 아들 암논은 근친강간하여 결국 이복동생에게 죽임을 당했고,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국이고 왕이 되려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전장에서 도망치다 머리채가 상수리 나무 가지에 얽혀서 수치스러운 모양새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아직 이름을 내세울만한 업적도 없는 상태에서 이미 기념비까지 만들어 놓은 어처구니 없는 행동도 불사했다.
-이 과정에서 다윗은 엘리 제사장의 이야기, 사무엘의 아들들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자신의 시대에서 자신의 아들들이 그들의 아들들과 다를 바 없는 추락하는 삶을 살게 되도록 무관심, 무반응하였다.
-나는 어떨까? 성경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을 잘 배우고 이를 삶에서 따르고 있을까? 하나님께서 역사의 기록을 통해 이미 보여주신 교훈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하면 그 교훈이 이 시대에는 나를 교훈할 것이다.
-역사 속의 그처럼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교훈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이 모든 과정을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을 복기해야 할 것이다. 왕의 범죄가 불러온 백성들의 혼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다윗이 느꼈을 두려움과 후회를 공감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죄에 농락 당하지 않는다.
**요압의 불순종(9-17절)
-다윗이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요압은 이를 외면한다. 본문의 말씀에 따르면 다윗의 부탁과는 달리 압살롬을 죽이는 자에게 은 열개와 띠 하나(11절)를 주었을것이라는 말에 따르면 현상금까지 걸고 죽이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윗의 왕권에 대하여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왕권에 대한 도전이다. 그럼에도 요압은 압살롬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단창을 들어 그의 심장을 꿰뚫는다. 요압은 압살롬을 그술에서 데려왔고, 다윗의 마음을 풀어 그가 압살롬을 만나도록 주선했던 인물이다. 그만큼 압살롬의 반역은 요압에게도 큰 배신감이 들게 했던 사건이었을 것이다.
-설사 그렇다치더라도 왕의 부탁을 외면하며 철저하게 압살롬에게 응징하는 요압의 충성은 참된 충성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목적한 바를 이루는 행동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요압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내가 하나님께 이와 같은 태도로 살고 있지 않는지를 되돌아 보게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간곡하게 부탁하신 것을 얼마나 충실하게 지키려고 했는지의 도전이 그것이다.
*주님, 허영이 삶의 만족과 승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허망을 채우는 것을 압살롬을 통해 봅니다. 나의 자랑거리가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음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선한 뜻을 따라 오늘 하루도 꿋꿋하게 순종하며 나가겠습니다. 나의 입술만 앞서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요압의 충성이 진실한 것이 아님을 압니다. 혹시 나도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떠들면서 나의 논리, 기준, 입장을 위해 행동하지는 않을까요? 저를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편 111:1-10]
이 시는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찬양시이다. 구조적으로 72개의 단어로 구성된 이 시의 특징은 할렐루야 이후 마지막 시행까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첫 글자가 시작되는 알파벳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