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 2024년 05월 10일
– 2024년 05월 10일 –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잡아 옥에 가둔다. 그러나 다시 투옥된 사도들은 밤중에 주의 사자의 도움으로 다시 기적적으로 풀려나게 되고 주의 사자의 지시대로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한다. 
 
이 사건은 직전에 일어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와 모든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공포심에 휩싸인 동시에 이어진 일이었다. 예루살렘에 전례 없던 영적 부흥이 넘쳐났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사도들의 지속적인 기적 행사와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은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심과 경각심을 한껏 부추긴다. 누가는 사도들의 2차 투옥과 기적적인 석방 이야기를 위트와 유머를 적절하게 섞어 유쾌하게 풀어내며 독자들에게 흥미로움과 통쾌함을 선사한다. 
 
 
 
1.사도들의 표적과 기사(12~16절)
이 단락은 초대교회의 상황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행 2:42~47; 4:32~35과 마찬가지로 다음 단락과 연결하기 위한 역할이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정리한 것이기도 하다(12~14절). 무엇보다 왜 사두개인들이 시기로 가득하게 되었고, 사도들을 잡아들였는지를 설명해 준다.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서 집회를 갖었음을 알 수 있다(12b절). 예루살렘의 여러 여건상 공개적이며 대규모 인원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은 솔로몬의 행각이 유일했을 것이다. 12절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운명을 보고 두려워 한 유대인들이 꽤 있었음을 “나머지”라는 표현을 통해 드러낸다(13a절).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도 백성들은 성도들을 칭찬하고 있는 현상을 기록한다. 이로 인해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지속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게 된다(13b~14절). 
 
15~16절은 특히 베드로의 치유 사역을 도드라지게 기록한다.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림자가 자신들의 몸에 덮여서라도 치유 받기를 기대할 정도였다. 그래서 예루살렘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왔다. 이는 여전히 1차 투옥 이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서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공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가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순종을 강조하면서도 항상 그 모든 행적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이 있음을 잊지 않는다. 12절의 기록은 ‘사도들이 민간에 많은 표적과 기사를 일으켰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이 주도하신 역사의 결과였다. 
 
이 기록이 얼마나 큰 격려와 응원이 되는지 모른다. 지금도 동일하게 더온누리공동체의 삶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 속에서 불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좁을 길을 걷는 여정에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언제나 함께 한다. 
 
 
 
2.사도들의 2차 투옥과 기적적인 탈옥(17~26절)
누가는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이라는 산헤드린 공회의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사두개인의 당파”를 추가하므로서 공회 안에서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에 대해 드러냈다. 실제로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사두개인들이었다. 자연스레 산헤드린 공회 내에서 수적으로도 우세했다. 그런데 그들이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17절)” 사도들을 투옥시키고 만다. “시기(젤로스)”로 번역된 단어는 “질투 혹은 시기”를 나타내기도 하고 “종교적인 열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에 그들이 시기가 가득하여 라고 번역할 수 있고 그들의 종교적 열정이 발동하여 로도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전후 문맥은 “시기가 가득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를 직역하면 “시기로 채워져서”이다. 여기서 ‘채우다(핌플레미)’로 번역된 단어는 성령 충만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행 2:4; 3:10; 4:8, 31; 9:17; 13:9; 19:29). 이렇게 사도행전에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도 등장하지만, 반대로 시기가 충만한 사람들도 등장한다(행 5:17; 13:45). 
 
19절의 ‘주의 사자’는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누가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역사하신 기적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두 사도는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는 지시를 받는다(20절). 이 짧은 구절에 동사가 각각 “가서, 서서, 말하라”가 사용된다. 산헤드린 공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끈기와 담대함으로 전하라는 의미이겠다. 
 
옥에서 풀려나면 멀리 도망가서 숨으려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일 것이다. 하지만 사도들은 하나님이 보낸 주의 사자를 보내 명령하신대로 순종한다(21, 26절). 어떤 상황에서든지 순종하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의 증거이다. 
 
이튿날 새벽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고 밤새 가두어 두었던 사도들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진다(21b절). 그런데 사도들이 감옥에 없다는 보고에 당황과 여러 의심이 공회를 가득채운다(24절). 그러던중에 느닷없이 옥에 가두었던 사도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친다는 보고가 들어온다(25절). 간수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옥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있었고 외부침입의 흔적도 없는데, 밖에서 열고 들어가 보니 한 사람도 없었다.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산해드린 공회와 성전 경비대장, 경비대원들이 서로 우왕좌왕하는 모습과 이런 상황 속에서도 태연하게 대처하는 사도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조된다. 
 
 
 
나는?
-사도들이 하나님께 간구한대로 그들은 표적과 기사를 많이 행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더 많이 그리스도께 돌아온다. 이런 모습은 예수께서 생전에 보이셨던 역사와 다를 바 없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사도들의 선포대로 살아서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고 계심을 증명한다. 사람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하였다. 한편으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도들과 상종하지 않으려 했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를 불편하게도 하고 평안하게도 한다. 두려움을 주고 기쁨도 준다. 이는 하나님 나라 복음 앞에 나의 나라를 얼마나 허물도록 허락하는지에 달려 있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표적을 행하는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존재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백성에게는 존경과 칭찬을 받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세상 속에서의 영향력은 과연 어떨까?
 
-사도들의 손을 통해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일어난다(12~16절). 하나님의 손이 사도들 가운데 함께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 하실 때 일어났던 기적들이 지금 사도들을 통해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선명하게 누린다.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갖은 위협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력을 얻게 하신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 되신다는 사실을 전하는 사도들을 잡아 가뒀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구출해내신다(17~26절). 세상이 아무리 복음의 일꾼들을 방해하며 잡아 가둘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갇히지 않는다. 오히려 유유히 사람들 사이로 활보하신다. 
 
-또 어떤 형편이든지 하나님의 개입은 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은 “기어코 개입하셔서” 복음 전하는 자들을 보호하신다. 인도와 보호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복음 증거의 삶을 지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성령 충만하여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과 달리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종교지도자들은 시기로 충만하여 사도들을 잡아 가둔다(17절).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복음 전도의 방해자로 악인의 자리에 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고 생명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예수를 죽인 종교지도자들은 시기심이 충만하여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처럼 주의 영에 사로잡혀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진심으로 협력하거나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 법이다.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 때문에 옥에 갇혔는데, 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자마자 다시 성전에 들어가서 말씀을 가르친다(18~21, 25절). 언제까지나 충성을 다하는 순종의 모습이다.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하신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는가? 
 
*주의 사자를 통해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풀어주고서는 그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다시 성전으로 가서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다가 붙잡히게 하신다. 사도들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사역이 안전한지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주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으리라(막 8:35)는 믿음으로 굳건하게 사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 세상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저 어리둥절하고 신기하게만 보고(2:6~7), 놀라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했으며(2:12~13, 4:13),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2:43). 하지만 이제는 “크게 두려워(5:5, 11)”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누구 하나, 감히 그들의 모임에 끼여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백성은 그들을 칭찬하였다(새번역_5:13).”
 
*초대교회가 거룩성을 스스로 존중하니, 도덕성도 함께 세워졌다. 이때는 교회가 존중받았고, 그리스도인은 칭찬을 받았다. 오늘날 교회를 향한 조소와 조롱, 비난을 감안하면 교회가 회복해야 할 영역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교회 스스로 정결함을 도모하지 않고, 불의 앞에 침묵하기 세상은 교회의 존재를 그저 조롱과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뿐이다.
 
*교회의 거룩성은 결국 본질을 잃어버리면 기대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어야 거룩함은 자연스럽게 빛을 발할 것이고, 세상은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과 교회 공동체를 향한 칭찬을 되돌릴 것이다. 결국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주님, 어떤 상황이나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드러내겠습니다. 
*주님,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생명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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