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은 예레미야애가에서 가장 길다. 1,2,4장이 히브리어 알파벳의 갯수에 따라 22절로 구성된 것과 달리 3장은 각 알파벳의 철자당 3행으로 구성되어 다른 장의 세 배 분량인 66절로 구성되어 있다. 3장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고난을 여러 가지로 묘사한 1~18절과 누군가 여호와께 이야기하는 19~39절, 우리끼리 하는 말인 40~41절, 우리가 여호와께 하는 말인 42~47절, 나의 탄식인 48~54절, 나의 기도인 55~66절로 분류된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분노의 매를 맞으며 하나님이 만드신 감옥에 갇혔다고 토로한다. 현재는 하나님이 도망갈 수 없게 길을 막으시며 자신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죽이려 하신다고 고백한다. 지금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복과 희망의 하나님이 아닌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1. 진노의 날에 나를 치신 여호와(1~6절)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분노의 매를 맞은 자가 자신이라고 한다(1절). 자신의 고난을 여호와의 진노의 막대기에 맞은 것이라고 고백한다. 사무엘하 7:14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들이 잘못하면 사람의 막대기로 치겠다고 선언하셨었다. 시편 89:32에서도 언급된다. 이 말씀이 모든 이스라엘에게 확대되어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2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빛이 아닌 어둠으로 인도하고 걷게 하셨다고 하는데, 이 “어둠”은 요엘 2:1~2에 나오는 심판 날의 어둠이다. 그 어둠으로 “이끌어(마치 짐승을 몰아가는 것처럼)” 가셨다고 토로한다. 일반적으로 여호와가 목자처럼 이스라엘을 푸른 초장이나 물이 많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여기지만, 심판의 날에는 반대로 어둠으로 인도하신다. 3절은 하나님께서 하루 종일 자신을 말처럼 이리저리 몰고 다니신다고 말한다. 이는 매우 거칠게 자신을 재앙으로 몰고 가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4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고 뼈를 꺾으셨다고 고백한다. “쇠하게 하다”는 2:2, 5절, 8절과 16절에서도 사용되었다. “뼈를 꺾다”를 직역하면 “뼈를 부서뜨리다”의 의미다. 역시 1:15과 2:9, 11절에서 예루살렘의 젊이들, 도성의 방비, 도성을 부수어 흩어버릴 때 사용하였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루살렘의 멸망에 사용된 단어를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의 고난과 자신을 연결하고 있다.
5절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에 담즙과 고통을 쌓으시고 둘러 놓으셨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에 완전히 포위 되었다는 뜻이다. 마치 예루살렘이 원수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것처럼 말이다. 6절은 이런 어둠 속에서 마치 오래전부터 죽은 자처럼 살아가고 있음을 토로한다. 예레미야는 현재 자신의 삶을 무덤에 있는 시체와도 같다고 한다. 자신은 살아도 산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2. 나의 길을 막으신 여호와(7~9절)
길을 막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어둠에서 빠져나가려고 해도 하나님이 내 주위에 담을 쌓아놓으셨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고백한다. 또한 자신의 쇠사슬을 무겁게 하셨다고 한다(7절).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간절히 외친다. 하지만 여호와는 듣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유기하신 것이다. 하나님 백성에게는 가장 혹독한 심판이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길에 담을 쌓고 길을 굽게 하고 재앙에서 도망갈 수 없게 만드셨다고 고백한다. 탈출구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현재의 상황이 유일한 도움이신 하나님조차 외면하고 있는 상황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3. 모든 소망이 끊어졌다!(10~18절)
더욱 고난이 강화되는데, 10절에서는 하나님을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곰과 사자로 표현한다. “나를 적막하게 하셨다”는 표현은 “나를 황폐하게 두셨다”는 의미다. 이는 각각 예루살렘의 문, 예루살렘 성, 예루살렘의 자녀를 묘사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과 예루살렘 도성을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다.
12~13절에서 하나님은 사냥꾼의 모습으로 등장하신다. 자신을 과녘 삼아 화살을 날리신다고 한다. 이미 2:4에서 원수같은 이스라엘을 향해 활을 당기는 모습이 나왔다. 하나님이 자신을 겨누고 화살을 쏴서 자신의 허리를 맞추셨다고 한다. “허리”로 번역된 단어는 직역하면 “콩팥”이다. 이스라엘의 세계관에서 콩팥은 신체 중에서 가장 예민하고 생기가 넘치는 장기로 인식했다. 즉, 콩팥을 화살로 맞추었다는 것은 생명을 취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14~18절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탄식하는 부분이다. 백성들 사이에서 노래와 조롱거리가 된 자신을(14절) 탄식한다. 예레미야는 다양한 방법으로 백성들로부터 조롱을 받는다. 그는 유다 공동체로부터 구별되며 공동체 안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15절은 하나님이 자신을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다고 한다. 곡식과 포도주가 없는 궁핍한 상황을 비꼰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먹는 것과 조약돌로 예레미야의 이를 꺾으시고 재로 덮으셨다(16절). 조약돌로 자신의 이를 꺾는다는 표현은 쓴 것도 먹지 못하게 자신의 이를 돌로 부숴버리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말의 희망도 남기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짓밟으셨다고 토로하는 것이다.
17~18절에는 평강, 복, 소망이라는 희망적인 단어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단어들의 사용은 역설적으로 희망이 전부 사라졌다는 슬픈 현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주님이 자신의 심령을 평강에서 떼어놓았고 좋은 모든 것을 잊게 하셨다고 고백한다(17절). 언제 좋은 일이 있었는지 잊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평강과 행복은 모두 자신의 율법에 순종하는 백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버린 백성들은 결코 평강과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이와같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힘(명성) 뿐 아니라 여호와를 향한 소망이 모두 끊어졌다고 고백한다.
예레미야는 죽음에 이를 만큼의 고통과 재앙을 당하는 의인이다. 동시에 공동체로부터 조롱당하는 의이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선한 인물이었으나 공동체가 받는 고난을 함께 받는다.
나는?
-자기 백성의 원수가 되신 하나님이시다. 한때는 막대기(매)로 보호해주셨던 ‘나의 목자’가 이젠 종일토록 그 막대기로 치시는 나의 원수가 되셨다. 전인격이 요동하고 더 이상 버틸 힘이 소진되고 살 소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영적, 육체적인 노쇠와 고통으로 이어졌다. 살았으나 죽은 자 같아다. 하지만 진멸의 칼로 내리치지는 않으셨으니 다시 일어설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자기 백성의 사냥꾼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유로이 나갈 수 없는 고통을 토로한다. 주의 간절한 호소를 외면하니 주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신 것이다. 하나님은 먹잇감을 노리는 곰과 사자가 되어 자기 백성을 갈기갈기 찢으시고 사냥꾼이 되어 고난당하는 백성의 허리(급소, 콩팥)를 향해 가차 없이 활시위를 당기셨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가는 길이 명목상 신앙의 길이고 경건의 모양만 있는 거짓의 길이며 주의 음성에 무관심한 욕망의 길이라면, 그 길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야수와 궁사의 모습일 것이다. 깨닫고 부르짖어도 너무 늦을 때가 오기 전에 주님께서 내미는 손 맞잡고 주신 음성에 청종해야 한다. 인생길이 막혀 고생하고 평탄한 신작로를 걷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만은 막히지 않게 해야 한다.
-백성들에게 조롱당하는 선지자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뿐 아니라 백성에게도 조롱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겼으나 쓰디쓴 배신과 조롱으로 돌려받은 것이다. 백성들은 돌아오기에는, 깨닫기에는 아직도 덜 아프기만 한 것이다. 선지자의 말이 들리 만큼 귀가 열리지 않은 것이다.
*예레미야의 서글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예루살렘 성의 고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도 백성들도 자신을 향하여 대적이 되거나 조롱하고 있다. 모두에게 외면받고 조롱당하는 그 서글픔이란 참 거시기하다. 사람에게 버림받는 고통도 크지만,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더 크다. 그 고통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말하고 기도한다.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끝까지 기도하신 예수님이 떠올린다. 나의 죄 때문에 드린 겟세메네 기도가 곧 예레미야의 기도와 통한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모든 길이 막혀 버렸다. 사슬에 매여 꼼짝 못하게 되고, 그거에 기도까지 물리치신다. 다른 샛길을 찾아 보았으나 그 길마저 봉쇄해 버리신다. *인생의 길이 막혀 고생하더라도 죄악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막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을 끈질기게 거역하는 유다가 멸망의 날에 경험하는 하나님은 맹수, 원수이다. 목자되신 여호와가 원수가 되셨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막대기로 보살피시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는 이에게는 막대기로 다스리신다. 나는 목자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의지하여 그의 막대기가 나를 보호하는 든든한 은혜안에 거하리라.
*여호와의 분노를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 절망적인 것인지 기록된 슬픈 노래를 통해 내 마음에 각인되기를 바란다. 무모하게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키는 삶을 도전하지 않도록 말이다. 살다보면 무지중에 얼마나 많은 무모한 도전을 하는지 모른다. 무모한 도전의 열매가 하나님의 분노임을 알고도 가는 어리석음이 나를 이끌지 않기를 바란다.
*주님, 예루살렘을 향해 진노의 막대기를 드시고 화살을 날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 모습 기억하여 저 지경이 되지 않도록 늘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주님, 예레미야의 고통과 슬픔은 단지 예루살렘 성의 멸망만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이 조롱하고 하나님도 원수가 되시고 화살을 날리시는 것을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평생 주님을 바라보고 쫓아온 인생이었지만, 심판과 멸망의 순간에는 시선을 거두시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지금 여기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며 그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