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두 개념이 6장에서 소개된다. 먼저 하나님께 “돌아간다(2:7; 3:5; 5:4; 7:10, 16; 11:5; 12:6; 14:1~2)”라는 개념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6장은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예언자의 호소와 함께 하나님의 직접적인 질책과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확실성을 통보한다. 삶의 방향성을 되돌리고 재설정하는 것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중요성은 언약과 관계성의 문제이기에 분리할 수 없다. 또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기 위한 열정적인 추구를(3절)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 짓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하나님은 그들을 도울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제사일까? 번제일까? 제의적 모임일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지, 제의적 경건이 아니다. “여호와께 돌아감”은 입술의 구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외치지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기에 본질적으로 바뀐 것이 없다. 돌아가겠다고는 하지만 인애가 없기는 이전과 똑같다. 돌아감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어질 때만 죄악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돌아오기는 기다리시는(5:15)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힘써 알자”라고 권유하지만, 그들의 회개에 진정성이 없다. 달라지지 않는 그들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
1. 에브라임의 진정성 없는 회개(1~3절)
본문은 5장에서 멀리 떠나가신 하나님의 부재에 직면한 에브라임의 반응이다. 여호와께서 구원자를 찾아 앗수르로 내려가는 에브라임을 사자처럼 찢고 당신의 처소로 돌아가시자 이스라엘이 구원을 바라고 여호와께로 돌아온다. 정치적으로 앗수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5:13)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께 시선을 돌린다. 이들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그분께서 고쳐주실 것을 확신한다.
이들의 골아감은 확신에 찬 신뢰의 고백처럼 들리지만, 문맥에 따라 살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핍된 피상적인 고백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돌아오는 유일한 목적은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돌아가기만 하면 여호와께서 무조건 치료해 병을 치료해 주시리라 믿는다. 현재의 환난이 여호와에게서 왔음은 인정하지만, 이스라엘의 의사이신 여호와께서 왜 “좀과 썩이는 것”이 되셨는지(5:12)에는 관심조차 없다. 즉, 이들의 돌아옴에는 죄와 고난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나 이해가 빠져있다. 여호와께서는 고난 중에 자신을 간절히 구하기를 기대하시지만(5:15), 이들은 여전히 제의적인 언어로 여호와를 찾고 있다.
“이틀 후”와 “셋째 날”은 아주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사자에 찢긴 양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에도, 에브라임은 여호와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구원이 주어지리라 생각한다. “돌아감”이 치료와 구원으로 결정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이에 상응해서 자기 처소로 돌아가신 여호와께서도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실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매우 충격적이게도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그 자체만으로 흠이 없는 완벽한 고백이지만, 여호와의 주권과 상관없는 고백이다. 구원에 있어 돌아가기로 한 에브라임이 주체가 되고 여호와는 객체가 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호세아가 지적한 것처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었기에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바알처럼 이해한 듯하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호와께로 돌아갈 수 없었던(5:4) 이스라엘이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그분을 알자고 서로 권면한다. 호세아의 고발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라는 에브라임의 고백은 여호와를 바알과 같이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활동을 순환적인 자연현상에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떠나가심(심판)과 돌아오심(구원)을 주기적인 자연현상처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에게 여호와는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러 오시는 존재일 뿐이다. 그들이 여호와께 바라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이 숭배하는 바알에게 바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4~6절)
자신들이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자신감 넘치는 고백은 여호와를 깊이 탄식하게 한다.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의 심각성과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형식적이고 제의적인 경건으로 반응하며 돌아오겠다고 고백하는 것에 여호와는 절망에 빠진다. 이들의 돌아옴은 철저한 회개와 지속성이 빠져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에브라임이 생각하는 ‘인애’는 아침 구름 같고, 곧 사라져 버리는 이슬 같다고 지적하신다(4절). “아침 구름”과 “이슬”은 3절에서 여호와의 구원이 어둠을 뚫고 나타나는 새벽빛처럼 확실하고, 때를 따라 내리는 비처럼 축복을 가져다준다는 고백에 대한 반박이다. 즉, 에브라임이 여호와의 인애라고 여기는 것은 새벽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곧 사라져 버리는 아침 구름이나 이슬에 불과하고 답변하신 것이다. 에브라임과 유다의 인애가 이런 것이라면 이들의 운명도 “아침 구름같이, 쉬 사라지는 이슬같이” 허무하게 끝날 것이다(13:3).
인애가 없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심판은 단호하다.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라는 표현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는 자들에게 그들이 인식하는 여호와의 빛은 심판을 의미할 뿐임을 드러낸다. 여호와의 빛은 아침 구름과 이슬에 불과한 이스라엘 인애의 실체를 폭로하고, 이들의 위선과 거짓을 심판하신다. 이스라엘은 열심히 제사와 번제를 드렸다고 강변할 수 있겠지만, 이는 이들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인애(변함없는 사랑_새번역)가 없는 자들의 제사는 참석하는 자들만의 축제에 불과하다. 여호와께서 우선으로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사와 번제로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체할 수 없다. *인애(헤세드)는 언약에 근거한 개념으로 하나님께 대해 전적인 신뢰와 성실함으로, 이웃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연대성(사랑)으로 나타난다. 즉, 일상에서 내가 속한 사회적 공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성실하게 준수하며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3. 그러나 에브라임은(구체적인 에브라임의 죄를 고발하다_7~11절)
6:7~7:16은 이스라엘의 불성실한 회개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고발들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반역”을 아담의 불순종에 비교하여 고발하신다. 아담이 언약을 어긴 것처럼 “그들”도 언약을 어기고 여호와께 신의 없이 행동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창 2:17)을 어기고 반역하였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탄에 빠뜨렸듯이 에브라임도(그들도)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언약을 파기하였다(7절).
두 번째 고발은 길르앗의 악행이다(8절). 길르앗은 피 묻은 발자국으로 가득 찬, 악을 행하는 자들의 고을이다. “악을 행하는 자”는 불의와 불법을 범해 공동체에 재앙을 가져오는 자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표현이다. 본문을 제외하고 다른 본문에서는 거의 요단 동편 지역을 가리키는 지방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피 (묻은) 발자국”은 사회정치적 불의와 폭력을 가리킨다. 에브라임은 불의함과 폭력이 가득 찬 사회였다.
세 번째 고발은 제사장들의 사악함이다(9절). 강도가 길가에 숨어서 약탈할 대상을 기다리듯이 제사장 무리가 세겜으로 가는 길목에 진을 치고 살인한다. “사악(지마)”으로 번역된 단어는 특히 근친상간의 수치스러운 악행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제사장들의 살인 행위를 파렴치한 근친상간의 성적인 이탈로 고발하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 전체가 음행으로 더럽혀졌다(10~11절)고 고발한다. “가증한 일(10절)”은 우상숭배나(렘 18:13) 하나님께 속한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그분께 거슬러 범하는 악행을(렘 5:30; 23:14), “음행”은 가나안의 풍요 제의를(4:4~5:7) 가리킨다.
에브라임의 음행을 고발한 다음, 갑자기 유다에 대한 심판을 선포한다(11절). 유다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이한 표현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 유다가 심판을 받는다.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추측하자면 유다도 에브라임처럼 심판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피력하는 듯하다.
나는?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5:15)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외치지만 그들의 외침에는 회개의 진정성을 볼 수가 없다. 달라지지 않는 그들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 외치기만 하고 삶의 변화는 없다.
-이스라엘은 언제든 돌아가기만 하면 치유되고 하나님이 “지체 없이”, “어김없이” 응답해 주실 것을 믿었다. 그들이 간절히 바란 것은 참회보다는 “빠른(이틀 후에) 회복”이었고, 하나님보다 “풍요(비, 땅)”였다(1~3절). 고백은 진지했을지 모르지만, 바알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신앙일 뿐이었다. 변화 없는 간청이 얄미운 법이다. 나 자신의 변화 없이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뜻을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나도 역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닌 내가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회개가 아니라 회개 공식을 믿은 것이다. 언제라도 돌아가면 치유될 것이고 저녁이 가면 아침이 오듯, 때가 되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듯, 자동으로 하나님의 용서도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을 몰라도 진정 몰랐고, 자신의 병이 얼마나 중한지도 몰랐다. 무지하면 무식한 행동도 지혜롭게 여겨지는 법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포장된 회개에 넘어가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이 고백하는 인애가 쉬 사라지는 아침 구름과 이슬처럼 얼마나 공허한지 드러내신다(4~5절). 진실함도 없고 꾸준함도 없는 이스라엘의 인애에 실망하신다. 위기 때만 도와달라고 하는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책망하시고 회개의 진정성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회개의 열매”와 함께 드리는 나의 진실한 고백이다.
-이스라엘의 고백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들의 인애는 아침 햇살에 곧 사라지는 구름이나 이슬에 불과했다. 이는 그들의 운명도 아침 구름 같이, 쉬 사라지는 이슬같이 허무하게 끝날 것이고, 빛처럼 속히 임할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고백은 쉽다. 하지만 고백에 걸맞은 삶은 어렵고 성품은 오랜 시간 동안 빚어져야 한다. 내가 고백하는 소리에 내 마음이 속으면 안 된다. 삶이 나의 고백을 증명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인애를,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6절). “인애(헤세드_변함없는 사랑) “없이 언약은 유지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앎”이 없는 예배는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 화려한 예배 형식만으로 하나님과 생생한 만남을 대체할 수 없고, 교리적인 순결과 충성으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대체할 수 없다. 규모와 활동을 자랑하기 전에, 하나님과 끊어진 영적 교제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
-이스라엘은 제사와 번제로 하나님의 생동감 있는 교재를 대체해 버렸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성전 안에 유폐시켰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이고 경험적인 앎이 없는 그들의 경배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바알을 숭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주님과 살아있는 만남이 없다면 참 신앙도 없다.
-이스라엘의 악행은 그들의 회개와 신앙이 얼마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지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지도자들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의 언약 위반과 악행을 고발하며 심판을 선고하신다(7~11절). 생명의 장소인 도피성은 행악의 성읍이 되고, 세속적인 욕망에 잠식된 제사장들은 살인도 서슴지 않을 만큼 사악했다. 이렇게 언약을 어기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지도자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 앞에 인애와 진리와 정의를 포기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내게 익숙한 고백만으로 행함이 없는 삶을 가릴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구호에 묻힌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진리를 끝까지 붙잡아 살아내는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내가 원하는 것을 조급하게 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늘 묻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