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성령 충만한 공동체에 일어나는 일 [행 4:32-5:11]
 – 2024년 05월 09일
– 2024년 05월 09일 –
베드로와 요한이 석방된 후 예루살렘 교회는 더욱 성령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내부적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유무상통하며 자발적인 재정적 헌신으로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이때 사탄은 무서운 죄를 침투시켜 이 거룩한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의 시도를 단호하게 차단하시며 교회를 보호하신다.
    
첫 번째 두 사도의 구속 및 석방 이야기(4:1~31)와 사도들의 2차 구속 및 석방 이야기(행 5:12~42)사이에 ‘누가’는 하나의 독립된 단락으로 예루살렘 교회 안의 아름다운 형제애를 소개한다. 바나바의 긍정적인 예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부정적인 예를 각각 하나씩 소개한다. 하지만 ‘누가’는 후자의 이야기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사도행전 독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1.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애(4:32~35)
이 단락은 바나바 이야기와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도입하기 위한 배경으로 기술한다. 예루살렘의 교회 공동체는 스스로 자원하여 모든 물건을 공동 소유처럼 사용했음을 언급한다. 이런 자발적인 반응은 어떤 가요에 의한 것이 아닌 서로를 향한 형제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34~35절은 땅이나 집을 가진 자들이 그것을 팔아 교회에 헌금했고, 교회는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언급한다.
    
‘누가’는 이 행위를 서로 대조적인 두 가지 예를 들어 36~37절과 5:1~11에서 소개한다. 32절(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_ 새번역)은 지속해서 일어난 일반적인 모습을 표현했고, 34~35절(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_ 새번역)은 특별한 상황을 위한 ‘가진 자’들의 자발적인 헌금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사도들에게 막중한 영적 책임감을 느끼게 하여 사도들이 “큰 능력”으로 전하고, “큰 은혜”가 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33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33절)”를 직역하면 “큰 은혜가 모든 이들 위에 있었다”라는 뜻이다. 성령 충만함과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밀접하다. 사리사욕이 충만하면 성령 충만은 사라진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도 공동체를 떠난다. 34절의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라는 기록은 신명기 15:4~5의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성취되었음을 암시한다.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완성(마 22:37~40)되기에 율법의 정신이 구현된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2. 형제애의 긍정적인 사례_바나바의 관대함(36~37절)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자발적으로 도운 대표적인 예로 바나바의 선행이 먼저 소개된다. 바나바는 이후 사도행전에서 성품과 신앙을 겸비한 훌륭한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지만, 사도들이 동명의 성도들과 구별하기 위해 “위로의 아들”이라는 “바나바”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다. “위로의 아들”은 “위로와 격려를 주는 자”라는 의미인데, 이후 사도행전의 기록들에서 그의 행적(행 9:27; 11:23; 15:37)을 보면 왜 이런 별칭이 주어졌는지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에게서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새번역_36~37절).”
    
    
    
3. 형제애의 부정적인 사례_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5장 1~11절)
‘누가’는 바나바의 긍정적인 모습은 단 두절로 소개했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부정적인 예는 무려 열한 절을 할애한다. 이런 차이에 담긴 의도가 무엇일까? 5장 1절의 원문은 개역 개정의 번역에서 생략된 접속사 “데(그러나)”로 시작한다. 이것은 바나바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대조하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음을 시사한다.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도 바나바처럼 그들의 “소유(크테마_재산, 소유, 토지 재산)”를 처분하지만 그 값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만 사도들에게 가져온다(1~2절).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의 마음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두 부부가 은밀하게 한 일을 알게 하셨다(3~4절).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한 행동은 성령을 속인 것이고(3절),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다(4절). 4절의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라고 번역한 부분은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새번역은 “또 팔린 뒤에도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소?”라고 번역했다. 이는 “판 후에도 네 돈이 아니었더냐?”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재산을 매각한 돈을 교회에 다 드리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일부를 하나님 앞에서 전부라고 속인 것에 그들의 죄가 있다.” 그들은 헌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것이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아나니아가 “엎드러져 혼이 떠나” 즉사한다(5절). 장사를 지낸 지 ‘세 시간쯤 지나’ 삽비라가 들어온다(7절). 그런데 삽비라는 베드로를 통해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만 놓쳐버리고 만다(8절). 부부의 행동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지체 없는 선언이 이어진다. “왜 그대들 내외는 서로 공모해서 주님의 영을 시험하려고 하였소? 보시오. 그대의 남편을 묻은 사람들의 발이 막 문에 다다랐으니, 그들이 또 그대를 메고 나갈 것이오(새번역_9절).” 이렇게 부부는 성령을 속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음에 이른다.
    
    
이 기록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많이 갖는다. ‘누가’는 왜 이 기록을 수록했을까? 2절과 3절의 동사 “감추다”에 힌트가 있다. 감추매(2절) 와 감추었느냐(3절)로 각각 번역된 동사 “노스피조”는 신구약을 통틀어 단 네 번 사용되었다. 본문에 두 번 사용되었고 구약에서는 유일하게 여호수아 7:1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을 가져다가 숨긴 아간의 범죄를 기술할 때 사용되었다.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와 아간의 범죄 사이에 공통점을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막 새롭게 시작된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무서운 죄가 침투하려 하였는데, 하나님은 그 죄를 단호하게 처단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성령의 강한 역사로 시작된 교회 공동체가 죄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용납하실 수 없었다. 그 결과 온 교회가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11절).
    
죄와 성령 충만은 반비례한다.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에 무서운 죄가 침투하는 것을 “단호하게” 막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한다.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어 나가는 것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을 하나님이 단호하게 처단하신 특별한 사례이다. 헌금을 속이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해당하며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에 이 사건의 교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성령 충만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데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이 있다.
    
    
    
나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는 그 안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나눔의 역사와 그것을 방해하는 사탄의 도전에 맞서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회복하는지를 보여준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공동체는 그 안에 누구든지 재물의 위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혀 사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난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한마음과 한뜻으로 서로 물건을 내어놓고 함께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4:32~37), 사람들의 고상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충만히 임재하신 결과이다.
    
-성령의 역사로 인해 공동체 모두가 재물의 집착에서 벗어나 저마다 만족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큰 권능으로 부활의 능력이 선포되는 곳에 큰 은혜가 임하여 저마다 제 지갑을 열어젖힐 수 있었던 것처럼, 나의 소유와 재물에 대한 마음은 오직 성령의 은혜와 권능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의 복된 일에 기꺼이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성령께서 권능으로 임하여 내가 지닌 재물과 소유를 성령의 역사에 어떻게 참여시킬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한마음과 한뜻의 공동체였다.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형제의 필요를 알면 즉시 채워주었다. 부활의 예수를 말로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증거했다. 소유가 없으면 죽을 것이라는 당시 세상의 거짓 신화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꼭 그럴 필요가 있을 때는 자기 모든 소유를 다 포기해서라도 공동체를 부양했다. 부활하여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공급자가 되실 것을 믿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위로의 아들” (혹은 권위자) 이라는 별명을 지닌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4:36). 이 일은 공동체의 많은 사람을 격려하여 재물을 내어놓는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오늘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나의 순종 하나에서 공동체 전체의 동참이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구브로 출신의 레위 지파 사람 요셉은 자기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갖다 놓았다. 그는 격려와 위로에 능하여 “바나바”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훗날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셨다. 또한 바울과 함께 선교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르셨다. 맘몬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는 세상에서 재물에 초연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바나바와 같은 “위로자”들이 공동체 안에 세워지도록 간절히 바래본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은 바나바의 헌신(4:36~37)에 자극받아 행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공동체 안에서 깊은 존경을 받는 바나바를 부러워해서 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주님과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의 걸음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흉내 내는 것인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속임과 감춤을 위해 한마음이 된 부부의 비극을 보게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함께 모의하여 밭을 팔고 돈 일부를 숨겼다. 그리고 전체를 다 바친 것처럼 꾸민다. 그 일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즉시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전리품을 숨겨 첫 범죄를 범한 아간을 즉시 죽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초대교회의 첫 범죄를 단호하게 정죄하여 공동체의 순결성과 사도의 권위를 지켜주셨다.
    
-초대교회는 서로 통용하고 나누는데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데 한마음이 되었다. 아…. 괴로운 일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속임이나 조롱을 당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갈 6:7).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아 땅값 일부를 바치면서 전부를 바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자, 이를 하나님의 영을 속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도전한 심각한 범죄로 여기신다. 결국 그들은 죄를 들추어내는 베드로 앞에서 하나님의 맹렬한 심판을 받아 곧장 죽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거룩한 공동체와 내 삶 안에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지배를 받는 영역이 혹시 없는지 살피고 살필 일이다.
    
    
-성령 충만한 공동체는 공동체를 위해 한마음과 한뜻으로 서로를 부양한다. 그러나 죄의 유혹에 분별력을 경험하고, 범죄에는 단호하다. 진리의 말씀 능력은 삶의 태도를 하나님의 뜻에 정확하게 맞추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이어라~
    
    
    
*주님, 바나바와 같은 공동체의 위로자가 되겠습니다. 그의 성품을 사모합니다. 공동체를 그처럼 섬기겠습니다.
*주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이 기가 찹니다. 그런데 혹시 저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선포한 대로 이루어지다 [왕하 7:3-20]

하나님은 나병 환자 넷을 이용하여 사마리아를 전쟁과 기근에서 구하신다. 이로써 엘리사를 통해 예고하신 말씀을 성취하신다. 아람의 군사들은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큰 군대의 소리를 듣고 도망갔다. 이에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