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교만과 위선, 심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호 5:1-15]
 – 2024년 11월 24일
– 2024년 11월 24일 –
5장은 4장이 다룬 이스라엘의 범죄 사실들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초점은 종교 지도자들과 왕족, 귀족들의 잘못으로 나라 전체가 파탄에 이르고 음란한 영에 사로잡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지식의 결핍 상태를 강조한다.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들에 대한 질타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 신탁으로 이어진다.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을 넘어 정치와 사회 전반의 영역까지 확대되고 만다. 즉, 제의에서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에서도 여호와는 완전히 뒷전으로 쫓겨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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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부터 6장 6절까지의 예언은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주전 734~732년) 전후에 선포된 말씀하신 내용들이다. 열왕기하 16:5~9에 의하면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위협하고 침략하자,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에 의존하여 군사적 위기를 벗어난다. 아하스의 조공과 예물을 받은 앗수르 디글랏 벨레셀 왕은 주전 733년 원정에 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사마리아와 에브라임 산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빼앗아 앗수르의 지방으로 편입시킨다(왕하 15:29). 에브라임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겨우 목숨만 구한다. 끝까지 항전한 아람 왕 르신은 앗수르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다메섹은 폐허가 된다.
    
이런 상황의 이스라엘 종교-정치지도자들은 부패한 무능력자들이었다. 사냥꾼이 올라와 그물로 짐승을 잡듯이 공공연하게 불의와 폭력으로 백성을 억압했다. 지도자들에 의해 바른길로 인도받지 못한 백성은 우상숭배의 음행에 빠져 사생아를 낳는다. 이스라엘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어느 곳도 예외 없이 죽을병에 걸렸다.
    
    
    
1. 이스라엘을 떠나신 여호와(1~7절)
1~4절은 정치-종교 지도자들의 악행과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의 타락을 고발한다. 이스라엘의 종교와 사회와 정치를 책임진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족속들과 왕족들이 여호와의 고발에 넘겨진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짐승을 잡듯 백성을 잡는 패역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다. 지도자들이 부패했는데 백성이 깨끗할 수 없다(3~4절).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다 알고 계시기에 이스라엘은 자신의 음행과 더러움을 감추거나 변명할 수 없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에 에브라임은 자신의 음행을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여호와는 에브라임의 음행을 아신다. 에브라임의 형편이 절망적인 이유는 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풍요 제의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성전과 산당을 찾아가서 바알을 숭배하듯이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우상숭배에 불과한 자신들의 제의적 경건에 만족해하기에, 되돌아볼 동기나 필요가 생기지 않는다. 한마디로 에브라임은 죄의 종이 되고 만 것이다.
    
5~7절은 이스라엘을 떠나시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신다. 5절의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다”라는 문장은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들 자신을 증거 하나니”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음행으로 더러워졌다는 하나님의 고발에(3절) 이스라엘은 무죄를 주장하지만, 얼굴에 쓰인 이들의 교만이 유죄를 증거한다. 음행의 증거가 너무도 분명하기에 다른 증인이 필요 없다. 음행의 더러움을 인정하지 않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와 무감각을 가리킨다.
    
결국 이스라엘은 교만의 죄악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한편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라는 죄악에 있어 유다도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기에 성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지만 호세아는 “여호와를 앎”과 “성소를 찾음”을 구별하고 있다. 성전이나 산당을 찾아가는 제의적 경건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도 가능하다. 누구나 제의 규정에 따라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성전을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성전을 찾아가는 자 모두 여호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를 아는 자만 그분을 만날 수 있다. 음행으로 더러워진 자들에게 하나님은 멀리 떠나신 분이다(6절).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7절).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는 말은 “그 기업”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각 씨족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신 땅을. “새 날”이 초하룻날의 축제를 가리킨다면, 새 달에 즐겁게 축제 음식을 먹었던 이스라엘이 이제 그 기업과 함께 새 달의 먹이가 된다고 선포한다.
    
    
    
2. 에브라임과 유다에 대한 징벌(8~15절)
8~11절은 정조를 버리고 사생아를 낳은 에브라임에 선포된 심판이 이제 현실화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뿔 나팔을 불라는(8절) 목적이 유다의 공격에 대비하여 성안으로 피하라는 신호인지, 기브아와 라마 사람들에게 함께 에브라임을 치러 전쟁에 나가자는 외침인지 특정할 수 없다. 둘 다 가능하다. 하지만 언급된 지명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산지로 난 간선도로를 따라 북 왕국의 중심부인 에브라임 산지로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정조를 버리고 사생아를 낳은 에브라임에 선포된 심판이 현실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묘사에 따르면 유다가 예루살렘 북쪽의 베냐민 땅을 넘어 진격해 올라가고, 에브라임은 기브아와 라마를 빼앗기고 후퇴한다. 에브라임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에 있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국가 성소 벧엘(벧아웬)에서도 전쟁의 경고음이 발한다. 여호와께서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라 다메섹과 함께 유다를 공격한 에브라임을 폐허로 만드신다. 하지만 이런 상황속 에브라임의 황폐함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징벌임을 간과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아람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한 에브라임을 징계하시기로 하셨으나 그렇다고 앗수르의 침략으로 야기된 북 왕국의 군사적 위기를 이용해 국경을 넘은 유다의 침략은 정당화될 수 없었다(10절). 정치적 이유에서 형제를 침략한 에브라임이나 유다나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본문의 유다는 사생아를 낳은 에브라임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이자, 동시에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을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경계표를 옮기는 자(10절)”는 에브라임의 땅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하려는 유다의 정치가들을 가리킨다. 신명기의 율법은 땅의 경계를 임의로 바꾸지 못하게 엄히 금한다(신 19:14). 그러므로 유다가 앗수르와 연합하여 에브라임을 치러 올라가는 것은 언약법을 위반한 것에 해당한다.
    
11절의 원문을 다른 번역본에서는 “에브라임은 억압당하고 심판을 받아 짓밟혔다. 그가 헛된 것을 애써 좇았기 때문이다(ESV; NIV; NRS). 에브라임을 벌하는 날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의 절망적인 처지를 탄식하신다. 불법과 폭력이 심판에 떨어진 에브라임을 지배하고 사람들은 억압당한다. 이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의 파국적인 결과가 가져온 비극이다. 한편 북이스라엘의 남쪽 국경지대로 침략 경로가 제한된 유다와 달리 앗수르의 침략은 전면적이었다. 에브라임은 앗수르에 항복하여 겨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전쟁의 패배는 치명적이었다. 에브라임 산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겼고, 사회는 통제할 수 없는 무질서에 빠지고 만다. 에브라임의 길은 헛된 것을 좇다가 헛것이 된 에브라임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고발한다. “헛된 것”은 우상이나 이방 정치세력을 가리킨다.
    
12~15절에서는 에브라임과 유다에 대한 위협의 말씀이 등장한다. 먼저 여호와는 음행과 불순종의 에브라임에게 “좀”처럼 유다에게는 “썩이는 것”처럼 여김을 받는다(12~13절). 옷을 해어지게 해서 못쓰게 만드는 “좀”은 구약성경에서 언제나 멸망이나 덧없음과 관련된 부정적 문맥에 등장한다(욥 4:19; 시 39:11; 사 50:9). “썩이는 것”은 뼈를 곪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욥 13:28; 잠 12:4; 합 3:16). 좀과 썩이는 것이 조금씩 속에서 진행되다가 결국에는 옷을 못 쓰게 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에브라임과 유다에 보내신 질병도 그러하다.
    
옷을 상하게 하는 좀은 외적인 파괴를, 뼈를 썩게 하는 상처는 내부 부패를 함축하는 듯하다. 에브라임과 유다는 너무 늦지 않게 자신의 병과 곪은 상처를 인식하지만, 그 원인을 찾는 데는 실패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전쟁의 재앙이 언약 파기에 따른 여호와의 징계로 생긴 병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병의 원인을 군사적 열세에서 찾는다.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에브라임과 유다는 의사인 여호와를 찾지 않고 “헛된 것”인 앗수르에게 병의 치료를 맡긴다. 하지만 앗수르가 이들의 좀과 썩는 것을 해결할 수 없다. 에브라임과 유다의 병은 여호와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한낱 앗수르가 이것을 고칠 수 없다. 여호와께서는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아 공격하듯이 에브라임과 유다를 무섭고 난폭하게 공격하실 것이다.
    
한편 “좀과 썩이는 것”의 비유가 심판의 점진성을 보여준다면, “사자와 젊은 사자”의 비유는(14절) 심판의 단호함과 철저성을 강조한다. 심판에 떨어진 이스라엘에게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15절).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당신의 얼굴을 찾을 때까지 당신 처소로 돌아가 기다리신다.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라는 단절과 징계를 의미하지만,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는 단절과 징계가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 아님을 보여준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벌을 받고 고난 중에 있을 때 자기를 간절히 찾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가증스러운 제사를 거부하고 지도자의 악행을 꾸짖으신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들의 교만을 지적하며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이스라엘에 만연한 우상숭배를 주도한 자들은 놀랍게도 제사장과 왕족들이었다. 영적인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올무를 놓고 그물을 치는 사냥꾼들처럼 악의 선봉에 섰다. “들으라”, “깨달으라”, “귀를 기울이라” 힘주어 말씀하실 만큼 그들은 완악하고 무지했다. 고집불통이었다. 음란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돌아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에브라임은 돌아가지 못할 만큼 이미 멀리 가버렸다.
    
-지도자들에게 심판의 긴박성을 애타게 알리시는 하나님이시다(1~2절). 하지만 거듭 주의를 환기 시켜야 할 만큼 그들의 안일한 시대인식과 영적인 방종은 심각했다. 영적인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할 그들이 권력과 이방의 우상 문화에 젖어 백성의 성결과 하나님의 뜻에 무심하다. 이 땅의 정치와 종교와 법을 책임진 이들이 위임받은 권한을 남용하지 않고 백성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위임한 권한이 잘 행사되고 있는지 책임 있게 살펴볼 일이다.
    
-음란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은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죄에서 돌이킬 수 없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다. 회개하는 마음 없이 나아와 제의 규정만 지키면서도 무죄와 사죄를 주장할 만큼 뻔뻔하다. 혹시 우리가 우상과 하나님을 같이 섬기면서 거짓 안전에 취해 있지는 않는가? 내 삶에 의와 진실을 회복하지 않는 한 예배와 묵상은 언제든지 나를 감추는 외식의 도구가 될 뿐이다.
    
-하나님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와서 제사한다 해도 이를 외면하고 이스라엘을 떠나실 날이 올 것이다. 정조를 지키지 않고 주를 떠나 사생아를 낳은 이스라엘 축제의 날이 심판 날이 되게 하실 것이다. 진실로 돌아오기까지 무엇을 바친들 열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떠나실 만큼 너무 멀리 가버렸다.
    
-에브라임의 변절도, 유다의 야욕도 모두 심판하신다(6~11절). 정조를 버리고 주를 떠나 사생아(죄의 열매)를 낳은 에브라임을 떠나신다. 그래도 여전히 헛된 것(우상과 앗수르) 을 쫓아가는 그들의 절망적인 상태에 탄식하신다. 그럴 뿐만 아니라 북 왕국의 위기를 틈타 영토를 확장하려는 유다의 탐욕도 좌시하지 않으신다. 자신의 이익이라면 형제도, 언약도, 하나님도 비정하게 버린 허망한 욕망은 재앙과 불행의 단초가 될 것이다.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고 부끄러운 길에 서 있다면 속히 떠나야 한다.
    
-유다와 앗수르 동맹군이 베냐민 지역을 침공하도록 허락하신다. 이로써 음란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그래도 에브라임(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하고 “허무한 것(사람의 명령)”을 의지하면 학대와 압제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제의의 자리에서 간절히 부르짖고 찾아도 이스라엘이 죄를 뉘우칠 때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과 고난을 통해 에브라임이 다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하실 것이다. 에브라임은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나님에게서 멀리 가버렸다.
    
-때로는 썩게 하는 “좀”처럼 혹독하게 벌하시고, 때로는 “성난 사자”처럼 그들의 죄에 분노하신다(12~15절). 그러나 죄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신다. 그런데 자신의 중병을 깨닫고도 에브라임과 유다는 돌아오기를 거부하고 아람, 앗수르에게 치료를 맡긴다. 죄로 인한 고난의 무게가 아무리 힘겹더라도 내 마음이 주께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직은 엄살일 뿐이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스스로 다시 돌아올 여지를 두신다.
    
-하나님을 떠나게 한 죄악은 지도자들이 주도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역사와 언약을 말하지 않았고 지도자들은 무고한 백성을 짐승 잡듯 잡았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으니, 자신들이 음행을 자행하고도 당당했고 떳떳했다. 이미 음란은 삶의 일부가 되었기에 불편하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풍성한 제사로 풍성한 죄악을 스스럼없이 가렸다. 성전을 자주 찾아 많은 제물을 드린 것과 하나님을 알고 찾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몰랐다. 그 무지와 무감각은 교만을 불러왔고, 그 교만이 성찰과 반성의 기회를 앗아갔다. 정조를 지키지 않고 사생아를 낳았으며, 아무리 당당하게 할 일 다 했다고 말해도 그 얼굴은 그들의 교만을 증거한다. 아…. 이런 모습의 지도자는 되지 않아야 하는데…. 그저 마음이 무겁기만 한 아침이다.
    
    
    
*주님, 죄에 대하여 더 무감각해지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죄에서 돌이키겠습니다.
*주님, 죄악이 가득한 삶은 하나님이 좀이 되고 썩이는 것이 되어,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아 공격하듯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을 깨닫습니다. 이 참담한 지경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만을 굳게 붙잡겠습니다.
*주님,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멀리 가신 하나님께서 다시 하나님 구하면 언제든 즉시로 자기 자녀들을 향해 돌아오실 채비를 마치고 기다리시는 사랑을 봅니다. 그 사랑이 오늘 나를 붙잡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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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기는 표제(1절)가 말해주듯 여호와의 ‘신탁’이다. 말라기에 “여호와가 말씀하셨다”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메시지는 바벨론에서 돌아와 유다 지역에 거주한 포로 후기 공동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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