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성전 논쟁 1_권위 : 무슨 권세?, 누가 준 권위인가? [막 11:27-12:12]
 – 2024년 03월 15일
– 2024년 03월 15일 –
성전 심판을 선언하신 주님께서 다시 성전에 나타나자 유대 지도자들의 도전이 시작된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주님은 비유로 그들이 처한 상황을 알려 주시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부터 본문까지 매우 중요한 주제들을 드러내셨다. 예루살렘 입성에서는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셨고, 무화과나무 저주와 성전 청결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채 오랫동안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와 겉만 화려한 성전유대교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은 “권위(권세)” 주제를 다룬다. 종교지도자들은 전날 성전 뜰을 엎으신 것을 무슨 권위로 행한 것이냐고 도발하면서 논쟁이 시작된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신적 기원을 갖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부여하지 않은 권위를 가지고 예수가 소동을 벌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예수는 반역자이다. 이에 주님께서는 포도원 비유를 통해 그들의 권위의 허상을 들춰내신다. 메시아로서 성전을 심판하신 주님은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권위에 대한 도전을 받으셨다. 주님은 세례 요한의 권위에 대한 질문으로 그들의 질문을 물리치고, 이사야 5:1~7의 포도원의 노래에서 끌어낸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악한 소작인이 되어 포도원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명을 듣지 않고 결국 그 아들까지 죽이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며 더욱 분노한다. 
 
 
 
1.성전에서의 첫 번째 논쟁 : 권위(11:27~33)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대표적 구성원이다. 당시 장로는 비 제사장 가문 중에서(평민) 매우 명망 있는 가문의 대표들을 가리킨다. 이들 모두가 주님 앞에 나아왔다. 그만큼 전날의 성전 청결사건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또 앞서 이들은 주님을 죽일 것을 서로 모의했기 때문에 죽일 명분을 찾기 위해서라도 주님을 찾아온 것이다.  
 
지도자들은 두 번 연속 질문을 이어간다(28절). 성전에서 행동과 가르침이 “무슨 권세 즉, “어떤 종류의 권세로서” 행한 것인지 물은 것이다. 또, 그 권세를 누가 준 것인지도 묻는다. 이 두 질문은 사실상 하나의 질문으로 봐도 무방하다. 지도자들의 질문은 예수에게 “누가”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권위를 주었는가의 문제로 압축된다. 지도자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이런 일들(타우타)”이다. 성전 청결을 통한 심판 행위와 성전의 본질적 기능에 대한 가르침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전 청결 행동뿐 아니라 이어진 가르침도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성전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바라본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의 교훈과 이적에 놀라며 따랐지만, 백성들과 동일하게 보았음에도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었다(4:11~12). 
 
주님은 지도자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던지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대답하셨다. 이렇게 질문하신 이유는 종교지도자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요한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에도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요한이 베푼 세례는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1:4)”였는데, 성전이 아닌 한 개인이 죄를 용서해주는 세례를 주는 것은 성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한이 워낙 인기가 있어서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아시고 역으로 질문하신 것이다. 31~32절은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라고 마가는 증언한다. 주님은 종교지도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미 알고 계셨다. 종교지도자들이 의논했다는 것은(31절)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주님의 질문에 당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모든 백성이 요한을 진실로 선지자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2절). 이는 요한의 말이 참되다는 뜻이 되는데, 요한이 전한 말은 자기 뒤에 올 예수가 자기 보다 더 능력이 많은 자라고 예언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인정했으므로 그의 예언은 옳으며, 주님은 요한 보다 뛰어난 분, 즉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말이 된다. 
 
종교지도자들은 “유구무언”할 수 밖에 없었다. 33절에서 “모르겠다”고 말한 것은 말 그대로 요한의 권위의 출처를 모르겠다는 것이 아니다. 요한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들의 불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2.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12:1~12)
종교지도자들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주님은 대신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신다. 포도원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가 선택한 이스라엘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는 은유다. 1절에서 포도원을 일구며,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을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었다는 묘사는 이사야 5장 1~7절에 나오는 포도원의 노래와 매우 비슷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고 좋은 포도 대신 들포도를 맺은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종’을 세 번 파견 하신다. 그리고 각각 모욕을 당하는 정도가 점점 격화된다. “잡아다가 심히 때리다(3절),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다(4절), 죽이다(5절)”로 표현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반역이 시간이 갈수록 커졌음을 보여 준다. 반역의 절정은 주인의 아들을 살해한 것이다. 종을 계속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계속 선지자들을 보내 그들을 깨우치시려 하신 것을 가리킨다. 특히 “그 종의 머리를 때렸다”는 표현은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마가는 지속적으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운명이 동일하고, 이를 따르는 제자들의 운명이 상응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요한의 죽음은 주님의 죽음을 전망하게하고, 제자들 역시 그 길을 가게 될 것을 예견하게 한다. 비유에서 주인의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주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1:11), 산에서 변화하실 때(9:7)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었다. 주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말씀하신 것은 비유이기는 하지만 본문이 처음이다. 
 
농부들은 탐욕이 지나쳤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소작인이 주인의 포도원을 차지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인간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다 우매하여져서 악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드러낸다. 포도원을 소작하는 소작농은 다른 사람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많이 소유하려는 인가, 결국 자멸에 이르는 인간을 표상한다. 
 
마가는 이 비유의 결론으로 시편 118:22~23을 인용한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구절은 초대교회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 부활과 승천하심을 이야기할 때 자주 논한 말씀이다. 특히 “버리다(아포도키마조)”는 단어는 마가복음에서 단 두 곳에 사용된 단어인데, 8:31의 수난 예고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버림받을 것을 예언하실 때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건축자들”이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인 악한 포도원 농부들처럼 주님을 배척하고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주님의 의해(11절)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뜻한다. 이런 의미로 행 4:11과 벧전 2:7에서도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셨음을 설명한다. 
 
 
 
나는?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법보다 자신들의 법을 더 높이 세우며 하나님의 권세 위에 군림하려 했다(27~28절). 진리와 비진리, 참과 거짓을 권세의 문제로 해결하려는 그들이 권세(권력)에 중독된 이들이다. 나는 혹시 어떠할까? 나이, 신분, 권위, 학력, 직책, 성별 등으로 진리를 판단하고 있지 않는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세례 요한의 권위는 인정하면서 그가 권위를 인정한 예수에 대하여는 시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하였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종교적 기득권이었다. 
 
 
-심판은 결국 은혜를 거부한 결과이다. 포도원 주인의 인내의 기다림을 끝내 거절한 악한 농부들은 심판을 당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은 크고 놀라운 은혜이며 동시에 최종적인 기회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를 놀치면 안 된다.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의 비유를 듣고서 자신들을 빗댄 말씀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돌이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비유에 나오는 그 반역적인 농부임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회개할 기회는 무한정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통해 깨달을 때 즉시로 회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많은 종들을 보내 백성들의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셨으나 이스라엘은 거절하였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서 이 백성에게 기회를 주셨다. 끝까지 거절한 자들은 진멸하시겠지만, 악한 농부에게 버림받은 아들은 존귀하게 회복하실 것이다.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향한 이야기임을 알면서도 거절하는 이들은 심판을 자초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악한 포도원 농부들은 세 가지 면에서 악하다. 그것은 무책임, 폭력, 탐욕이다. 반면 포도원 주인은 성실하다. 주인은 온갖 정성을 다해 포도원과 주변 환경을 조성했다. 당연히 많은 수확을 기대했다. 또, 주인은 인내심이 강하였다. 악한 농부들에게 종을 네 차례나 보낸다. 마지막으로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냈다. 비유가 아니라면 주인의 이런 행동은 이상스럽고 바보 같은 것이다. 주인은 몇 차례 보낸 종들이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죽었음에도 자기 아들만큼은 존중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기대를 가졌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오래 참으신다(출 34:6). 그러나 한없이 참으시지는 않으신다. 열매를 맺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아들마저 거부한 자들에게 임할 것은 하나님의 분노와 진멸하는 응징뿐이다. 
 
 
 
*주님, 지도자들의 굳은 마음과 태도가 마음에 걸립니다. 나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진정한 권위자를 십자가에 매단 그들의 악한 영향력을 경계하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