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세상은 우리에게 한탄을, 주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전 2:18-26]
 – 2022년 12월 01일
– 2022년 12월 01일 –
코헬렛은 계속해서 이 땅에서의 수고와 애씀의 헤벨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헤벨인 이유는 수고의 결과물을 스스로 누리지 못하고 다음세대에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며 이를 받는 다음세대가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깨달은 코헬렛은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며 짧은 인생을 즐기는 것이 선한 것임을 고백한다.
 
삶을 바라보는 코헬렛의 눈은 허무하면서도 정직하다. 삶이 헛되다고 노래하니 허무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사실이니 정직하다. 또, 수고의 결과를 확실하게 누리지 못하는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도 있음을 깨닫는다. 왜 코헬렛은 수고와 애씀이 헤벨이라고 토로할까?
 
 
 
1.삶의 보편적 가치(인과응보)가 무너지기에(18-19절)
코헬렛은 해 아래에서 자신이 한 수고를 “미워한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를 곧바로 밝히는데, 자신의 뒤에 올 이에게 물려줄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18절). 왜냐하면 “뒤에 올 그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세상에서(해 아래에서) 내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지혜를 다해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그에게 물려주어서 맡겨야 하다니, 이 수고도 헛되다.”(새번역_19절) 는 것이다.
 
코헬렛은 뿌린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굳이 수고하고 애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고를 미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수고의 결과물을 자신이 누리지 못하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하기에 또한 그 수고를 누릴 후손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문장 그대로 이해하면, 매우 이기적인 동기인것처럼 비춰진다. 코헬렛이 왕의 자리에 있는 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지도자는 현재의 유익을 위한 정책도 중요하지만, 미래세대를 위한 고려도 무시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시각으로 이해한다면 단순히 자신의 수고의 댓가를 누리지 못하는 것과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이에게 수고의 유산을 넘겨 주어야 한다는 것이 억울하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코헬렛이 이렇게 언급한 두 가지 헤벨의 이유는 공통적으로 “인과응보”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것이다.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열심히 일한 결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한 인과응보의 원리가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여러 세대로 확장하여 통찰하면 자신의 수고의 대가가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지는데 이를 받는 후손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후손이 받아 누리는 것은 “뿌린대로 거둔다”는 원리가 깨진 결과가 되는 것이고, 또 만약 그가 지혜자가 아니라면, 우매자가 선한 열매를 취하였음으로 “선한 것을 심는 지혜자에게 선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원리도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코헬렛은 이 사실에 절망하는 것이다. “해 아래”의 삶은 이런 가치에 함몰되어 삶이 덧없고 헛되다고 토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다르다! 자기가 죽고 나서 수고의 결과가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모르는 이에게 넘겨지고 여기에 우매자여서 코헬렛의 평생의 수고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해 위의 삶의 가치를 가지고 사는 하늘 백성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면 된다.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충성하지만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곧 해 위의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이의 태도이다.
 
 
 
2.수고하고 애쓰는 것이 실망 뿐이다(20-23절)
코헬렛은 18절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다”는 표현을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다”(20절) 고 표현한다. 이 땅에서 규범적인 지혜를 따라 성실하게 살아온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낙담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규범적인 지혜가 작동하지 않으니 분노한 것이다. 코헬렛은 더 자세하게 이를 지적한다.
 
*행위와 결과 사이에 불일치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니, 마음이 낙담된 것이다. 왜 이렇게 낙담한 것일까?
 
코헬렛은 “지혜와 지식과 재주”로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였다(21절). 그런데도 그 수고의 결과를 수고하지 않은 사람에게 넘겨주는 현실을 토로한다. 코헬렛에게 이 사실은 “헤벨”의 차원이 아니라 “큰 악”이다(21절 하). 그래서 코헬렛은 비관적이 어조로 한탄한다. “수고와 애씀이 무슨 보람이 있는가?”(22절), “그런 일은 괴로움과 슬픔, 마음 편히 쉬지 못한다”(23절)
 
*성실한 수고의 낮을 보냈지만, 이와 같은 비탄한 현실에서 밤의 안식과 회복을 경험하지 못한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해 아래에서 그토록 몸이 상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수고하며 애쓰며 땀을 흘려 남긴 것이 무엇인가 되묻는다. 결과만 가지고 삶을 평가한다면 고통스러울 인생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이것이 결론이 아니다. 이와 같은 해 아래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보시는 이가 계신다. 그 분이 계시기에 하늘 백성의 삶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웃을 수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계 21:4)
 
 
 
3.지금 베풀어 주신 것에 만족하라(24-26절)
코헬렛은 인간이 맛 볼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하여 “먹는 것,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자신의 혼(네페쉬)로 좋은 것을 보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을 말한다. 이것이 복이다. 코헬렛이 말하는 복은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새번역_25절)
 
그런데 하나님게 이와 같은 기쁨을 주시는 방식은 인간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는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시니, 죄인의 수고도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새번역_26절)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지식과 기쁨의 선물을 자기 마음대로 주신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 그 자체”다. 인간의 이해력으로 감히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신다. 또, 죄인들이 수고함으로 이룬 것을 하나님께서 마음에 드는 자에게 주시는 것을 보면서코헬렛은 이 모습을 “연기와 같다”, “수수께끼”와 같다하여 “헤벨”이라고 외친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은 모두 이해할 수 없다. 그 수수께끼 같은 하나님의 섭리 앞에 “헤벨”이라고 외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외침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먹는 것, 마시는 것, 스스로 기쁨을 느끼게 하는 즐거운 일을 경험할 때, 그저 감사하고 즐겨라! 그것이 헤벨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길이다.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 언제든지 거둬가실 수 있고 죄인조차도 얼마든지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잘 살다가 편히 죽을 수 있다. 각 인생을 사람이 정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손길을 따라 살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를 즐겨라! 누려라!
 
 
 
나는?
-코헬렛의 고백만 보면 절망스럽다. 모든 수고가 그야말로 덧없는 것 같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의도가 아니다. 비록 일평생 밤낮으로 성실하게 살았어도 결국 내 손에 남는 것은 없을 수 있다. 해 아래의 모든 수고가 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몫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돌아갈 만하다고 여길 수 있는 지혜자에게 가든, 절망스럽게 우매자에게 가든 인생이 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주님은 하늘 백성의 삶을 해 아래에서의 가치와 방식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하늘 백성은 해 위의 방식과 가치로 격려해 주신다.
 
-한탄이 가득한 삶이다. 코헬렛이 바라본 세상은 부조리하다. 땀 흘리는 자 따로, 한가로이 누리는 자 따로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그나마 낫지만, 내가 피땀 흘려 거둔 소출이 엉뚱한 사람이 누리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너무도 허망한 인생이다.
 
-하지만 한탄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신다. 그때 그때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보람 되어 마음이 만족하게 하는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최선을 다해 수고하되 누릴 것은 누리라는 것이다. 일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를 즐기고 누리는 것에 머물면 안 된다. 이런 세상의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한탄하며 원망으로 결론짓지 않게 하는 길이다. 그것은 “주님 안에 사는 것”이다.
 
*”나는 또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새번역_계 14:13) 세상은 우리의 수고를 한탄스럽게 만들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고를 기억하여 주신다.
 
*하나님 없는 해 아래서의 삶은 허망함과 한탄이 넘치지만, 이런 허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해 위의 영원한 삶으로 이끄신다.
 
*세상은 우리에게 한탄을 가득히 안겨 주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감사의 누림을 주신다….
 
 
 
*주님, 세상은 부조리 투성입니다. 한탄이 절로 납니다. 그렇기에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 실로 가치가 있습니다. 늘 주님 안에서 세상이 주는 한탄을 이겨내겠습니다. 감사하며 현재를 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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