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또 하나의 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경외” [왕하 17:24-41]
 – 2024년 10월 03일
– 2024년 10월 03일 –
사마리아로 강제 이주된 이방 민족들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아 화를 당한다. 앗수르 왕은 이스라엘 제사장을 파견하여 그들에게 여호와 경외를 교육하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숭배하던 우상들 가운데 여호와를 추가한 것 뿐이었다. 멸망한 이스라엘의 땅에 여전히 혼합 종교가 판을 쳤다. 본 단락은 24~33절을 통해 사마리아에 정착한 이방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34~41절에서는 그들에 대한 평가를 다룬다.
 
 
 
1. 사마리아 이주민들에게 여호와를 가르침(24~28절).
본문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뒤에 사마리아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한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한 뒤, 이곳에서 바벨론 지역 성읍인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 사람들과 아람 지역 성읍인 하맛과 스발와임 사람들을 사마리아(이스라엘 전체를 지칭)의 여러 성읍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자신들이 섬기던 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왔고, 이곳에서 자신들의 신을 섬기며 살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셨다. 그곳에 사자를 보내어 몇 사람을 죽인다. 갑자기 사자들이 사마리아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는 사건은 흔한 일이 아니라 일종의 재앙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이런 일은 신의 벌로 생각하였다. 이로 인해 이 재앙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그 땅의 주인인 여호와로부터 왔다는 것과, 여호와의 법을 알지 못해서 내려진 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이 재앙의 원인과 대책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 무수한 선지자를 보내어 앙ㄹ려주고, 기적들을 통해 보여주며, 전쟁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만 경외할 것을 요청 받았어도 반응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무딘 감각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고대 사람들은 가 지역마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고유의 신이 있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어떤 지역에 오면 그 지역의 신을 올바로 섬겨야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깨달음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 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에게 닥쳐온 전쟁이나 기근의 재앙이 여호와께서 내리셨다고 깨닫지도 못했고, 여호와를 바로 섬김으로 그 재앙을 해결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많은 선지자들이 이들에게 닥친(닥칠) 재앙은 여호와의 벌이라고 거듭해서 선포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이 이 땅의 신인 여호와께서 내린 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신앙의 대상이 다를 뿐 신앙심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보다 이방인들이 더 깊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은 포로들 가운데 제사장 한 명을 데리고 가서 그곳에 거주하게 하고, 그 땅의 하나님의 법규(여호와께 예배드리는 방식과 여호와의 율법 전반에 관한 것)를 가르치도록 명령한다. 이 일로 선발된 제사장은 벧엘에 거하면서 백성에게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가르쳤다. 25~28절의 내용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여호와의 법을 아는 것”이 핵심 주제임을 드러낸다.
 
 
 
2. 종교 혼합주의가 성행한 사마리아의 상황(29~33절).
본문은 이방인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대한 한계를 잘 보여준다. 당시 고대 사회는 “다신 사회”였기에, 여호와를 섬기면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법을 배웠지만, 여호와만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여호와를 섬기지만, 자신들이 섬기던 이방신들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에 각 민족들마다 각기 자신들의 신상을 만들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만들어둔 산당(17:10, 모든 산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안에 신상들을 세운다. 그 신당들이 앗수르의 침략에도 남아 있었고, 이주한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들의 이주로 인해 이스라엘은 우상이 넘쳐나는 장소로 변하고 만다. 30~31절은 이스라엘 땅에서 섬기던 이방신들의 목록이다. 멸망 전보다 더 하나님의 땅 안에 각종 우상들이 넘쳐나고 만 것이다. 32절은 여호와를 경외하여 산당의 제사장을 택하였다고 번역하고 있으나 이보다는 여호와 경외와 산당의 제사를 겸하였다는 의미이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여호와만을 배타적으로 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33절은 여호와도 경외하였고 그들의 신들도 섬겼다는 표현을 통해 사마리아 지역이 종교가 혼합 종교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3. 사마리아의 혼합주의 종교에 대한 비판(34~41절).
본문은 저자가 사마리아 상황에 대하여 평가하는데, 이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과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저자는 지금까지도 이런 혼합주의가 계속 되는 것을 질책하면서 여호와께서는 야곱의 자손들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여호와만을 경외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한다.
 
35~36절은 이방신을 섬기지 말 것과 여호와만을 섬기라는 것을 대조하기 위해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고 그를 경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고, 그에게 제사하지 말라고 사중적으로 금지한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만 경외하고, 그를 경배하고, 그에게 제사드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37~38절로 이어지며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며, 39절에서 다시 여호와만을 경외하라고 말한다.
 
35~39절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과 여호와만을 경외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40~41절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호와만 섬기지 않고, 당시의 풍습대로 여호와도 섬기고, 자신들의 조상들의 신도 섬겼다. 결국 신명기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저자는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결론 짓는다.
 
이 결론은 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 사람을 성전 건설에서 배제하는 이유가 된다. 또 신약 시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가 되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여호와만”을 섬기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마 6:24).  이는 비단 눈에 보이는 우상만이 아니라 하나님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며,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오늘날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락에서만 “경외(야레)”가 7회 반복된다. “다른 신들을 경외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라는 경고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고다. 무수한 우상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것은 아무 자격 없이 하나님의 땅,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 백성의 책임(의무)이다.
 
 
 
나는?
-앗수르의 이주 정책 탓에 정복지인 사마리아에 정착한 이방인들 중 몇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에 앗수르는 이스라엘 포로 중 제사장 한 사람을 세워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를 가르치게 한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목도하자 마자 즉각 조치를 취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숱한 기적과 구원, 심판을 경험하고도 돌아올 줄 몰랐다.
 
-사마리아에 정착한 앗수르는 하나님도 경외하고 자신들의 신도 섬긴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자기 신들에게도 제물을 바쳤다. 스스로 산당도 만들었고, 제사장도 임의로 세웠다. 하지만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경외하는 듯 하여도 그들이 경외하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일 뿐이었다. 자신들을 위한 또 하나의 수호신일 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지도, 그것에 순종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경외도 아니고, 예배도 아니다. 진정한 경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따라 순종하며 살아내며, 그것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앗수르의 이주민들은 자신들의 이전 풍속은 그대로 잘 지키면서 교육받은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은 지키지 않는다. 율법은 분명하게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신 여호와만 경외와 경배의 대상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이전 풍속을 고집하고 자기 신들을 버리지 않는다.
 
-과거의 삶의 방식과 목적과 태도를 바꾸지 않은 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더디더라도 나의 삶과 가치관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주님, 또 하나의 신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저들의 모습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속에서 보입니다. 그래서 두렵기만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강력한 힘을 꼭 붙잡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 [시편 112:1-10]

 111편과 쌍을 이루는 지혜 시편이다. 동시에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의 두 번째 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묘사하는데 이 사람이 지닌 신앙적 성품은 111편이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다윗이 바라본 메시아 [시편 110:1-7]

 본 시편은 150개의 시편 중에서 신약성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자기 변증에 1절이 사용되고(마 22:44; 막 12:36; 눅 20:43), 히브리서 5:6절은 4절을 인용한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