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말씀을 늘 가까이 [전 5:1-7]
 – 2022년 12월 06일
– 2022년 12월 06일 –
코헬렛은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 어떤 자세로 가야 하는지 가르친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할까?
 
 
 
1.말씀을 듣기 원함(1절)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새번역)
 
하나님께 나아가는 발걸음을 조심해야 한다. 코헬렛은 “제사나” 드리러가는 태도를 매우 우려스럽게 말한다. 먼저 일상에서 악한 일을 여전히 행하면서 하나님의 집에 나아가는 것을 경계한다. 이를 “어리석은” 것임을 강조한다. 또, 이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전락시켜 그저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것으로 여긴다고 꼬집는다. 악인의 어리석음은 “자신의 일상에서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악함이 여전하면서 성전에 올라가 제물만 바치면 된다”는 식의 자세에 우려를 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는 중요한 목적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말씀을 들으러 가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란 단지 설교자의 설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내밀하게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의 중요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할 수록 지극히 형식적인 시간이라고 여기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깨우침은 일어난다. 내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내가 추구하는 안심을 얻으려는 인간적인 형식을 채우러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는 것은 “헤벨”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모든 것은 결국 해 아래의 백성들의 삶의 가치관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는 사모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통해서 더 선명해지고 그 의미가 더 깊어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깨달으려는 모든 간절한 마음들이 하나님 전에 나아가려는 이에게 간절한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열어 보여 주시고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다. 제사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어떤 갈급함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간절함으로 나아와야 할 것이다.
 
 
 
2.나의 말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말이 먼저다(2-7절)
하나님 앞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어서도, 마음을 조급하게도 해서는 안 된다. 코헬렛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한다(2절).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를 마음이 조급해 지는 것은 걱정과 꿈이 많아서이고, 말을 많이 하게 되면 필히 어리석은 소리가 많아지기 때문이다(3절). 
 
왜 이렇게 권면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처음과 끝을 다 아신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일상에서 말을 마치자 마자 후회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말을 성급히 하지 말고,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그만큼 좁고 넓지 못하다는 것이다. 말이 많으면 어리석음이 더욱 진해지고, 말이 많이 할수록 무식함을 감출 수 없다. 적어도 말에 있어서는 적을 수록 좋다.
 
 
이어서 서원의 문제가 언급된다.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는(4절) 말씀도 서원이 말로 하는 것이기에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5절) 의미로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차원이다. 또, 말로 죄를 범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섣불리 약속을 해서 지키지 못하거나 큰소리로 허풍을 치고, 화를 내는 것도 모두 말로 범하는 죄이다. 특히 제사장 앞에서 섣불리 서원한 것이 실수 였노라고 말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권면한다. 조급하게 서원을 하고 “나의 실수였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실수임을 분명하게 언급한다(6절).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자기 생각이 많으면 꿈(공상)이 많아진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 생각이 많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런 이에게 하나님은 경외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린다.
 
*말씀을 들으며 한 발짝 한 발짝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지키기를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신앙생활 중에 가지고 있는 심각한 오해중의 하나는 “예배당에 가는 것, 헌금(제물)을 바치는 것, 사역(봉사)하는 것”이 곧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결코 건강한 신앙이 아니다. 본문은 종교적인 행위들을 신앙이라고 오해하는 것의 “헤벨”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심지어 이 시대는 더욱 성전 중심, 제사 중심의 신앙이 확고한 시기였음에도 코헬렛은 하나님의 집에는 “말씀을 들으러 간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말씀을 듣는 다는 것은 단지 설교를 듣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소통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고,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 기록된 말씀을 읽고 듣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만난다. 그래서 코헬렛은 하나님의 집에 가는 분명한 목적을 “말씀을 들으러”가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이 여기에 있다. “그 책의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존재라면 “그 책”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예배당에 출입하는 것, 헌금을 잘 바치는 것, 여러가지 사역을 하는 것이 곧 신앙이라고 오해하는 것을 속히 극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한다.
 
 
*일상에서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묵상하는 삶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목적이 분명하다. “말씀을 들으면서” 일상에서 읽고 생각하고 묵상했던 말씀들을 더 깊이 정리하고 그 의미와 뜻에 순복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저 예배 시간을 잘 준수하고 헌금과 사역에 충실한 것에 예배드리는 것의 목적을 제한한다면 곤란하다.
 
*말씀이 일상에서 영향력을 끼치면 “자기 말”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또, 코헬렛이 지적한 것처럼 “걱정이 많아져서 꿈이(공상, 헛된 바램) 많아지고, 어리석은 소리”가 많아지지 않는다. 말씀의 소리를 들으면 말씀의 말을 하게 마련이다.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다. 오직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만 알고 살아라.”(새번역_7절)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외적인 형식에 치우친 이들은 자기의 예배 시간 준수를 자랑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드리는 헌금을 과시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자랑거리가 된다. 하지만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을 듣는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음을 늘 말씀이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주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 형식을 자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내밀한 관계에 더 힘쓰겠습니다. 말씀을 더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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