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단 3:1-18]
 – 2022년 11월 07일
– 2022년 11월 07일 –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강렬하다. 강렬하게 타는 풀무불 앞에서 이런 용기라니… 강렬하고 강렬하다.
 
 
느부갓네살 왕의 고집…신상이 무너지는 꿈에서 바벨론을 비롯한 모든 나라는 무너진다는 해석을 전해 들었으면서도 두라 평지에 높이 27m(육십규빗), 너비 2.7m(여섯 규빗)의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었다.아파트 15층 높이다!. 아무리 금의 나라로 일컫는 바벨론이지만 느부갓네살의 치기가 강렬하다. 그 신상 앞에 절하지 않으면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폭압하는 그 교만이 강렬하고 강렬하다.
 
자신이 직접 꾼 꿈에서 거대한 신상이 동멩이 하나에 무너져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모양새다. 그의 교만이 위험하다. 교만한 지도자는 자기절대화의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 여기에 무식 하기까지 한다면 예측 가능한 행동에서 벗어난 기행을 하게 된다. 느부갓네살의 신상 세우기를 보면서 윗 동네 거대한 동상들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그러고보니 독재국가일 수록 권력자 우상화에 집착하는 공통점이 있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통치자의 동상들은 하나같이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세운 신상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느부갓네살은 자국 백성은 물론 점령한 지역의 백성을 동원하여 신상의 낙성식을 성대하게 치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상에게 절하라고 명령했다. “자기 절대화”이다. 2장에서 그는 다니엘의 해석을 들으며 그 하나님께 절하듯, 다니엘에게 절하였다.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성찰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왕의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어서 누구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왕은 스스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절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일 거부 한다면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6절)”을 엄포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소리와 질서에 순응하기를 강요한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담을 준다. 다양한 사회이지만, 전체주의가 되기를 원한다.
 
 
 
어떤 갈대아 사람들의 참소… 패전국 유다 출신들이 각 지방을 다스리게 한 것이(2:49) 못마땅 했는지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유다 출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고발한다. 이들의 고발은 왕에 대한 충성인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출중한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 바벨론 정신에 굴복하지 않는 유다 출신 젊은이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일 뿐이었다.
 
*세상은 자신들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따르지 않는 세상의 질서와 가치관을 강요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
 
 
*느부갓네살 앞으로 끌려 나온 세 사람에게 왕은 회유와 협박을 불사한다. 왕의 회유는 세 사람에게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기꺼이 타는 풀무불 속으로 던져질 것을 각오 한다. 어디서 이런 강렬한 담대함이 나오는 것일까?
 
*그들은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왕의 꿈 해석 사건에서 이미 죽었었다. 하지만 다니엘을 통해 왕의 꿈과 해석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 진정한 왕이심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끌려올 때 자신들을 떠나신 줄로 알았던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킨 것을 분명히 알았다.
 
*더 나아가 “풀무불 속에 던져지더라도 구원하여 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 이 믿음은 그저 입술에서 읊조리는 수준이 아니라 풀무불 앞에서 생명을 거는 믿음이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아뢰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 일을 두고서는, 우리가 임금님께 대답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불 속에 던져져도, 임금님,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은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새번역_16-18절)
 
*젊은 세 방백,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명령을 거부했다. 결국 왕 앞에 불려 나갔지만, 주눅들지 않는다. 당당하게 왕의 명령을 거절한다. 하나님만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심을 알았기에 결코 신상에 절 할 수 없었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거하는 이 땅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으로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렇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는 강력한 유혹들에 의식하지 못한 채 물들어 가고 있다. 각종 이단과 사이비, 물질만능주의와 형식주의 등등 강요된 우상숭배는 없지만, 전보다 더 교묘하게 우상에게 무릎을 꿇게 만든다. 선명하게 강요하고 폭력으로 억압하는 시대보다 오히려 더 많은 유혹에 걸려들고 빠지기 십상이다.
 
*이러한 시대,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이 배교의 길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꿈의 해석을 들으며 감탄했다. 흥분한 것이다. 그런데 그 흥분이 3장에서는 결국 자신의 제국으로 해석된 신상의 황금머리 부분을 구현해 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그 해석을 듣고 그 꿈의 큰 신상을 재현해 보기로 마음을 이미 먹은 것이다. “금 머리”가 자신에게 해당 된다고 하니 “금으로 된 거대한 신상”을 구현했다.
 
 
*이러한 왕의 폭주 앞에 모든 신하들을 두려움으로 신상 앞에서 절하였다. 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이에 단호하게 행동한다. 이미 바벨론의 언어와 학문을 배우면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하였던” 이들의 뜻이 여전한 것을 보게 된다.
 
*세 친구들은 왕궁에 들어오는 그 날부터 두라 평지의 왕에게 선 지금 이 순간까지 그 믿음의 각오가 변하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가! 오히려 더욱 담대해 졌다. 일상의 먹는 음식에서 “뜻을 정하여” 지킨 그들의 자세는 드러난 거대한 우상 신상앞에, 그리고 살아있는 우상인 왕 앞에서 조차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아… 이들의 굳건한 행동의 신앙고백이 강렬하고 강렬하다!
 
*그들에게 살아남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었다….
 
 
 
*주님, 일상에서 손 쉽게 하나님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행동이 다반사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들었어도, 자신이 하나님되려 하는 느부갓네살과 같은 무모함이 혹시 우리의 삶의 태도에는 없는지 돌아보겠습니다. 지혜로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단호한 행동의 신앙고백을 본 받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행함으로 신앙고백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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