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두 정탐꾼과 라합 이야기 [수 2:1-24]
 – 2025년 01월 04일
– 2025년 01월 04일 –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가나안 땅과 여리고를 “은밀히” 정탐하게 한다. 하지만 이내 탄로 난다. 정탐꾼들은 기생 라합의 집으로 숨어든다. 여리고의 왕은 이 사실을 알고 신하들을 보내 잡으려고 하지만, 라합이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넘긴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자신과 집을 보호해 줄 것을 강권하여 약속을 받아낸다. 정탐꾼들이 요단을 건너 무사히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온다.
    
여리고(예리호)는 ‘향기 나는 지역’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 주변에 대추야자, 장미 정원들, 향나무로 둘러싸인 성읍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인류의 오래된 도성 중의 하나다.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주변 성읍 중에서 항상 여리고가 먼저 등장하고 거론된다는 점에서, 또 지리적으로 가나안 초입에 위치하여 군사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성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리고 성은 이중 성벽의 요새였다. 이 시기의 팔레스타인 성들의 공통 양식인데 이중 성벽 사이에 돌과 흙을 채우고 그곳에 방어 무기를 설치하여 요새화했다. 그리고 이곳에 변방으로 내몰린 사회적 소외층들이 집을 지어 살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라합과 그의 가족은 매우 빈궁했고, 라합은 몸을 팔아 생계를 연명했었을 것이다.
    
    
    
1. 두 정탐꾼 파송(1절)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두 명의 정탐꾼을 파견한다. 그들의 사명은 ‘가나안 땅과 여리고를 엿보는 것’이다. 가나안과 여리고를 함께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여리고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짐작하게 한다. 역사적으로 여리고는 주전 8,000년경 세워진 성읍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요새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하는 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다.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유숙한 곳은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집이었다. 기생의 집에 들어간 이유는 창녀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기에 그 땅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고 낯선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기에 의심받지 않고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당시 라합은 당시 사회적 소외 계층 신분으로 멸시받고 소외된 변방의 인물이었고, 집도 성읍 외곽인 성벽 주변이었다. 이런 점은 라합의 집에서 일어난 일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정탐꾼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그녀가 여리고에 우호적인 태도를 갖지 않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동조하게 된다.
    
    
    
2. 두 정탐꾼을 숨긴 라합(3~14절)
그런데 정탐꾼들이 어떤 계기인지 모르지만 발각된다(2절). ‘어떤 사람’은 생소하기만 한 외지인들을 바라보고 이미 인근까지 진격해 와서 자신들을 위협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들이 잠입해 왔다면 정탐 외에 다른 목적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왕에게 “두 명”이라고 하지 않고 “몇”이라고 한 것을 보아 정탐꾼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모르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여리고 성은 규모가 작은 성이었다. 주민도 최대 삼 천명 정도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를 보면 외지인들은 쉽게 눈에 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리고 왕은 즉시 라합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수색한다. 그런데 흐름을 보면 정탐꾼과 라합은 이미 모종의 협력관계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옥상의 삼대(stalks of flax) 속에 숨기고 거짓말을 한다. 군인들은 ‘해가 지기 전에 급히 떠났다’라는 라합의 거짓말에 쉽게 수긍한다. 군인들은 라합의 말에 자신들이 한발 늦었다며 초조해했을 것이고 서둘러 나루터까지 쫓아가서 수색한다. 그리고 성문을 닫아 혹시 성안에 아직 머물고 있을지도 모르는 정탐꾼들의 퇴로를 봉쇄한다.
    
여리고의 군인들을 따돌린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긴 옥상으로 올라가 상황을 알리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다(8~11절).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협조한 이유는 그녀의 고백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녀와 여리고 주민들, 그리고 온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여호와가 그동안 행하셨던 일을 이미 모두 전해 듣고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출애굽과 홍해가 갈라진 기적, 그리고 요단 동편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의 잇단 패배와 전멸은 그들에게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들은 마음이 녹아내리고 정신적 공황에 빠졌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상천 하지의 하나님, 곧 하늘 위와 땅 아래를 모두 다스리는 진정한 신이라고 고백한다.
    
이에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를 깨닫고 새로운 삶을 위해 결단한 것이다. 고대 시대는 각자의 국가 신을 숭배하는 시대였기에 다른 국가 신으로의 개종은 곧 국적을 바꾸는 정치적인 망명이기도 했다. 여리고 관점에서 라합은 저주받을 배신자였겠지만, 그녀는 더 나은 삶을 선택했고 참된 신이 누군지를 깨달은 뒤 피할 수 없는 심판으로부터 생명을 얻을 기회를 부여잡았다. 이런 측면에서는 매우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라합은 자신과 더불어 모든 가족과 친족들의 생명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한다. 자신이 그들에게 선(헤세드)을 베풀었으니, 그들도 자신에게 선(헤세드)을 베풀어야 함을 강조한다(12절).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서약(맹세)과 더불어 증표를 요구한다. “증표(오트 에메트)”는 문자적으로 “진실의 표식”을 뜻한다. 라합의 요구는 그들의 서약(맹세)이 참되다는 표시를 달라는 것이다. 두 정탐꾼은 라합의 요구대로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라합과 그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주겠다고 보장한다(12~14절).
    
    
    
3. 두 정탐꾼의 탈출과 라합과의 약속(15~21절)
라합은 지체없이 두 정탐꾼을 탈출시킨다. 성벽 위에(바깥쪽) 있던 그녀의 집 창문에서 성벽으로 곧바로 줄을 달아 탈출시킨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수색하는 사람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사흘간 숨어 지내라고 충고한다(15~16절). 그만큼 여리고 군인들의 수색은 철저하고 끈질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탐꾼들은 라합이 요구했던 보증의 징표로 “붉은 줄”을 제시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요청한다. 온 가족과 친족이 함께 구출되도록 그녀의 집에 모여 있을 것을 당부한 것이다. 이 당부대로 라합의 가족과 가까운 친족들은 그녀의 집에 모임으로써 모두 구원을 받는다. 정탐꾼들이 요구한 “붉은 줄”은 이스라엘 군인들을 그냥 지나치게 함으로써 라합의 모든 가족과 친족의 생명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또, 19절은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강조함으로써 “붉은색”이 줄의 색깔로 선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정탐꾼들은 붉은 줄로 표식 된 그 집의 안전을 보장한다. 만일 라합의 가족과 친족 중 누구라도 그 집 밖으로 나온다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반면, 아무라도 이스라엘 군인이 붉은 줄의 표식을 무시하고 라합의 집으로 들어가 그들을 헤친다면, 그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렇게 해서 라합의 집은 파도가 창일한 홍수 속 구원의 방주와 같고 유월절 재앙 가운데 피가 발라진 안전한 집과 같다. 만일 노아 가족 중 누군가 방주를 타지 않는다면, 피가 발라진 문설주 밖으로 나간다면 재앙은 피할 수 없다. 이처럼 라합의 집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구원에서 배제된다. 이를 통해 구원은 결국 무임승차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과 결단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이어서 정탐꾼들은 라합 또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한다(20절). 만일 라합이 여리고에 정보를 건네주어 배신한다면, 그 책임은 라합 자신이 져야 하며 그 서약은 파기되고 자신들은 무고할 것이라고 말한다. 라합은 다시 한번 그들 간의 맹세에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며 그들을 보낸 뒤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아 놓는다. 이렇게 해서 정탐꾼들을 살렸던 창문을 통해 라합과 그의 가족들이 생명을 얻는다.
    
    
    
4. 두 정탐꾼의 귀환과 보고(22~24절)
두 정탐꾼은 라합의 조언대로 산으로 올라가 사흘 동안 숨어 지냈다. ‘사흘’은 동태를 살피기에, 충분한 기간을 의미한다. 여리고 군인들은 “모든 길을” 다니면서 정탐꾼들을 색출하려 애썼다. 이는 군인들이 그들의 예상 탈출로를 모두 봉쇄하고 인근 지역을 수색했다는 의미다. 산에 잠복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고 주로 길목을 차단하여 수색한 듯 보인다.
    
정탐꾼들은 이스라엘 진영으로 무사히 복귀한 뒤, 여호수아에게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보고한다. 아마도 여리고에 대한 기본적인 군사적 정보와 라합의 손에 의한 탈출 등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의미 있었던 정탐 보고는 여리고와 그 땅의 모든 사람이 강 건너에 세력을 구축한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있음을 알린 것이다.
    
    
    
나는?
-정탐꾼들은 들어가자마자 발각되어 아무것도 스스로 알아내지 못한다. 다만 자신을 숨겨준 라합을 통해서 여리고 성의 상태를 파악할 뿐이다. 라합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나라를 배반한다. 라합을 통한 정탐꾼들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자신들의 전략과 실력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준다.
    
-라합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광야에서 아모리의 두 왕 시혼과 옥은 평화롭게 그 지역을 통과하게 하기를 거부하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감행하다 전멸했지만, 라합은 출애굽의 소식과 아모리 왕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듣고 하늘과 땅에 여호와 같은 신이 없음을 인정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난공불락의 성이었고 촘촘한 보안 체계를 갖춘 여리고 사람들도 같이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았지만, 이스라엘에게 항복하는 편을 선택하지 않았다. 정탐꾼들은 스스로 정탐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하나님께 항복한 여인 라합을 통해 여리고 백성들의 두려움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되었다. 가나안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의 용맹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드러내실 권능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끄는 나라를 여리고가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누구보다 먼저 이스라엘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 승리의 날에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보호해 달라고 선대 요청을 한다. 하나님께서 선(헤세드)을 행하여 주심으로 구원을 얻고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께 복종한 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여 그들 역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선대 해주심을 받게 해준다.
    
-라합은 성벽 위에서 줄을 내려 정탐꾼들이 성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그 후에 산에서 3일간 숨어 있다가 여리고 군사들이 추격을 중단할 때쯤에 돌아가도록 구체적으로 살길을 알려준다. 라합의 용기와 지혜로움이 돋보인다.
    
-라합이 선대한 대로 라합의 가족 역시 이스라엘에게 선대를 받을 것이다. 그녀가 달아 내린 줄이 그와 가족에게는 생명줄이 될 것이다. 정탐꾼들이 제시한 구원의 방식을 신뢰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여리고 공격 계획을 누설하면 라합과 그 가족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정탐꾼들에게는 책임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정탐꾼들이 라합의 지시대로 행하여 무사히 이스라엘 진영으로 귀환한다. 그리고 라합에게 들은 것과 자신들이 본 여리고에 대해 보고한다.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의 보고 가운데 가나안과 여리고의 위용과 강력함에 주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 정탐꾼을, 라합을 통해 구원하시고,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에 여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담대하게 “여호와께서 우리 손에 그 온 땅을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았다”라고 선언한다. 이미 승리를 약속받은 사람의 발언이었다. 이것이 지도자의 안목과 자격 아니겠는가! 나에게도 이런 안목과 자격이 잘 녹아들어 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의 죄악이 가득 찰 때 그 땅을 심판하시고 그의 후손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창 15:16). 가나안 땅은 그들이 행한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 것이다. 이렇듯 여리고 성은 죄악이 가득한 성읍이었지만 그곳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라합이 있었다. 죄악이 가득한 땅에 거하는 비천하고 부정한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녀를 구원하신다. 그리고 라합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자기 가족뿐 아니라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18절)”을 구원하기에 이른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롬 5:20)”라는 바울의 선언이 과연 맞다.
    
*그런데 라합의 가족은 무조건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죄가 더할수록 은혜가 넘친다는 말은 죄에 물든 삶을 지속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할 것이란 뜻이 아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다(롬 6:1~2)”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죄악의 한가운데 살면서 여전히 구원받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가나안의 불의한 삶을 청산하지 못하고 은혜의 집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19절)”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 또 신앙고백은 구체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라합이 정탐꾼들과 한 맹세를 누설하지 않아야 서로 간의 계약이 유효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법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만 구원이 보장된다. 죄의 습관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집으로 향하라(18절).
    
*정탐꾼들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성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고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을 소상히 보고했다(23절). 그런데 곰곰이 읽어보면 그들은 객관적인 보고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보고의 차원을 넘어 믿음의 고백으로 나아간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24절)” 두 정탐꾼의 고백은 이전 출애굽 1세대 정탐꾼들의 고백과 분명한 대조를 보인다. 이전 정탐꾼들은 그 땅에 거하는 주민들의 장대한 신장을 보고 주눅이 들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민 13:33)”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출애굽 2세대 정탐꾼들은 그 땅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께 주목했다.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의 은혜를 누린다. 과거의 잘못된 삶을 정리하고 새롭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보이는 현상에만 주목하지 말고, 현상 이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영적인 시선을 고정해 보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선명하게 보인다.
    
    
    
*주님, 라합의 신앙고백이 기이합니다. 평생 이방인의 삶을 산 그녀의 귀에 들린 하나님을 반응하여 두려워하고 기꺼이 선택하는 그 용기가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 거리로 가면” 직면할 하나님의 심판을 잊지 않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녹아내리며 두려워하는 여리고를 보며 정탐 보고가 아닌 신앙고백으로 가나안 전쟁을 준비하는 정탐꾼의 모습을 기억하겠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확신 안에 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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