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와 재산이 많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진다. 대조되는 두 인물인 어린아이와 부자 청년이 등장하여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지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같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반면 어린아이에 이어 등장하는 부자는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계명을 잘 지킨 그는 정작 많은 재물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어려워한다.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들은 사회적으로 노예 같은 낮은 지위에 있었고 아무 권한이 없는 미미한 존재였다. 고대의 어린아이들은 또한 많은 질병에 노출되어, 가난한 지역의 경우 반 이상이 12세를 넘겨 살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주님이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낀 이유는 그들의 약함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낭만적인 시각으로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해석하면 곤란하겠다.
1.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13~16절)
사람들이 주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사람들이 주님의 안수를 통해 치유 받았음을 알았기에 아마도 부모들이 자녀들을 그런 기대로 데리고 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제자들이 접근을 제지하며 꾸짖었다(13절). 제자들의 이런 태도는 당시 문화를 고려하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미 어린아이들을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상태의 사람들로 제시하였었다(9:36~37). 아쉽게도 주님께서 수차례에 걸쳐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대해 가르치셨으나 제자들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제자들은 주님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며 자기들의 권리(기득권)를 지키려는 행동을 지속한다.
이 모습을 지켜보신 주님은 분노하신다(14-15절). 어린아이들이 아무 힘과 지위가 없다고 해서 주님께 나오는 것이 막히는 현실은 주님을 분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나님 나라는 힘도 지위도 없는 사람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 새로운 질서의 나라이다. 주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선언하신다. 매우 혁명적인 선언이셨다. 제자들은 당시 세상의 문화와 상식을 거슬러 사람의 가치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는 전환이 필요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의 예로 보여주신 이유는 당시 어린아이들이 생존하기 위해 부모에게 기대었던 “철저한 의존성”때문이었다. 즉, 제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주님께서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 이유인 “만져 주심”을 바라는 마음대로 그들을 축복해 주신다.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는 모습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님은 세상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고 축복하심으로 실제적인 예를 통해 가르침을 주신다. 어린아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2.재물많은 사람과 하나님 나라(17~22절)
한 사람이 달려와 주님께 무릎을 꿇고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대뜸 주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상당한 존경심이 깃든 행동과 표현이다. 그의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였다. 그의 질문 중에 “무엇을 하여야”라는 표현을 통해 그의 질문 속에는 모든 신앙 행위는 장래 얻을 영생의 소망에 근거한다는 것과 행위를 통해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신념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이 이를 모르실리 없다. 먼저 “선한”이라는 표현을 꼬집으신다.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데 자신에 선한 분이라고 고백한 것에 까닭을 되물으신다(18절).
이렇게 되물으신 이유가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님을 누구라도 안다. 주님은 그 사람이 생각하고 표현한 ‘선’이 과연 선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선’이냐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은 주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름으로서 자신의 선한 행위를 선한 주님에게서 인정받기 원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가 자기 자신의 행위를 볼 수 있도록 이끄신다.
주님은 그에게 선함의 표본인 십계명 후반부 전체를 되새겨 주신다(19절). 그 선한 계명들을 다 지켰느냐는 수사적인 질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지켰다고 자신만만하게 고백한다(20절). 그런데 그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그를 “사랑하사(측은히 여기사)” 친근하게 말씀해 주신다. 선한 계명을 순종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으나 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다. 그 사람은 영생을 물었으므로 ‘부족한 한 가지’는 영생을 위해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된다.
주님은 그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신다(21절). 그러고 나서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은 십계명에 담긴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구현하는 이웃 사랑이다. 계명 순종과 이웃 사랑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율법은 이웃 사랑으로 완성이 된다. 주님은 그 사람을 영생의 참된 길로 초청하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부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주님을 따르지 않고 떠나간다. 그가 가진 재물이 너무 많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22절). 그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내심 상상의 저울로 자신이 가진 재물과 하늘의 보화를 달아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재물이 더 무거워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재물에 대하여 부요했으나 하나님에 대하여는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재물을 마음에 두고는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다.
나는?
-제자들은 어린아이를 주님께 데려오려는 자들을 꾸짖고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도록 했던 배타성과 특권 의식이 사역의 모든 상황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아이들의 조기 사망률이 높았던 당시 상황에서 아이들이 주님께 축복을 받아 이른 죽음을 피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보기에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별 차이가 없이 어린 아이들은 메시아의 나라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제자들은 로마를 무너뜨리고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을 몰아내는데 힘을 보태거나 후견인 역할을 할 이들만 주님 앞에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저 걸리적거리는 존재일 뿐이었고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어린아이들에게 더 가깝다고 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을 필요로 하는 자들의 나라이다. 주님이 필요해서 나아오는 자들에게 열린 나라이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주님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구하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다. 어떤 면에서는 제자들은 공생애 막바지에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을 이용하는 자들이 되어 있었다. 참다운 제자는 주님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그저 사랑하고 따르는 자가 제자다.
-구약의 사고는 재물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여기에 나름대로 십계명을 잘 지켰다. 마가는 주님도 그를 ‘사랑’하셨다고 기록했다. 그의 진심을 아신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영생의 길을 알려 주셨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은 그에게 깊은 고민을 안겼다. 즉, 그에게 영생이란 지금보다 더 많은 재물을 가지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근심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재물 없는 영생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보다 주님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실제이다.
-어린아이들을 환영하고 축복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좋다. 또한 어린아이들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며 가로막는 제자들의 행동에 분노하신다. 주님은 제자들이 외면한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 해주셨다. 어린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까운 자들이기 때문이고 이 어린아이들처럼 주님에 대한 전적 신뢰와 의존의 태도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이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노력이나 자격을 갖추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어린아이처럼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인 줄 알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나도 어린아이처럼 그것 자체로가 좋아서 받아들이는 마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겠다.
-재물이 많은 한 사람을 통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시는 것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영생을 갈구하는 간절함이 있었고 주님께서 그 길을 아신다는 확신도 있었다. 율법이 말하는 영생의 길에 성실하게 순종 해온 신실함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부유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가 아니라 도리어 영생을 상속받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주님의 진단은 완곡하게 거부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철저한 율법 준수로 형성된 자긍심이 도리어 자기 부인을 가로 막은 것이다.
-영생은 선행이 아니라 주님을 따름으로 받을 수 있다. 내가 가진 어떤 집착이 주님을 따르는 길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 확연하게 깨달아 진다면 과연 나는 재물 많은 사람의 결정에 아쉬움을 표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의 근심을 십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22절)” 떠나간 그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주님이 부자에게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을 따르라는 명령은 그를 사랑하시기에 내리신 것이었다. 사랑하시기에 주님보다, 말씀보다, 그리고 영생보다 더 사랑하는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소유를 선택하고 순종을 거절했다.
*어린아이에게는 가깝지만, 부자에게는 멀기만 한 하나님 나라…. 나에게는? 주님의 제자되기 보다 재물의 노예가 되기를 선택한 그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주님, 어린아이처럼 가까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내가 가진 소유의 노예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된 것을 감사하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