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인생의 행복은? [전 6:1-12 ]
 – 2022년 12월 08일
– 2022년 12월 08일 –
6장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가 적용될 수 없거나 그 원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들을 나열한다.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으나 그 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할 수도 있고, 사는 동안 온갖 축복을 받았으나 죽을 때 묻힐 무덤이 없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히 살수는 없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지혜자나 우매자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지혜자는 5장 10-17절의 주제인 ‘재물의 헤벨’이라는 주제를 다시 꺼내 든다. 장수와 수고등의 주제도 함께 논하며 “해 아래서 모든 것이 헤벨이다”는 논지를 반복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부와 다산과 장수는 복의 표지였다. 삶의 중요한 가치들이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지혜자가 깨우쳐 주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먼저 받아들여야 할 “헤벨”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1.인과응보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들(1-6절)
부와 재물을 아쉬움 없도록 가졌어도 그것을 누릴 복이 없으면 허무하다.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시지만, 재물을 누릴 복도 함께 주신다. 그런데 이것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소유가 많은들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또, 자신이 가진 소유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없다면 그 소유는 자신을 찌르는 치명적인 창이 된다(2절).
 
*누리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고통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가 나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고통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가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곳에 쓰이지 못한다면 그 소유는 나에게 큰 통탄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내 소유가 나에게 통탄을 가져오게 하지 않도록, 나의 소유가 나의 삶의 함정이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백명의 자녀를 낳고 오래도록 장수하며, 많은 재물을 가졌어도 마음에 즐거움이 없다면 그것도 헛되다. 또 그가 죽은 후 제대로 매장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햇빛을 보지 못한 낙태된 아이보다 못하다고 까지 한탄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 아이는 이 부자보다 더 편하게 안식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도록 살아도(천년씩 두 번을 산다하여도) 자기 소유로 인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 없다. 소유가 풍성한 자나, 빈곤한 자나 내려갈 곳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3-6절).
 
*장수함이 그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 부족하다면, 많은 자녀가 그의 재산의 상속에만 관심을 갖고 정작 무덤조차 준비하지 않는 인생이라면, 심각한 재앙이다는 것이다. 이는 부요함은 하나님의 언약에 명시된 분명한 복이다. 하지만 이를 누릴 수 없는 이는 재앙의 조건만 될 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가 나에게 주인노릇 하도록 방치하지 말고 내가 소유의 주인노릇 하도록 분별해야 한다. 용기가 필요하다.
 
 
 
2.인간의 명백한 한계(7-12절)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고는 늘 턱없이 부족하다(7절). 해 아래 인생을 온전히 만족 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창조 이래로 가장 부요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아우성을 친다. 재물이 많고 세상살이에 미숙한 인간이나 가난하나 세상살이에 밝은 인간이나 거기서 거기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더 낫지 않다.
 
지혜자는 인간의 한계를 반복하여 깨닫게 한다. 인간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존재로(7절) 묘사하는데, 열심히 노동하는 이유도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라고 일갈한다. “아무리 먹어도 목구멍(식욕)을 채울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욕망 앞에서는 지혜자나 우매자나 별반 차이가 없다. 가난한 사람이 인생살이의 도를 터득해도 나아지는 것은 없다.
 
*지금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오래 전에 생긴 것이고 인생이 어떤 것인지도 사실 이미 잘 알려져 왔다(10절). 그래서 인간은 강한 자와 섣불리 다투지 않는다.
 
*말이 많으면 빈 말이 많아진다. 그 많은 말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짧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누가 알겠는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세상에서  일어날 일들을 누가 그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새번역_12절)
 
*해 아래의 사람은 무엇이 참 좋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죽은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명백한 한계이다. 이 한계를 순순히 인정할 때 욕망에 지배받지 않는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의 시종을 아시고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전 3:11)
 
 
 
나는?
-인생을 살면서 “좋은 것(행복)”은 무엇이며, “악한 것(불행한 것)”은 무엇일까? 지혜자의 가르침은 단순명료하다.
 
-인생을 살는 “좋은 것(행복)”은 재물과 부요와 존귀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제 몫으로 주신 것을 “누리는(아칼_먹다, 삼키다) 것”이다. 누린다는 것은 3-6절에서 예를 든 것에 따르면 많은 재산이나, 다산하여 자녀들이 많거나, 장수한다 하여도 그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면” 헛되다고 했다. 그러므로 “누리는 것은 만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족하다(사바)”는 단어에 담긴 기본 의미는 “음식물을 먹어 만족하다”이다. “누리다(아칼)”의 기본 의미가 “삼키다, 먹다”의 의미였으니 지혜자가 누누히 강조하였던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수고의 보람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임이 분명하다.
 
-인생의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께서 “먹게하고 만족하게 하시는 은혜”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인생을 이렇게 행복하게(좋게) 살도록 부르셨다.
 
 
*이를 누리기 위해서는 인생이 의지를 발휘하며 세워야 할 부분이 있는데,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생이 앉으려 하면 안 된다. 아무리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가졌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을 알아야 한다. 장수와 다산의 복도 그것이 근심과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헉라가하신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인생은 행복하다.
 
 
*보편적인 인과율을 잘 따라 사는 것은 “잠언”의 교훈이라면, 선과 악, 의와 불의, 생명과 죽음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시각에 머무르는 인생들에게 제 삼의 시선이 있음도 깨닫게 하는 것이 전도서의 교훈이다. 잘 사는 것이 복이기도 하지만, 화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 어떤 예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했기에 인생에게 구원의 문이 열린 것은 단지 인과율의 정직한 삶을 사는 것으로만 인생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사건이다.
 
*잘 사는 것이 화가 도리 수 있는 세상도 있다는 것이고, 심은대로 거두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이와같은 세상살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언제나 제 몫으로 주시고 누리도록 하시는 선물과 같은 은혜를 기억하며 만족하고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지금 누리라고 주신 것 감사하며 누리는 것, 지금 베풀어 주신 것에 만족하는 것,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여 그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 제 인생도 하나님께서 행복하게 누리기를 바라시며 베풀어 주신 선물 때문에 오늘도 먹고 마시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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