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말씀하신 대로 단순하게 순종하는 전쟁 [수 6:8-27]
 – 2025년 01월 08일
– 2025년 01월 08일 –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을 묵묵히 따른다.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서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여리고 성 주위를 매일 한 바퀴씩 돈다. 일곱째 날에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돌고 큰 소리로 외칠 때 성벽이 무너져 내리게 된다. 라합의 가족을 제외하고 여리고 성에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의 궤가 성을 한 번 돌았다(11절)”라는 표현이다. 이는 전쟁의 주체가 백성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법궤와 제사장들이 앞장서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진행되는 침묵의 행진은 군사적 행동이라기보다 오히려 거룩한 예식임을 드러낸다.
    
여리고는 주전 구천 년부터 인간이 거주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도성 중 하나다. 또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해수면 아래 250m). 여호수아 시대 당시 여리고 성의 길이는 225m, 폭 80m, 성벽은 이중 구조로 높이 15m 정도로 주변 성들과 비교하여 중간 규모의 성이었다(참고로 예루살렘 성이 당시 길이 400m, 폭 100m 정도의 큰 성이었다). 결코 공략하기 쉬운 성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성안의 주민들은 삼천 명 내외로 추정하고, 다만 성 밖의 둘레에도 넓은 거주지가 발견되어 여리고 성과 그 땅의 총인구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론된다.
    
    
    
1. 여리고 성 주변을 행진하다(8~14절)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은 백성은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간다. 지침대로 특별한 대열을 갖추고 여리고 성을 향해 행진한다(8~9절). 군사들은 행진 중에 침묵을 지켜야 한다. 오히려 이런 기괴한 행진이 여리고 백성에게는 엄청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을지 모른다. 무려 60만의 군대가 자신들의 성을 돌면서 행진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저 나팔 소리와 먼지바람을 일으키는 발소리만 무성할 뿐 침묵을 유지한 채 성 주위를 도는 위용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맨 앞 선봉에는 요단 동편을 미리 받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의 군사들이 섰고 그 뒤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 그 뒤를 군사들이 뒤따랐다. 이스라엘 백성은 침묵 속에서 행진하는데, 이 침묵은 6일 동안, 일곱째 날에 여호수아가 함성을 외치라는 명령을 내릴 때까지 유지되었다(10절).
    
    
    
2. 무너진 여리고 성과 진멸 전쟁(15~21절)
일곱째 날 새벽, 행동 지침대로 일곱 바퀴를 돌았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아주 길게 불 때,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함성을 지르라고 지시한다. 백성의 함성과 함께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성벽을 타고 군사들이 여리고 성안으로 올라갔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정복은 진멸 전쟁임을 주지시켰다. 진멸(헤렘)은 “온전히 바친 것”을 의미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금속류는 여호와의 곳간으로 들여 하나님께 바치고 나머지는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한다. 만약 헤렘으로 바쳐진 물건에 누군가 손을 댄다면 이는 여호와의 전쟁 수칙을 어긴 것으로 이스라엘 진영이 오히려 ‘바치는 것’, 곧 헤렘으로 바쳐진 바가 되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성에 있는 모든 것을 헤렘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의 약속을 주지시키면서 라합과 그녀의 집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살려주라고 명령한다(17절).
    
    
    
3. 구원받은 라합과 가족들(22~25절)
라합의 결단으로 그와 가족이 함께 구원받는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라합으로 인해 함께한 모든 가족이 자동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들 각자는 적어도 라합의 행위를 알고 동조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라합이 그녀의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자기 집으로 소집했을 것이다. 가족들은 라합에게 동의하여 여호와를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에 합류하기로 결단했을 것이다. 이는 이미 그들 모두가 라합의 집에 모여 구출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신앙과 구원은 궁극적으로 언제나 각자의 결단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라합의 가족들은 구출되어 이스라엘 “진영 밖”에 임시로 거하게 된다(23절).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헤렘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구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라합의 위대한 결단은 여호수아서가 쓰인 “오늘까지” 칭송되고 있다. 놀랍게도 기생이었던 라합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한 뒤 살몬과 결혼하여 다윗의 가문에 들어갔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이 되었다.
    
    
    
4. 여리고 성에 내려진 저주(26~27절)
헤렘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유효하다. 따라서 헤렘의 심판을 당한 대상을 누군가 복원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어떠한 성이라도 헤렘 심판으로 무너진 성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재건축이 금지된다(신 13:16). 따라서 누군가 여리고 성을 재건하면 그 사람은 저주받아 기초를 쌓을 때(건축이 시작될 때) 맏아들을, 성문을 달 때(건축이 끝날 때) 막내아들을 잃을 것이다(26절). 이는 무너진 성읍을 다시 쌓아 강력한 요새를 만들지 말라는 의미이며, 사람이 그 성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수 18:21; 삿 3:13; 삼하 10:5). 훗날에 이 예언은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벽을 재건축할 때 그의 맏아들 아비람과 막내아들 스굽을 잃는다(왕상 16:34).
    
    
    
나는?
-강력한 여리고를 상대하는 이스라엘의 전략으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것은 참으로 비상식적이었다. 위협이 아니라 조롱을 살 만한 무모한 전략이었다. 이스라엘은 6일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다만 제사장의 나팔 소리만 들으며 행진하다가 7일째에 여호수아가 소리치라고 할 때 크게 소리 지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단순하게 순종한다.
    
-요단강 도하 기적을 맛본 그들에게 요단강 도하작전이나 여리고 성 정복 작전이나 비상식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비상식적인 것을 보란 듯이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을 맛본 이스라엘에게 또 한 번 비상적인 명령은 당연히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일 뿐이었다. 인간의 잘난 전략과 전술은 그 순간만큼은 무의미했다. 이미 하나님의 군대로 하나님의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인간의 생각은 필요치 않다. 하나님의 명령에만 온전히 귀 기울이고 순종하며 나아가면 된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준으로 어이없는 명령을 내리신다고 하여도, 단순하게 순종하며 나아가리라.
    
-이스라엘의 순종은 문자 그대로, 말씀 그대로의 순종이었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 논리적인 근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최선이다. 그때가 언제든 최적이다. 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다. 단순하게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취를 맛본다. 확실한 순종이 확실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역시 하나님의 전쟁이다.
    
-순종은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사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대형을 일찍 갖추고 여리고 성을 한 바퀴씩 돌았다(8~14절).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 어떤 다른 마음들이 생겨날 법도 한데, 이스라엘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명령에 따라 묵묵히 순종한다. 혹시 한두 번의 순종으로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너무 쉽게 불평하거나 원망을 쏟아내지 않는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한 땀 한 땀, 차근차근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완전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일곱째 날 일곱 바퀴를 돌고, 일곱 제사장이 일곱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큰 소리를 지르자 여리고 성이 무너진다(15~16절). 이처럼 완전을 뜻하는 숫자 “일곱”이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은 여리고 성 함락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순종은 지도자 한두 사람의 몫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의 몫임을 깨닫는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순종하는 것에 진심으로, 진실하게, 전심을 다 해 나가기를 소망해 본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에서 취할 전리품은 없다. 온전하게 다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은금과 동철 기구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곳간에 쌓아야 한다. 첫 번째 전투의 승리에서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앞으로 점령하게 될 모든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은 여리고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한 후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해야 한다. 그러나 정탐꾼들을 도운 라합과 그의 가족은 안전하게 구원해야 한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구원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는 진멸 당한다.
    
-여리고 성을 정복한 후 단 하나도 전리품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온전히 여호와께 바치라”라는 명령 때문이다. 여리고는 저주의 도시다. 하나님의 심판인 헤렘(진멸)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다. 일생 광야에서 유목민의 삶을 산 이스라엘의 눈에 비친 도시문화의 풍부함은 매우 큰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제껏 보지 못한 삶의 모습은 충분히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나안에서의 번영은 전쟁을 통해 약탈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얻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여리고 성 정복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확실하게 성취되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맺은 약속도 확실하게 지켜졌다.
 
-저항하는 자를 멸하시고 투항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끝까지 저항하며 굳게 문을 단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그 성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진멸하게 하셨지만, 라합과 그녀의 가족은 보호하셨다. 아무리 큰 진노와 환란 가운데서도 라합과 그의 가족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투항한 이들은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늘 투항하며 살아가는 새해이기를 소망한다.
    
-사탄은 우리의 일상에서 순종하는 걸음을 의미 없게 여기도록 부추긴다. 하지만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의미 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순종이 영적 승리의 요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침묵해야 할 때와 소리쳐야 할 때조차도 주께서 일러 주신 대로 잘 지킬 때, 그렇게 내가 순종의 싸움에서 무너지지 않을 때 대적은 무너진다.
    
-앞으로의 가나안 전쟁은 순종의 전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싸움은 외부와의 싸움이 아니라 내면에서, 공동체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의 영적 싸움도 마찬가지 아닐까? 외부의 거센 도전보다 내부의 균열이 더 무서운 법이다. 하나님 말씀의 법에 따라, 더욱 일치된 단순한 순종이 공동체를 단단하게 세워 나갈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가나안의 위용을 믿을 것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것인지의 싸움이 가나안 전쟁이다. 우리 공동체는 이 싸움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여러 문제보다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신뢰하며 순종하는 걸음 걸어가기를 소망한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단순하게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의 유혹을 말씀하여 주시는 말씀 따라 잘 다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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