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수를 죽인 자들 앞에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다! [행 4:1-12]
 – 2024년 05월 07일
– 2024년 05월 07일 –
사도들이 당한 첫 번째 박해이다. 나면서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친 후 솔로몬의 행각에서 복음을 전한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구속된다. 이튿날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고 두 제자는 공회원 앞에 서서 그들의 신문을 받게 된다.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는지를 심문받는다. 이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공회원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나사렛 예수 외에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며 복음을 선포한다. 그들의 경고와 위협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당시 유대의 종교법은 초범의 경우 무지에 의한 것일 수 있어서 처벌하기보다는 경고와 함께 풀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범죄를 다시 범했을 때는 상습범으로 보고 처벌을 내렸다. 이런 맥락에서 4장의 베드로와 요한의 산헤드린 공회에 선 기록(4:1~22)과 이어지는 사도들의 구속 기록(5:17~42)은 경고에 이은 처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 베드로와 요한이 붙잡히다(1~4절)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1절)’이 왔다. ‘성전 맡은 자’로 번역된 단어는 성전의 경비대장이다. 제사장 서열로 보면 대제사장 다음으로 높은 자이다. 사두개인은 대부분 성전과 밀접하게 연관된 자들이었는데, 제사장이나 성전 맡은 자 중 상당수가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싫어했다(2절). 유대 종파 중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믿으면서 거기에 부활 사상이 없다고 보아 부활을 부정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부유한 귀족 계층이었고 로마와 정치적, 경제적으로 결탁하여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도들이 가르치는 메시아사상이 자신들과 로마의 관계를 흔들 수 있다고 여기며 경계했다. 이에 더 이상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한다. 5:17 이하에서도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둔다. “싫어하여(디아포누메노이)”로 번역된 단어는 “불쾌해하다, 화가 나다.” 등의 의미가 있다. 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들이 이렇게 불쾌감을 가지게 된 이유는 먼저, 백성을 가르칠 공식적인 자격이 없는 사도들의 가르치는 행위는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라는 가르침은 사두개인들이 부인하는 일반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한 후에 ‘날이 저물면 회의를 소집하여 재판하지 않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이튿날까지 그들을 가두어 둔다(3절). 사도들은 제구시(오후 3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말씀을 전했기에, 말씀을 전하고 몇 시간이 지나 체포당한 것이다. 한편 ‘누가’는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았는데,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고 말한다(4절). 이는 여성과 아이들까지 합산하면 훨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성장세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2.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5~12절)
산헤드린 공회는 모세를 도운 70인의 장로들의 모임에서 유래한다(민 11:16). 주후 1세기의 공회는 고위층 사두개인(제사장)과 바리새파 율법 학자들(서기관)과 백성의 장로들로 구성된 70인과 의장을 맡은 대제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주요 업무는 안식일이나 특별한 절기를 제외하고 거의 매일 모여서 “판결(재판)”하는 일이었다.
 
베드로와 요한을 재판하는 일에는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그리고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했다(6절). 안나스는 주후 6~15년에 대제사장직을 수행했고, 가야바는 당시 현직 대제사장으로서 주후 18~36년에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였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였고, 그와 함께 예수님을 심문하고 죄를 뒤집어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다. 요한은 안나스의 아들로서 주후 36~37년에 대제사장으로 역임했다. 당대의 고위급 공회원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그만큼 베드로와 요한의 사안은 매우 중요했다는 의미이다.
 
먼저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묻는다(7절). “이 일”은 성전 미문의 병자를 고쳐준 일과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한 것을 가리킨다. 공회의 관심사는 일어난 기적과 선포된 설교의 내용이 아니었다. 일어난 기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베드로가 한 설교의 내용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파멸하려는 것 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일을 하느냐?”라는 질문은 항상 중요했다.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물어본 것이다. 그들의 내심은 사도들에게 예수와 동일한 유죄 판결을 내리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을 것이다.
 
공회는 예수님의 생애 동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눅 20:1~2)”라고 심문한 적이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예수님이 받으셨던 그 심문을 생각했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들이 주님의 일을 바르게 계승하고 있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이 직접 이런 상황을 미리 알려 주셨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눅 12:11~12; 벧전 3:15).” 지금, 이 말씀이 실현되고 있었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여 제사장들의 질문에 대답한다(8~12절). 4~12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대답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다섯 개의 설교 중 세 번째이다(2:14~39; 3:12~26; 4:4~12; 5:29~32; 10:34~43). 베드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들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말한다. 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단순히 육적인 질병만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전인적인 치유, 즉 온전한 구원을 받은 것임을 분명히 한다(9절). 또,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10절)”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 대답을 할 때 베드로는 시편 118:22를 인용하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었던 예수가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선포한다(11절). 이는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버린 돌이었으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아나게 하셔서 모퉁이의 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모퉁이의 머릿돌은 벽과 벽을 연결해 주었으며, 건물을 지을 때 기준으로 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수님은 머릿돌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탁월한 우월성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선포했다(12절). 공회 앞에 선 것 자체가 일반인이라면 큰 두려운 자체일 텐데, 그것도 공회원으로부터 상당한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담대하게 선포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주님의 가르침, 부활, 성령 강림으로 확고하게 세워진 것이었다. 이후 어떤 압력과 위협에도 철회되지 않았다.
 
나는?
-예수의 부활은 그를 사형시킨 유대 지도자들의 선고와 형 집행을 무효화하고 불법화하는 하나님의 행동이셨다. 이런 점에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도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죽음의 위협이나 투옥뿐이었다. 그런다고 예수가 살아나신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고, 우리의 소망을 분명하게 해준다. 따라서 복음이 증거될 때 핍박이 따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과 제자들이 구해야 할 것은 박해 없는 순탄한 사역이 아니라 박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순전한 사역을 감당하며 나아가는 힘일 것이다. 그런데 이 힘은 이미 성령이 오심으로 받았다.
 
-복음을 증거할 때 세상의 반발과 핍박은 자연스레 찾아온다.
 
 
-베드로의 담대함이 놀랍다. 종교 정치 당국자들이 누구의 권세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는지를 묻자,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낫게 되었다고 담대하게 증언한다. 그렇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확신이 이 세상에서 쩔쩔매지 않고 담대하게 주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한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던 베드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하는 일로 마주하게 될 핍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맷집이 나에게도 있을까? 내 안의 성령께서 당연히 그렇게 하도록 이끄실 줄 믿는다.
 
 
-사도들은 붙잡혀서 갇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복음은 갇히지 않았다. 사도들이 핍박받을수록 복음은 더욱 능력을 발휘하여 믿는 사람의 수를 더하게 하였다. 세상 나라와 권력은 결코 믿음으로 예수의 통치를 인정하는 자들을 이길 수 없다.
 
-교회가 진정 강할 때는 십자가의 길을 따를 때이다. 세상의 힘과 비슷한 힘을 흉내 내고 따를 때가 아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구원의 길,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길,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이 되는 길은 없다.
 
-핍박을 받을수록 복음은 더욱 열매를 맺는다. 사도들은 가두었을지 모르나 그들이 선포한 말씀은 가두지 못했다. 복음의 말씀은 마치 화살과 같아서 일단 마음에 꽂히면 말씀의 능력은 힘을 발한다.
 
-예수님이 붙잡히시던 그날 밤의 베드로는 온 간데없다. 두려워하며 멀찍이 붙잡혀 가시던 주님을 따르던 베드로가 아니다. 소녀의 말 한마디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날 밤의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죽인 선고와 집행을 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굴하지 않고 그들이 죽인 예수의 부활을 선포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 아니겠나! 세상 속에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그 능력이 성령의 능력, 복음의 능력이다! 나도 이 능력 안에 있음을 믿는다.
 
 
*대제사장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이 선포되는 뜨거운 현장에 제 발로 찾아왔다(1절). 스스로 찾아왔으나 그 은혜를 사모해서가 아니었다. 제거하였다고 생각한 나사렛 예수 일당의 결집에 매우 놀란 것이다. 그들은 오순절에 일어난 교회 탄생 사건을 마뜩잖게 보았다. 더 나아가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소요 사태로 인식하였다. 백성의 평정과 안전을 유지할 책임이 있는 성전 지도자들로서 개입할 사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2~3절).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종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였다.
 
*기득권을 경험한 사람은 새로운 질서가 불편하고 낯선 가치에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자신이 맛본 권력의 단맛과 그동안 누린 권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새로운 질서와 가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맞닥뜨린 첫 시련은 보수주의 성전 세력이었습니다. 태동하자마자 보수주의의 파상공세 앞에 섰던 교회가 이천 년을 지나면서 보수화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가르침 대신 전통과 권력화된 질서를 숭배하고 있다. 간간이 초대교회 정신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없지 않지만 중과부적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화석화된 교권에 진리를 담을 수 없고 빛을 가둘 수는 없다.
 
*한국교회와 사회는 왜곡되고 편향된 보수주의가 숨통을 옥죄고 있는듯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늘 말씀에서 희망을 찾는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역설의 진리와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본다. 세상은 하찮게 여기고 버릴지라도, 예수 복음이 결국 세상을 살린다. 이 기막힌 역설의 진리가 오늘의 나를 살렸고, 내일의 후손들도 살릴 것이다.
 
 
 
*주님, 태산과 같은 두려움의 압박이 몰려와도 복음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맞서도록 성령의 은혜 안에 거하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선포한 대로 이루어지다 [왕하 7:3-20]

하나님은 나병 환자 넷을 이용하여 사마리아를 전쟁과 기근에서 구하신다. 이로써 엘리사를 통해 예고하신 말씀을 성취하신다. 아람의 군사들은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큰 군대의 소리를 듣고 도망갔다. 이에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