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채찍질 당했으나 도리어 기뻐하는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다. [행 5:27-42]
 – 2024년 05월 11일
– 2024년 05월 11일 –
산헤드린 공회에 다시 서게 된 사도들은 또다시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게 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메시아와 구주로 삼으셨다고 답변한다. 사도들을 말살하려는 공회원들의 시도에 제동을 건 사람은 가말리엘이었다. 가말리엘은 논리적으로 공회원들을 설득하여 사도들의 목숨을 건지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는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이 기록된 사도행전 1:4~5, 7~8 이후 처음으로 비(非)그리스도인의 연설이 소개된다. 가말리엘의 연설이다. 유대교를 대변하는 모든 종교 지도자가 보인 적대감과 대조적으로 랍비 가말리엘의 태도가 돋보인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만일 예수 운동이 사람으로 말미암았다면 가만두어도 소멸의 길을 걸어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사도행전의 서사는 이 예수 운동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확증해 주고 있다. 아쉽게도 가말리엘의 연설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가만두지 않는다. 막아도 소용없는 헛된 제재를 계속한다. 역설적으로 이들의 핍박은 복음 확산을 가속한다.
    
    
    
1. 산헤드린 공회의 2차 심문(27~32절)
사도들은 다시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고 대제사장으로부터 2차 심문을 받는다. 대제사장은 1차 심문 때 선고한 복음 전도 금지령을 상기시켰다. 대제사장 심문의 특이점이 있는데, 예수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거부한다. “이 이름으로,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절)”라는 표현은 자신들에게 크나큰 골칫거리를 안겨주는 사도들과 그들의 스승인 예수를 얼마나 증오하고 경멸하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제사장 심문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 전도 금지령에 관한 것(28a 절) 과 예수의 죽음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에 관한 것(28b 절) 이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반응이 29절에 나온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대답은 베드로의 대답과 맥을 같이 한다(행 4:19). 성령 충만한 삶은 사람의 말을 따르기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다. 손익계산에 앞서 손해를 무릅쓰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성령 충만한 삶이다.
    
대제사장 예수의 죽음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에 관한 질문은 짧은 설교 형태로 답변하였다(30~32절). 사도들은 권력자 앞에서 자기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변호하기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집중한다.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 우편으로의 승귀를 핵심으로 하는 복음을 담대하게 전한다. 무엇보다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 ‘나무에 달아’라는 표현은 신명기 21:23을 연상시키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에서 이 신명기 본문을 인용하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인류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대속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31절은 회개함과 죄 사함이 주어지는 구원의 메시지가 예수를 죽인 장본인들에게도 적용됨을 시사한다. 사도들은 자신들을 고발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전한다. 이 구원은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허락된다.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을 친히 목격한 자신들뿐만 아니라 성령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임을 천명한다(32절).
    
    
    
2. 가말리엘의 조언과 하나님의 섭리(33~42절)
사도들의 대답은 대제사장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사도들은 공회의 처벌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도들의 말을 들은 공회원들은 격분한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이려고 한다(33절). 그런데 이때 사도들의 목숨을 구할 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었다.
    
바리새인은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를 대적한 집단 중의 하나였다. 예수님도 그들의 위선적인 종교 행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예수를 죽이는 일에도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으로 합세했었다. 한편 그런 바리새인 중에 예수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도 있었다(눅 7:36; 11:37; 14:1; 행 15:5; 23:6). 가말리엘의 호의적인 변론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사도들을 잠깐 퇴장시킨 가말리엘은 비공개적으로 공회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는 과거의 역사적인 선례를 들며 사도들에 관한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건의한다. 과거 백성을 선동하여 반란을 주도한 두 명의 주동자(드다와 갈릴리 사람 유다)에 관한 것이다. 이 두 선례를 바탕으로 매우 논리적이며 지혜로운 결론을 전한다.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39절)”
    
가말리엘의 지혜로운 발언은 사두개인과 공회원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사도들은 채찍질과 전도금지령을 받고 풀려난다. 여기서 언급된 채찍질은 산헤드린 공회나 각 회당의 회당장의 권한으로 율법을 어긴 자에게 가할 수 있었던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고후 11:24)”를 가리킨다(행 22:19; 막 13:9). 하나님께서는 가말리엘의 지혜를 사용하셔서 사도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셨다.
    
    
    
나는?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는 종교 지도자들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27~32절). 사실을 아는 증인으로서 보고 들은 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권력자의 명령일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명백하게 다르다면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고 마땅하다!
    
-사도들은 담대하고 거룩한 불복종의 모습을 보여줬다. 종교 지도자들은 무력했고, 사도들은 담대하였다. 사도들은 부활을 믿기에 가르치거나 말하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예루살렘 전역으로 퍼뜨렸으며 예수를 죽인 책임도 종교 지도자들에게 돌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메시아를 죽인 악한 권세보다 하늘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때로는 거룩한 불복종이 하나님께 대한 담대한 복종이 된다.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아를 죽였지만, 사도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서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 또 비겁한 도망자 사도들을 담대한 부활의 증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부활의 증인으로 사용하셨다. 예수께 복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예수가 살아계셔서 약속대로 보혜사를 보내주고 계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령을 보내주셔서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 증거하게 하신다(30~32절). 사도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와 죄 사함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천상의 왕위에 앉히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자신들은 이 사실을 전하는 증인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도 기꺼이 사도들 가운데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들과 함께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 주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세밀하신 동행하심은 나에게도 큰 격려가 된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함께 증언대에 서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나에게도 여전함을 신뢰한다.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분명한 사도들의 답변에 분노하여 그들을 죽이려고 한다(33~40절). 하지만 그때 가말리엘이라는 율법 교사가 개입하여 합리적인 권고를 함으로써 사도들에게 채찍을 때리는 정도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님께서 가말리엘의 지혜와 연륜을 사용하셔서 사도들을 죽음으로부터 건지신 것이다.
    
-가말리엘은 드다와 유다의 메시아 운동을 예로 들면서 예수 운동도 사람에게서 났으면 실패하고 하나님에게서 났으면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했다. 아쉬운 것은 그는 믿음의 사람이라기보다 “상식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가말리엘의 상식적인 대처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공회에서 말한 대로 메시아 예수는 죽었지만 살아났고 제자들은 흩어지지 않고 더 많아졌다. 참된 하나님의 역사임이 증명되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채찍질(사십에 하나 감한 매)을 당한 불명예를 명예롭게 여기고 기뻐하였다(41~42절). 또다시 불의한 법정이 금한 것에 불복종하고 날마다 성전이든 집이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이 자신들을 인정해 주시는 복된 증거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결국 박해와 고난은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막지 못했고, 오히려 더욱 담대한 복음의 일꾼들로 단련해 주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을 얼마나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까? 채찍에 맞으면서도 기뻐하며 복음을 전한 사도들의 열정이 나의 삶으로 이어지기를 사모해 본다.
    
    
    
*주님, 채찍질을 당했지만 도리어 기뻐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원색적인 복음 전도의 열정이 우리 공동체 안에 이식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임을 담대히 선포한 사도들의 모습에서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회복해야 할 모습을 봅니다. 우리 공동체도 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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