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자식 농사가 제일 어렵다…. [삼하 18:19-33]
 – 2022년 10월 19일
– 2022년 10월 19일 –

압살롬이 요압과 그의 무기든 청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소식을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재빨리 다윗왕에게 전하려고 한다. 요압은 이를 만류하며 구스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보낸다. 하지만 아히마아스는 또 다시 자신이 소식을 전하게 해달라고 한사코 청하고 요압은 마지못해 승낙한다.

아히마아스는 구스 사람을 앞질러 다윗에게 이르러 승리의 소식을 전하지만, 압살롬의 안부를 묻는 다윗에게 차마 그의 죽음을 알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내 도착한 구스 사람이 전한 소식에 다윗은 통곡한다.



1.치밀한 요압
요압은 전쟁에서 이기고 압살롬은 사망한 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 구스 사람을 택하여 보낸다. 왜 그랬을까?

압살롬의 반역의 시기에 다윗에게 주로 보내는 전령은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였다. 때문에 당연하게도 아히마아스는 자신이 이 전쟁의 승리 소식과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요압은 되도록 아히마아스를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먼저 요압은 다윗이 전에 사울왕의 죽음을 전한 아말렉 소년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아히마아스에게 다윗이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요압은 자신이 압살롬을 죽인 것에 대한 노여움을 사는 것을 염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구스 사람이 전령의 역할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달음질을 잘하고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음을 안 요압은 그가 이 소식을 전하므로 다윗에게 받지 않아도 될 대우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2.아히마아스의 회피 혹은 배려?
어찌 되었든지 아히마아스는 다윗에게 먼저 출발한 구스 사람을 추월하여 먼저 그를 만난다. 다윗이 승패 보식 보다 아들 압살롬에 대한 소식을 더 관심을 가지고 묻자 이에 대한 보고는 회피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출정할 때 다윗이 요압과 아비새, 잇대에게 부탁한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말을 그도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탁은 모든 백성들이 들었다고 했다(5절). 아히마아스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요압에게 간청하여 자신이 소식을 전하고자 했고, 구스 사람이 출발했어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간청하여 달려왔다. 왜 그랬을까? 문맥의 흐름은 아히마아스가 다윗이 압살롬의 신변을 지극히 염려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최대한 충격이 덜하도록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요압이 임명하여 보낸 구스 사람의 보고 내용은 반란을 일으킨 수장에 대한 가감 없는 감정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는 보고이기 보다 대적하여 싸운 원수를 섬멸했다는 기쁨의 보고였다. 압살롬의 죽음과 이에 따른 다윗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는다. “왕이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물었다. “그 어린 압살롬이 평안하더냐?” 에티오피아 사람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의 원수들을 비롯하여, 임금님께 반역한 자들이 모조리 그 젊은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새번역_32절)

어쩌면 아히마아스는 다윗의 심정을 누구보다 공감한 청년이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전쟁에서의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왕의 치하를 먼저 받으려는 평범한 청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무엘서 저자는 왜 아히마아스의 일화를 이토록 자세하게 기술했을까?

그것은 19절에서 요압에게 자신을 전령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때 말한 내용에 힌트가 있다. “그 때에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요압에게 말하였다. “제가 임금님에게로 달려가서, 주님께서 임금님을 원수에게서 구원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새번역_19절) 그리고 다윗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아히마아스가 왕에게 가까이 이르러서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며, 얼굴이 땅에 닿도록 왕에게 절을 하며 아뢰었다. “높으신 임금님께 반역한 자들을 없애 버리시고, 임금님께 승리를 안겨 주신, 임금님의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새번역_28절)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을 나와 광야로 나아갈 때 사울 집안 “시므이”는 그를 저주했다. 하나님께서 이제야 심판하신 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서는 시므이 개인만의 정서가 아닐 수 있었다. 압살롬에게 이스라엘의 마음이 돌아서고, 다윗 왕을 제거하는 전쟁에 소집된 온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보았을 때 많은 백성들이 이와 같은 정서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에브라임 수풀에서의 승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다윗의 편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다윗에게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승리라는 것이다. 아히마아스는 이와같은 벅찬 감격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3.통곡하는 다윗(33절)
한편 다윗이 기다리는 소식은 전쟁의 승패보다 아들 압살롬의 안위였다. 아무리 승리하였더라도 아들의 신변에 이상이 있으면 안 되는 마음으로 노심초사하고 성문에서 전령을 기다렸다.치열하게 진행된 전장의 소식을 기다리며 군사들의 안위보다 압살롬의 안위를 더욱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마음으로는 이해가 충분히 된다. 하지만 왕으로서 이런 자세는 쉽게 수긍이 안 된다. 그래서 요압이 슬퍼하는 다윗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면보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 그의 고통과 애통이 충분히 공감이 된다.

“농사중에 제일 어려운 농사가 자식 농사”이다. 지금 다윗은 말년에 자식 농사가 완전 망친 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이 아니라 벌써 세 번째이다. 암논이 다말을 범했을 때, 이로 인해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 했을 때, 그리고 지금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다 결국 비참하게 죽은 상호아 앞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사무엘서 저자는 자식의 반란을 마주한 다윗의 반응보다 압살롬이 죽은 소식에 반응하는 다윗의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곰곰히 되짚어 보면 사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성경 인물들의 자녀들의 실패가 다윗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기드온의 자녀들, 엘리 제사장의 자녀들, 사무엘 선지자의 자녀들, 그리고 다윗의 자녀들… 하나같이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 그들이 권력을 쥐고, 부귀를 누렸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한참 벗어난 삶을 살다가 비참한 결말에 이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는 이미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예시들이 제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엘리, 사무엘의 자식 농사 실패를 보며 배웠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그들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했다.

무엇보다 그의 삶 속에서 자식으로 인해 통곡하고 분노한 일이 끊이지 않았는데, 밧세바와의 첫 아이부터, 암논, 다말의 일을 겪으면서 오히려 각성하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도리 하지 않고 거의 방임 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급기야 압살롬의 비참한 죽음 앞에 통곡하고 만다.



나는?
-나의 삶의 말년에 다윗처럼 자녀들로 인해 통곡하는 마무리가 되지 않도록 은혜를 구해야 겠다. 자녀들로 인해 하나님께 통곡과 슬픔 고통을 올려 드리는 인생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도록 자녀들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하겠다.

-자식 마음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니 도우심을 더욱 구하고 의지할 수 밖에…

-적어도 노년에 자녀들을 바라보며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는 상상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믿고 자녀들을 하나님께 의탁해야지… 성경 속 인물들의 실패를 내가 그대로 답습하지 않도록 해야지…

-아무리 구너력과 명예, 부함을 다 가졌더라도 자녀의 마음이 이보다 귀하고 귀한 것을 늘 잊지 말아야지… 믿음으로 양육하는 자녀보다 소중한 것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지….



*주님, 전쟁 결과 보고 이야기보다 다윗의 통곡이 더 마음에 걸립니다. 혹시 저의 노년이 이렇게 되지 않기를 기대해 봅니다. 자식 농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주저하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주님, 저는 통곡의 노년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의 노년이 되고 싶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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