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해 아래에서는 지혜나 무지나 거기서 거기… [전 2:12-17]
 – 2022년 11월 30일
– 2022년 11월 30일 –
코헬렛은 지혜와 무지(망령됨과 어리석음)가 늘 존재해 왔고 이후에도 계속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나 무지한 사람이나 모두 이 세상에서 잠시 있다가 사라질 존재이기에 “헤벨”이다. 해 아래에서는 아무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고 기억되지 못한다. 이 사실을 깨달은 코헬렛의 고통스러운 절망의 고백이 마음을 울린다. 
 
 
12절의 “지혜의 한계”에 대한 성찰은 23절까지의 내용을 암시한다. 본문은 “지혜와 어리석음”의 주제를, 18-23절은 “후계자를 고려한 지혜”의 문제를 말한다. 지혜의 한계를 표현하면서 “망령됨(홀렐루트_미침, 광기)”과 “어리석음(시클루트_어리석음, 우둔)”으로 표현한다. 지혜와 어리석음에 대한 주제는 이미 1:16-18에서 다루었다. 하지만 다시 반복하여 다루면서 과연 “지혜의 유익”이 무엇인지 탐구한다.
 
“임금 자리를 이어받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기껏해야 앞서 다스리던 왕이 이미 하던 일뿐이다. 무엇이 슬기로운 일이며, 무엇이 얼빠지고  어리석은 일인지 알려고 애를 써 보기도 하였다.”(새번역_12절)
 
아무리 뛰어난 왕이라도 “해 아래 세상의 허무함”을 해소할 수 없다. 코헬렛은 누구보다 슬기로운 왕이었고 부와 권력을 총동원하여 지혜와 어리석음에 대한 탐구를 마치고, 세상의 지혜를 얻는 것도 “헤벨”이라고 고백한다. 손에 잡을 수 없는 연기임을 다시 확인한다. 인생의 헤벨은 해 아래에서 사람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이 방법이 없다. “해 너머의 지혜”를 구할 수 밖에 없다.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지만, 지혜가 인생을 허무에서 건지지 못한다. 지혜자든 우매자든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나듯,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뛰어나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보편적인 질서이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항상 지혜자가 대접을 받고 우매자가 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항상 지혜가 선을 행하고, 우매자가 불행을 가져오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혜자나 우매자는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 죽음은 이들을 평등하게 만든다. 둘 다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진다. “사람이 지혜가 있다고 해서 오래 기억되는 것도 아니다. 지혜가 있다고 해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슬기로운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사람도 죽는다.”(새번역_16절)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똑같이 잊혀진다.
 
“그러니 산다는 것이 다 덧없는 것이다. 인생살이에 얽힌 일들이 나에게는 괴로움일 뿐이다.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될 뿐이다.”(새번역_17절)
 
 
 
나는?
-해 아래서는 삶의 모든 것을 알게 해준 지혜도 헤벨이다. 지혜와 대척되는 망령 되고 어리석은 것도 헤벨이다. 새롭게 왕이 된 이도 이전 왕이 했던 것을 반복하니 그 또한 헤벨이다. 해 아래에 새 것은 없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새롭게 된 것”이 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이를 새롭게 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은 새로워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헤벨의 세상에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
 
-지혜가 왜 헤벨일 수 밖에 없는가? 지혜나 우매함이나 삶의 당황스러운 죽음의 허망함 앞에 똑같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일생의 목표였고 그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지혜를 소유 했어도 운명을 바꿀 힘도 없다면 지혜가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지혜는 “헤벨”인 것이다.
 
-그런데 죽음은 망각과 함께 온다(16절). 죽음으로 인해 지혜자의 기억이 우매자의 기억이 사라짐과 동일하게 사라진다면 이것이 ‘헤벨’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지혜자의 성취물과 의로움, 명성이 죽음으로 인해 잊혀 진다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지혜가 구원을 이룬다고 한들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 그리고 해 아래의 인생들은 죽음이 허무한 결론이겠지만 해 위의 삶을 추구하는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죽음이 헤벨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삶을 소망하는 것에 이르게 한다. 인생의 절망의 끝에서 죽음 너머의 소망을 바라본 이들만이 헤벨에 빠지지 않는다.
 
-죽음이 주는 허무함이 아무리 강력하여도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수고를 낱낱히 기억하여 주시고 영생과 부활을 주시는 하나님이 실존하시기에 인생에  죽음이 있지만 의미 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 
 
 
 
*주님, 지혜나 우매함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해 아래의 사람들은 허탈해하지만, 해 위의 하나님 백성은 오히려 죽음 너머의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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