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는 시온을 “딸 내 백성”이라고 부른다. 처참하게 멸망한 딸 예루살렘의 참상을 보며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에 견딜 수 없어 탄식한다. 이 참상의 원인과 책임이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 경고와 미혹에 있음을 밝히고 원수들의 비웃음거리가 된 시온을 향해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라고 호소한다.
예루살렘(시온)의 파괴와 몰락을 지켜본 예레미야의 내적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한 멸망의 참상속 백성들이 직면해야 했던 끔찍한 고난이 묘사된다. 특히 어린 자녀와 젖먹이 아기들이 길거리에서 기절하고 어머니 품에서 죽는 처참한 광경 묘사를 통해 완전한 멸망, 희망없는 절망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와같은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이 하나님의 가혹한 분노의 결과임을 확인시켜 준다.
예레미야는 이런 참상에 대해 딸 예루살렘을 부르며 무엇으로 위로할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며 시온이 당한 잔혹한 상황을 증언한다. 그럼에도 시온은 그렇게 처참하게 내동댕이쳐진 거기에서 일어나 부르짖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한다. 이에 시온이 일어나 참극속에서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독특한 것은 시편의 탄식시와 달리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이런 참상의 상황을 바꾸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비극적인지에 대해서만 되뇌인다. 얼마나 기가 막힌 고통이었으면 그랬을까….
1.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11~12절)
어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었다. 전쟁은 군인이나 청년들,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굶어 죽게 만들었다. 특히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대의 전쟁에서 침략군이 주로 사용하는 전술 중의 하나는 포위 공격이었다. 성을 꼼꼼히 둘러싸고 외부에서의 식량 공급을 차단하여 항복하게 하는 전술이었다. 성 안에는 자연 재해가 가져온 기근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기근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시온)의 멸망으로 인한 아이들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고통을 세 개의 기관으로 표현한다.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고 창자는 끊어지고 간이 땅에 쏟아졌다’고 토로한다. 고대근동 세계에서 간은 감정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간을 땅에 쏟아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 특히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물처럼 땅에 쏟아놓는다는 의미다. 창자가 끊어진다는 표현도 ‘속이 부글부글 끓다’라는 뜻으로 속에서 올라오는 강한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애 1:20). 즉, 아이들의 죽음을 보며 느낀 슬픔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느겼던 슬픔과 같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11절은 예레미야가 이렇게 슬퍼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딸 백성이 패망하고 그로 인해 어린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기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절은 이 아이들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굶주린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죽어가면서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어머니의 품은 원래 젖먹이가 젖을 먹으며 가장 배부르고 행복한 곳이어야 하는데, 기근으로 어머니의 젖까지 말라버려 아기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굶주리다 죽어가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표출하고 있다.
2. 비극마저 조롱거리가 된 시온(13~17절)
아이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는 이 비극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13절은 이런 예레미야의 마음을 네 개의 의문문으로 표현한다. “무엇으로 네게 증언할까? 무엇으로 너에게 비유할까? 무엇으로 너에게 비교하며 너를 위로할 수 있을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칠수 있을까?” “너”는 딸 예루살렘이다. 예레미야는 참담하고 답답할 뿐이었다. 그는 이 참상 앞에 전적으로 무능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 밖에 없다는 심정을 드러낸다.
14절은 이런 참상의 일차적인 책임을 거짓 선지자들에게 돌린다. 거짓 예언자들이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만 전달하고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백성들이 그들의 죄에서 돌아서고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예언자들의 사명은 말씀을 지키는 파수꾼과 같은데, 그 사명을 못하여 결국 이스라엘은 망하게 된 것이다(겔 3:17~21).
그런데 이 멸망을 바라보며 조롱하며 박수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레미야애가 1:12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멸망을 본 증인들로 나타나는데 이들이 머리를 흔드는 행동과 꼴좋다는 말로 계속해서 조롱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 조롱은 원수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원수들은 입을 벌리고 비웃고 이를 간다. “입을 벌린다”는 것은 “험담하고 놀리는 것”을 의미하고, 이를 간다는 표현은 “비웃다”는 단어와 동일하고 통상 놀리면서 웃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원수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이들이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삼켰다고 의기양양해 한다.
하지만 “삼키다(발라)”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2:2과 5절 및 8절에서 예레미야가 여호와께 돌린 표현이었다. 즉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여호와의 심판이었고, 원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능력으로 점령한 것이었다. 이날에 원수들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며 즐거워한다.
17절은 원수가 이 일을 어떻게 말하든, 어떻게 보든지 상관 없이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계획과 명령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정하신 일과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은 같은 의미로 신명기 28장의 말씀이 전제가 된다. 즉, 이 모든 것은 원수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계획,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징벌이다. 하나님은 교회와 우리를 징벌하실 때 우리가 조롱하던 사회와 사람들을 통해서 하신다. 이들을 통해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철저하게 드러내신다.
3. 그럼에도 여호와께 부르짖어라!(18~22절)
예레미야는 딸 시온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요청한다. “짜아크(부르짖다)”는 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예레미야는 이 재앙의 근원이 여호와임을 알고 그 근원 되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요청한다. 그것도 밤낮으로 울면서 부르짖으라고 요청한다. “울음”은 회개를 상징하고, 계속해서 흘리는 눈물을 반복하여 언급하는 것은 계속된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멈추지 말고 회개의 기도를 하며 주의 자비하심을 구하라고 말한다.
예리미야가 이렇게 간곡하게 요청하는 것은 굶어 죽어가는 어린 자녀들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그들의 죄 때문에 죽어가더라도, 재앙 이후에 이스라엘을 재건할 희망인 어린 아기들은 살려야 한다. “주를 향하여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의미한다.
결국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빈손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 가장 유일한 해결책이다.
20절은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자신들을 돌봐달라고 요청한다. 20~22절의 언급은 신명기 28:53~57의 심판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라는 의문문은 그만큼 이스라엘을 단호하게 다루셨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에서 여러 부류의 죽음이 등장하는데, 어머니의 손에 죽는 아기들,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는 제사장과 선지자들, 길거리에서 칼에 죽은 늙은이, 젊은이, 청년들과 처녀들이다.
이들은 모두 “주의 날, 즉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부르신 적들로 인해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예레미야는 탄원하며 애곡한다. 시온의 자녀들을 지독한 심판에서 구원해달라고 요청한다.
나는?
-어떤 참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고난, 하나님의 심판은 단호하고 철저했다. 예루살렘에게 위로가 될 만큼 그들이 당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있는 재난은 없었다. 치유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곡식과 포도주”가 없어서 부모들은 자식들이 자기 품에서 굶어 죽는 것을 보는 비참한 고통을 겪었다.
-온 천하에 기쁨을 주고 복의 근원이 되며 온전한 영광이 되어야 할 성읍이 불의한 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성이 되게 하신 것이다. 원수들은 “우리가 그를 삼켰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옛적에 경고하신 대로 이루신 것뿐이다. 돈이 최고의 가치인 시대에 돈의 기갈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정말 부족한 것은 재물이나 육의 양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인 것이다. 우리 시대 애끓는 심정으로 슬퍼하고 통곡해야 할 것은 경제 위기가 아니라 경건의 위기이다.
-비교할 수 없는 참상의 원인은 묵시를 가린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예언자들의 거짓되고 헛된 환상이 하나님의 애끓는 경고가 담긴 말씀과 묵시를 가리고 말았다. 백성들의 죄를 덮고 말았다. 백성들도 자기 욕심을 자극하는 듣기 좋은 말만 찾아 다녔다. 그래서 환난이 임박해도 거짓 안전 속에 살았다.
-지금 한국교회가 어쩌면 이전 시대의 모습과 비교할 수 없는 참상을 직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은 그저 기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지 않아도, 죄를 미워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아도 구원을 보장해주는 거짓 복음, 값싼 복음을 진리인양 설파하는 거짓 목사들이 얼마나 넘쳐나는가! 그들의 거짓 기만에 정작 듣고 돌이켜야 할 회복과 회생의 기회가 속절없이 사라져 버리고 있다면, 이것이 진정한 영적 참상이 아니고 무엇일까!
-교회는 물론 나라의 부패와 타락의 배후도 성공과 번영을 빌어주고 죄의 삶을 합리화시켜 주는 변질된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회복의 기회를 가리고 있다.
-이와 같은 영적 참상의 절망속이라도 살 길은 있다. 그것도 오직 하나!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남녀노소, 제사장과 선지자, 백성 할 것 없이 주의 진노에서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고, 심지어 부모가 어린 자식을 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참극을 하나님께 상기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 참극을 원수가 아니라 “주께서” 하셨음을 인정한다. 즉,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멸을 결심하셨듯이(2:8), 회복도 결심해주시기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의 본심임을 믿었기 때문이다(3:33). 환난이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이제 살길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파멸의 결과를 슬퍼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파멸한 그 원인을 슬퍼해야 한다. 그러므로 눈물을 강처럼 흘리는 진실한 회개만이 살길인 것이다.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처참하게 버려질 때, 의지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최악의 순간에, 원수들의 조롱과 비아냥만 가득할 때,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듯한 순간에, 생명의 끈이 끊어지지 않아 더욱 절망스러울 때, 유일한 희망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다.
-참혹한 현실에서 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부르짖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변화의 가능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남은 것이 없는 비참함 속에서조차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이에게 새 일을 행하는 분이시다.
-이 참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기에 그 비극을 기꺼이 아뢰었다. 원수의 손에 빠진 자는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의 손에 빠진 자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은 찢으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애 3:32)”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 예루살렘 파괴는 돌발 사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었다(신 28:15~19). 원수들은 우리가 이겼다고 했지만, 예레미야는 이것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하신 일이라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자신들이 직면하는 곤경이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회개할 수 없다. 회개하지 않으면 회복은 시작되지 않는다.
*주님, 인생에서 예고된 참상을 직면할 때라도 오직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견뎌내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세상의 거짓된 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귀를 열겠습니다.
*주님, 비극의 내용을 고쳐달라고가 아니라 그것을 불러온 죄된 삶을 정리하겠습니다. 진실한 회개에서부터 주의 자비가 다시 임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