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이스라엘은 왕과 관리들도 총체적으로 부패했다. 그로 인한 혼란은 정치의 영역에 여호와가 사라지고 오직 권모술수와 모반만이 반복된다. 정치지도자들은 권력에 눈먼 자들로, 이스라엘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파적인 이기심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나라가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급격히 빠진다. 정권 탈취에만 광분할 뿐, 누구도 여호와의 의지와 뜻을 구하지 않는다. 이런 국내 정치의 부패와 혼란은 대외정치에 그대로 반영된다.
호세아는 왕과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왕권찬탈에만 몰두하며 이를 위해 주변 제국의 도움과 인준을 받아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고발한다. 심지어 신앙적인 문제도 하나님이 아닌 제국의 도움을 구하고, 바알 제의에 더욱 심취한다. 이와 같은 실상은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죽고 이후 30년 동안 여섯 명의 왕을 폭력으로 교체한 왕권 찬탈전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스라엘은 “달궈진 화덕”처럼 모반이 끊이지 않고,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제국과의 동맹에 매달린다. 그리고 “속이는 활”처럼 또다시 하나님을 외면한다. 이를 어찌할까?
1. 에브라임의 모든 악을 기억하시는 하나님(1~2절)
1절은 6:11 유다에 대한 심판 경고에 이어 다시 이스라엘의 죄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료하려고 애쓰실수록 이스라엘의 병은 더 악화한다. 여호와께서 치료하려 하실 때마다 되려 에브라임과 사마리아의 죄악이 드러났다고 하신다(1절). 이스라엘은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기에 여호와께서 치료해 주시는 것도 알지 못한다(11:3). 그들은 거짓을 행하고 집안에 들어가 도둑질하고, 거리에서는 떼를 지어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든 악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그 죄를 간과하실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에 그들의 죄가 그들을 삼켰고,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있다고 선언한다(2절). 범죄도 문제지만, 죄에 대한 인식이 더 중요한 문제인데, 이스라엘은 모든 죄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조차 못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무뎌진 감각의 심각성을 질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모든 악을 여호와께서 기억하고 계심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제의를 행할 때는 여호와를 찾지만, 성전을 벗어나면 이내 그들의 마음에서 여호와가 사라진다. 이웃에게 악을 범하고 성전에 찾아와 용서함을 받고, 다시 이웃에게 가서 악을 범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2. 음모를 의지하는 사마리아 왕궁(3~7절)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대한 악행을 네 개의 은유로 표현한다. “화덕(3~7절), 전병, 비둘기, 활(11~16절)”이다. 본문은 호세아가 화덕에 빵을 굽는 과정을 활용하여(4, 6, 7절) 사마리아 왕궁에서 거듭 발생한 정치적 혼란과 음모를 고발한다. 왕궁에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 온갖 악과 거짓과 간음만 가득하다. 지도자들의 탐욕은 극한 투쟁을 야기하고, 이에 사로잡힌 자들은 음모와 배신을 일삼으며 나라를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뜨린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끄는 사마리아의 죄악에 절망하시며 탄식하신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여로보암 2세 사후 30년 동안 벌어진 지속적인 반역 사건이다. 북이스라엘은 주전 747년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마지막 왕 호세아(주전 731~723)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대략 십육 년 사이에 다섯 명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 가운데 네 명이 암살을 당하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경험한다. 이와 같은 사마리아의 반복된 정변을 “화덕에 빵을 굽는 비유”를 통해 고발한 것이다.
불을 지펴 뜨겁게 달궈진 화덕이 빵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음모자들의 욕망 불꽃이 파괴의 불이 되어 재판장들을 집어삼킨다. “재판장들”은 왕을 도와 통치하는 고위 관료들을 뜻한다. 거듭된 정변으로 기존의 왕과 그 측근들이 제거되고 새로운 왕과 지배계층이 등장하나, 그들 중 아무도 여호와의 의지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았다.
3. 에브라임의 교만과 어리석음(8~12절)
에브라임이 화독에서 뒤집히지 않은 전병에 비유된다(8절). 뒤집히지 않으면 덜 익거나 한쪽만 까맣게 타버려 먹을 수 없기에 버릴 수밖에 없다. 이는 에브라임이 쓸모없이 되어버렸음을 의미하는 비유다. 또, 에브라임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민족들 가운데에 혼합된 상태를 가리킨다. 곡식 가루에 기름을 넣어 만든 과자나 전병에서 다시 가루와 기름을 분리해 낼 수 없는 것처럼, 에브라임은 민족들과 완전히 뒤섞여 차이가 없어진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격과 지위를 포기하고 정치적 생존을 위해 여호와의 인도와 보호를 거절하고 이방 민족들과 연합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뒤집지 않은 전병”의 운명일 뿐이다. 위에서 보기에 멀쩡하나, 밑면은 까맣게 타버린 전병과 같아 쓸모가 없다. 에브라임은 이렇게 치명적인 위험에 빠져들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
뒤집기, 즉 멸망에서 구할 수 있는 길은 유일한 분이신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거절한다. 불에 탄 전병이 버려지는 것처럼, 여호와를 버린 에브라임도 버려진다.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먹어 치우지만 에브라임은 깨닫지 못한다. “이방인(자림)”으로 표현된 단어는 외국인, 혹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실존적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모든 이질적인 요소를 가리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방인들”은 아람과 앗수르와 애굽을 가리킨다.
민족들과 섞여 살기를 선택한 에브라임은 이방의 요소들이 제힘을 먹어 치워도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벌써 흰머리가 자랐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 민족들이 다 집어삼켜 그 힘이 거의 고갈됐는데도 자기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교만에 사로잡혔기에 여호와께로 돌아가지도, 여호와를 찾지도 않는다.
11~12절은 에브라임이 어떻게 “뒤집지 않은 전병”이 되었는지를 “어리석은 비둘기”에 빗대어 설명한다. 여호와를 떠난 에브라임은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비둘기 같아서 애굽과 앗수르에 양다리를 걸치고 맹목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줏대 없는 정치를 했다. 여호와를 부르지 않고(7절), 애굽을 부르고,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고(10절) 앗수르로 가버린다. 에브라임은 자신의 운명을 신뢰할 수 없는 기회주의적 외교정책에 맡긴 것이다. 이런 지각없는 처신이 에브라임을 ‘뒤집지 않은 전병’으로 만들었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비둘기 같은 에브라임에게 맞서 여호와께서 새 사냥꾼이 되셨다. 여호와께서 앗수르와 애굽을 찾아가는 에브라임 위로 그물을 던져 공중의 새처럼 낚아채실 것이다. 예언자가 선포한 대로 여호와께서 징계하실 것이다.
4. 에브라임에게 화가 있을진저(13~16절)
6:7부터 시작된 고발이 정점에 다다른다. 13~14절에서 여호와께서 비통한 마음으로 에브라임의 불순종과 배반을 개인적으로 고발하신다. 여호와는 도와주려고 애를 쓰지만, 에브라임은 도망치려고만 한다. 여호와께서 심판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신다. 에브라임의 배반이 여호와의 구원 의지를 심판 의지로 바꾸어 놓는다. 이들은 여호와를 떠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이는 거짓에 불과하다. 여호와를 찾기는 했지만 “성심으로” 그분을 부르지 않았다. 여호와를 부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가나안의 신 바알과 다름없는 존재로 부른 것이다. 에브라임은 “곡식과 새 포도주”를 위해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는다. 에브라임 탄식의 이유는 “풍요의 부재”였다. 에브라임에게 “여호와의 부재”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여호와를 떠난 범죄의 결과로 곡식과 포도주가 사라졌지만, 사라진 곡식과 포도주만 안타까워하며 탄식한다.
15~16절은 에브라임의 배반이 “배은망덕”한 것임을 밝힌다. 여호와께서 구원의 역사와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자기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해 주셨지만, 에브라임은 자기 능력과 강대국의 도움을 선택하고 그분께 거슬러 악을 꾀할 뿐이다. 에브라임은 여호와께로 돌아왔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에브라임이 돌아오기는 했으나 “높으신 자(여호와)”에게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구원 능력이 없는 “높지 않은 자(바알)”에게 돌아왔다. 에브라임은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주변 제국과 동맹 정책을 통해 국가 생존을 도모하던 지도자들은 모두 칼에 맞아 죽고, 에브라임은 쓸모없는 활처럼 버려질 것이다.
예전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신 6:23)”를 경험했던 애굽이었지만, 우상을 섬기다가 멸망한 에브라임을 보고 그의 어리석음을 조롱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은 “달궈진 화덕”처럼 모반이 끊이지 않았고,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강대국과의 동맹에 사활을 건다. 그리고 “속이는 활”처럼 또다시 하나님을 외면한다.
-하나님이 고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병은 더 드러나고 증상은 더욱 악화한다.(1~2절). 그러고도 이스라엘은 치료를 거부한 채 치부를 감추려고만 한다.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더 멀리 도망간다. 그들은 하나님이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요, 진심으로 회개하면 그분이 용서 못 하실 죄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교만이고 무지인지 잊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료하고 싶으셨지만, 이스라엘은 마음 바꾸기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백성과 지도자가 다를 바 없었고 거짓을 일삼으며 도둑질과 노략질을 자행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다 알고 계시고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은총으로 맺어주신 언약과 선물로 주신 각종 축복은 망각하였다. 죄악이 성벽처럼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반역에 반역, 모반에 모반을 거듭하며 큰 혼란을 겪는다(3~7절). “달궈진 화덕처럼” 앞에서는 충성을 맹세하면서 뒤로는 배신과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음모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도 없고, 인애와 정의가 사라진 전쟁터 같은 상황 때문에 부르짖는 자도 없었다. 타인의 희생을 밟고 얻은 지위나 부요는 성공이 아니라 불의이다. 그리고 불의가 제때 심판을 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들키지 않은 죄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것은 아직 집행되지 않은 “유예된 심판”일 뿐이다.
-열강을 의지하여 국력 신장을 도모한 이스라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거룩한 나라를 포기하고 거대한 나라를 꿈꾸더니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나라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8~12절). 에브라임은 하나님을 떠나도 선민이라는 지위만은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동맹이 가져다준 비극적인 결과도, 혹독한 대가도 알지 못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죄 가운데서 모든 것을 잃고서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선택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이방 민족들 가운데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이 이제 이방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강대국을 의지하여 힘을 키우려고 하였으나 어리석은 백발이 될 때까지 당하고만 있고 힘 빠진, 허약한 나라가 된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도 주께 돌아오기에는 너무 교만했고, 하나님께 등지고 앗수르와 애굽을 향해 힘을 구걸했다. 이런 에브라임에게 하나님께서는 심판 말고는 해줄 것이 없었다.
-속이는 활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도 않더니 이제는 건져주시려는 하나님의 손길마저 뿌리친다. 자기를 방어하고 변호하며 거짓과 거역으로 일관한다. 하나님을 “바알처럼” 믿고 “하나님의 부재”보다 “풍요의 부재”를 더 두려워한다. 그들은 하지 말라고 한 일을 계속하면서도 멸망 아닌 다른 길이 기다릴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끊임없이 설득했을 것이다.
-에브라임은 구원의 길을 버리고 스스로 패망을 향해 내달렸다. 건져주시려고 내민 주의 손길을 뿌리치고, 바알의 침상에 찾아가 부르짖고 제의를 바친다. 주님이 주신 번영으로 악을 범하는 데 부지런했으며, 패망을 눈앞에 두고도 하나님 대신에 헛된 우상을 찾는 “속이는 화살”이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했기에 수치와 조롱을 당하는 것이다. 결국 에브라임은 구원보다 패망을 선택했다.
*주님, 돌아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구원하시는 주의 손길을 거절하는 에브라임의 어리석음을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주님, 죄악은 숨길 수 없고, 심판은 피할 수 없음을 알기에 더욱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 굳게 붙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