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앞서 고백한 참혹하고 황폐한 현실에 이어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있는지 묻는 형식으로 시인 개인이 겪은 고통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1장의 전반부처럼 현실 문제를 다룬 후 다시 여호와께 간구한다. 시인은 예루살렘에 임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이는 신명기 사상을 반영한 것인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들은 뒤에 모압 평야에서 이 율법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신명기 27장에서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리는 징계를 받겠다고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그리고 신명기 28:20~68은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받을 징벌을 나열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예언서들은 이런 신명기의 약속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시인은 시온에 내린 재앙이 “여호와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도와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러나 시인은 심판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과 심판을 하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거듭 고백한다.
1. 여호와가 내리신 징벌과 시온의 슬픔(12~17절)
이번에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일에 관계가 없는지 묻는다. “나”는 예루살렘을 의인화한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은 예루살렘이 도움을 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화자의 독백을 들어주는 청중이자 어려운 상황을 지켜본 목격자이다. 화자는 가장 먼저 자신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었는지 봐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의 고통이 그만큼 고달프다는 하소연이다.
화자가 자신의 고통이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고통의 원인이 여호와의 진노하심에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은 크고 두렵고 끔찍한 심판의 날인 “여호와의 날”을 연상하게 한다. 13절에서는 심판하는 불의 영상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발 앞에 그물을 친다는 표현처럼 빠져나가지 못하는 심판을 생각나게 한다. 14절에서는 이런 심판에 처한 자신을 “나의 죄악의 멍에”를 메었다고 토로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신이 쌓아 올린 죄악 때문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15절은 여호와는 성안의 모든 용사를 물리치셨고 젊은 남자들을 성회에 모아 부수셨다고 표현한다. 성회는 원래 여호와께 감사하고 여호와의 보호를 구하는 모임인데, 오히려 이 모임 때 이스라엘을 부수는 역설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포도주 틀에서 처녀 딸인 유다를 밟았다는 표현은 온 유다 성읍에 큰 살육으로 포도주와 같은 피가 흘려졌다는 의미다. 심판의 무서움과 잔혹함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16절은 이런 여호와의 징벌에 대한 시인의 반응인데 그것은 “울음”이다. 자기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며 자신의 비통함을 절절히 표현한다. 이 상황 더욱 슬프고 비참한 것은 위로할 자, 생명을 소생시켜 줄 자가 자기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회복의 기대가 있는 상태에서 받는 징벌은 그래도 견딜만하다. 그러나 회복에 대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재앙은 매우 절망적이다. 결국 원수들의 뛰어난 능력으로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이 황폐하게 되고 진멸되었다고 고백한다.
17절은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다고 한다. 두 손을 펴는 것은 도움을 구하는 간구의 행동이지만 이런 시도는 헛될 것이다. 왜냐하면 위로자가 없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여호와께서는 위로자가 되시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 사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적이 되라고 명령하셨다. 여호와께서 다른 나라에 명령을 내리시는 모습은 그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시라는 예언자들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더구나 예루살렘은 이제 주변 나라들로부터 오물 취급을 받게 되었다.
여호와께 버려진 도성은 사람들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2. 여호와께 죄를 인정함(18~19절)
심한 환란을 당했지만, 시인은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모든 환란의 원인은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여호와가 불의하게 그의 백성을 고통에 내던지신 것이 아니다. 신명기에서 여호와는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축복과 보호를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 말씀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심각한 징계를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를 근거로 시인은 지금 자신들이 언약을 어긴 벌을 받고 있다고 고백한다.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을 외적의 강함이나 악함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죄에서 찾는 시인의 모습은 매우 신앙적이다. 성경은 교회의 부패는 외적인 요인보다는 내적인 부패, 즉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아 교회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시인은 자신의 죄 탓에 고통당하는 모습을 듣고 보라고 모든 사람에게 외친다. 자신의 모든 처녀와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다는 것이다. 시온은 자식들을 모두 빼앗기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19절은 사랑하던 자의 배반에 탄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사랑하던 자는 여호와를 제외하고 시온이 의지하던 모든 것이다. 이방 나라들, 이방신들, 재물 등 이런 것들을 의지하면 잘 살 줄 알았는데, 정작 환란 날에 이 모든 것은 위로자도 구원자도 되지 못했다. 또 제사장, 장로들이 등장하나 이들은 평상시에 권력을 행사하던 자들이 양식을 찾아 헤매다가 성안에서 죽는 모습을 그린다.
3. 여호와께 대한 탄원(20~22절)
시인은 다시 여호와께 자신을 봐달라고 탄원한다. 먼저 자신의 환란이 심각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 줄 안다고 고백한다. 그 후에 자신의 탄식을 듣고도 위로하지 않은 원수들을 심판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이 자신의 패망을 기뻐하였기 때문이다. 21절의 “주께서 선포하신 날”은 12절에서 언급된 “진노하신 날”과 반대되는 여호와의 날이다.
예언서에는 두 가지 여호와의 날이 언급된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날과 이방인을 심판하시는 날이다. 이스라엘 멸망하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날이 자들을 구원하고 이방인을 심판하는 날로만 여기며 안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심판한 여호와의 날은 이미 도래하였다. 이제는 이방인을 심판할 여호와의 날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의 의와 연결되는데, 이스라엘은 비록 하나님께 반역하여 벌을 받게 되었지만, 몽둥이로 쓰이는 원수들도 선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시인은 그들의 악함 대로 그들을 심판해달라며 공의 하나님께 탄원하며 시를 마친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붙들며 고난의 상황을 이겨나가려는 시인의 신앙이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하나님은 죄악에 눈을 감지 않으신다. 그러나 자비 또한 포기하지 않으신다. 지나가는 자에게 동정을 호소할 만큼, 뼈 하나까지 남김없이 불살라질 정도로, 온종일 아픔과 외로움에 몸서리치도록 자기 백성을 심판하셨다. 경고했건만(렘 18:16)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생과 근심이 여호와의 본심이 아니니(애 3:33) 죄의 대가를 묵묵히 감당할 때 소망이 있을 것이다.
-선지자의 목덜미에 죄악의 멍에를 얹어 원수들의 손에 넘기신다. 성을 지킬 용사들도 버리셨고, 소년과 처녀들이 포도주 같은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살육을 당하게 하셨다. 그러고도 하나님은 물론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게 하시고 도리어 조롱과 멸시와 혐오를 받게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악에 언제까지나 무조건 눈감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보다 동맹국들을 더 사랑하고 의지한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
-예루살렘은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처녀와 소년들이 바벨론 붙잡혀 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제사장과 장로들마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기절할 정도로 예루살렘은 그의 죄악에 대해 철저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죄악인 인정하는 시인의 모습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모습이다. 선지자는 자신과 예루살렘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여긴 것이다. 예루살렘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보고, 그 멸망 속에서 자신의 멸망을 체험한다. 그들의 죄악은 곧 자신의 죄악이고, 그들의 구원을 자신의 구원으로 보았다. 또한 자신(예루살렘_의 큰 패역을 인정하고 그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다. 동시에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며 기뻐하면서 갖은 악을 자행하는 원수들에게도 공의를 행하시도록 요청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준 환난이 하나님의 공의를 통해 회복될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명예, 하나님 나라의 명예를 나의 명예와 동일시하여, 남 일처럼 조국교회의 타락상을 조롱하기보다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명예를 생각하며 통분해야 할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두시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물로 자기 고통을 호소하고 동정을 구할 정도로 자기 백성에게 괴로움을 허락하신다. 불에 뼈가 바스러지게 했으며, 종일토록 심한 아픔을 겪게 하셨다. 선지자를 통해 이미 경고하신 대로였다.(렘 18:16). 우리는 왜 경고를 듣고도 돌이키는 것을 더디 할까?
*참 위로자이신 하나님을 버린 유다의 패망을 위로해 줄 이는 없다. 세상은 많이 소유하고 높은 자리에 있어야 친구가 되어줄 뿐이다. 하지만 힘이 없어지면 언제든지 대적이 된다. 진정한 위로자를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
*심판받는 중에 여호와께 죄를 인정하고 탄원한다. 죄악을 인정하고 주께 긍휼을 구하고 원수를 심판하여 주실 것을 호소한다.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가? 심판 중에라도 회개한 자에게 심판은 결론이 될 수 없다.
*주님, 사랑을 저버리면 공의의 심판이 우리를 덮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보호하시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심판하심을 기억하여 공의를 따라 살겠습니다.
*주님, 참 위로자 되신 하나님만 붙듭니다. 세상이 나의 위로자가 될 수 없음은 위기와 좌절을 만났을 때 선명해 집니다. 늘 위로자 되신 주님의 손을 붙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