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과 제의가 나라의 안전을 지켜주고 번영을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은 거짓에 불과했다. 여호와를 배반한 왕권과 제의는 기대와 달리 멸망을 초래할 뿐이었다. 송아지가 여호와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하나님의 집이었던 벧엘이 죄악의 소굴인 벧아웬이 되고, 그 영향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와 왕정도 여호와를 떠난다. 제의는 번성했지만, 여호와는 부재하게 되었다. 또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왕권은 아무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하나님 백성이 송아지의 백성이 되어 송아지와 함께 수치를 당한다.
본 장의 신탁은 “제단과 왕좌”에 대한 것이다. 먼저 풍요와 제단 사이의 관계를 밝히고, 이스라엘이 옥토에 심은 무성한 포도나무로서 가나안 땅에서 번성한 민족으로서 자리매김하지만, 나라가 풍요해짐에 따라 제단이 증가하고 사치와 향락이 증가하는 것을 비난한다. 이스라엘이 팽창을 꿈꾸며 우상숭배에 열을 올렸으나 하나님은 그들이 만든 많은 산당을 가루로 만들어 반역에 대한 쓴맛을 보여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이스라엘의 악행(여호와 신앙에 가나안 우상을 혼합한 것)은 왕권의 몰락으로 결론지어진다는 것을 예고한다.
1. 역설적으로(1~8절)
1~2절을 시작하며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의를 고발하며 심판을 선언한다. 역설적으로 여호와의 축복이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이스라엘을 무성한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열매가 풍성할수록 제단을 더 많이 짓고, 수확량이 많아질수록 “주상(신성화한 돌기둥)”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데 공을 들인다. 이스라엘은 땅의 축복에 나름대로 정성껏 응답하지만, 이들의 경건과 감사는 가나안의 바알에게 바치는 제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혼합주의에 물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된 것이다. 호세아는 이런 행태의 이스라엘에게 “두 마음”을 품었고 이에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만들어 바친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고 주상을 허물어버리신다. 죄악(아웬)의 소굴이 된 산당이 파괴되고 제사를 드리던 제단이 황폐해져 가시와 찔레로 뒤덮인다. 생존 기반이 철저하게 파괴되기에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차라리 산과 작은 산에 있던 산당과 제단이 파괴될 때 함께 죽지 못한 것을 원망하며 죽기를 소망한다.
3~4절은 왕권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스라엘의 종교가 여호와를 잃어버리고 제의라는 껍질만 붙잡고 있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정치도 여호와를 완전히 떠났다. 제단과 산당이 부서질 때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왕권도 하나님의 심판에 떨어진다. 이때 왕권의 무능력과 한계를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왕권이 가져다준 유익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빈말이나 즐기며 거짓 맹세나 무의미한 조약을 남발하고 백성을 미혹하기만 할 뿐이다.
독초가 밭이랑을 못 쓰게 만들듯이 왜곡된 재판이 이스라엘 사회를 속속들이 부패시켰다. 벧아웬의 송아지에게서 영광이 사라질 때 ‘사마리아 왕’도 멸망당한다. 홍수가 밀려오듯이 앗수르가 침략하여 에브라임 산지를 뒤덮을 때 왕은 나무에서 잘려 물에 떠내려가는 가지(거품)와 같은 신세가 된다.
5~6절은 벧엘의 송아지 상을 조롱하며 그 멸망을 선포한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벧아웬의 송아지 조각을 두려운 마음으로 경배한다. 송아지 조각을 숭배하는 벧엘은 “죄악의 소굴(벧아웬)”일 뿐이다. 5절 하반절은 사마리아 주민과 제사장들이 송아지 때문에 슬퍼하고 또 환호한다.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과 제사장들이 아니라, 송아지에게 속한 백성과 제사장들이다. “슬퍼하다”와 “기뻐하다”는 바알의 풍요 제의를 암시해 준다. 벧아웬의 제사는 바알 제사일 뿐이다. 벧아웬의 송아지는 숭배자들을 보호해 주기는커녕 저 자신도 지키지 못하고 수치 가운데 사로잡혀 간다. 이스라엘은 파국을 모면하기 위해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은 부끄러움을 가져다줄 뿐이다.
2. 멸망의 길(9~15절)
9~10절은 두 가지의 죄악을 언급한다. 호세아는 기브아 시대를 자기 시대의 예표로 사용하면서 현재의 악한 형편을 과거의 사건 안에 위치시킨다. 기브아에서 공공연히 자행됐던 파렴치한 악행은 일과성의 범죄가 아니었다.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은 기브아에서 일어날 것을 밝히신다. 호세아서에서 기브아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부패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장소로 언급된다. 먼저 사울이 수도로 정하고 왕권을 수립한 곳이다. 또 사사기에서 어떤 레위인의 아내를 윤간한 사건과 자기 아내의 시체를 열두 토막을 내어 훼손한 후에 벌어진 피로 얼룩진 내전의 현장이다(삿 19~21장). 즉 기브아 시대를 언급한다는 의미는 이스라엘의 왕정 부패를 고발하는 것이며, 인간성 말살과 타락한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예이다. 그 악행이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기에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방식으로 무법한 후손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시다. 그때는 “내가(하나님이) 원하는 때(10절)”이다. 그때가 되면 열방이 함께 이스라엘을 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11~13절은 에브라임이 훈련된 ‘어린 암소’로 비유된다. 이를 통해 에브라임의 처음과 나중을 대조적으로 기술한다. 한때 에브라임은 여호와께 기쁨이었다. 마치 길든 암소와 같아서 힘이 있었을 뿐 아니라 타작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한때 유능하고 쓸모가 있던 암소였으나 지금은 “완강한 암소”가 되어버렸다. 에브라임은 처음부터 고집 센 소가 아니었다. 여호와의 의지에 부응할 만한 자질과 배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순종적이었다. 그 암소는 추수한 곡식을 밟으며 타작하는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그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씌우고 에브라임은 수레 또는 전차를 끌게 하고, 유다는 밭을 갈고 야곱은 경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11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강제적으로 일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애초에 이스라엘은 강제적으로라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기들을 위해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는 일이었다(12절). 이후에 자신들을 위해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명령이 이어진다. 정의와 공의를 실행해야 할 재판관들이 밭이랑의 독초와 다를 바 없으니(10:4), 밭을 갈아엎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롭게 시작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호세아는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이고 마침내 여호와가 오셔서 정의를 비처럼 내리실 것이라고 12절에서 선포한 것이다. 이는 최종적인 경고이자 지금 돌이켜 정의를 실행하고 인애를 실천하라는 회복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었고, 거짓된 열매를 먹고 말았다. 왜 이렇게 했는지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는데, 13절에서는 “너희 길에서 자기 확신이 넘쳤고, 너의 용사가 많음을 지나치게 신뢰했기 때문이었다(13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사 시대의 대표적인 죄악 사건인 기브아 사건처럼 호세아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닌 자기 확신과 군사적 힘만 의지하여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다.
14~15절에서는 악의 씨를 뿌리면 죄의 열매를 거둬야 하는 것처럼, 여호와를 찾지 않고 제 능력과 군사력에 의지하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선언한다. “네 길(강대국 의존 정책, 혹은 군사동맹)”로 가는 이스라엘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고 여자와 아이들이 침략군의 무자비한 칼에 희생당한다. 무너지는 방식은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베다 아벨을 무너뜨린 것처럼 되고,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박살 날 것이라는 참혹한 경고가 선포된다(14절).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폭력적인 참혹한 불행이 전쟁의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강타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집(벧엘)을 악의 집(벧아웬)으로 오염시켰기에(5, 8절) 혹독한 파멸의 경고는 자연스럽다. 벧엘이여 너의 악이 커서 일어나리니, 이스라엘의 왕이 틀림없이 멸망할 것이다(15절). 벧엘은 금송아지 우상의 핵심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무거운 죄가 발생한 장소다. 이미 이곳에서 산당이 파괴되고 사마리아 왕의 최후가 예고된 바 있다(5~8절).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배반한 순간부터 지속된 정치적 종교적 타락은 참담하게도 그들이 애인처럼 여겼던 제국의 침략으로 파괴되는 것으로 끝난다.
나는?
-이스라엘은 풍요해질수록 우상의 제단을 늘리고, 하나님보다 정치적, 종교적 힘을 의지한다. 이에 하나님은 그 모든 우상을 멸하시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두 마음”을 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1~2절).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주어진 풍요가 제사 때문이라 여겨 더 많은 제단과 주상을 만든다. 아무 데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라는 율법도 어겼다(신 12:13~14). 하나님은 예배가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예배드린다면서 실은 자신을 섬기고, 내 유익을 위해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두 마음을 미워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총을 잊고 자신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같았고, 바알의 은덕으로 번성했다고 생각하였다. 종교는 번성했지만, 회개는 형식적이었고, 하나님께 바쳐야 할 감사를 바알에게 바쳤으며, 백성들이 더 많은 죄를 짓기를 바라기까지 했다(4:8).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이 만든 위선의 제단을 깨뜨리시고 바알의 주상을 허무실 것이다. *종교적인 위선의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나라 전체가 거짓으로 언약을 체결하고 재판을 굽게 한다(3~15절). 왕이 있으나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정치력과 군사력을 더 신뢰한다. 왕권의 몰락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나는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며 살고 있는가?
-그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우상이 무기력해 보이자, 백성은 슬퍼하고, 제사장들은 절망한다(5~8절). 나라가 망하는데도 허탄한 우상으로 인해 탄식한다. 수치를 모르는 그들은 수치를 받게 될 것이고 자멸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나를 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것은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성령의 지혜를 덫 입어 분별해야 할 것이다.
-종교가 하나님을 떠났듯이 정치도 떠났다. 왕은 빈말과 거짓 맹세로 정의를 무너뜨렸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왕의 나라 이스라엘이 거품처럼 멸망케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의 빈말에 속는 것은 우리의 탐욕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는 텅 빈 인생으로 끝날 것이다. *정치적인 교만의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기브아 시대의 끔찍한 범죄가 호세아 시대에 반복된다. 죄만 아니라 징벌도 반복된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모여 베냐민 지파를 치듯(삿 20:11), 이제 만민이 모여 이스라엘을 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처벌로도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고 사람을 바꿀 수 없다(9~10절). 그래서 하나님은 죄와 형벌의 악순환을 깨뜨리시는 “애끓는 긍휼(11:8)”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기 위해 묵은 땅을 직영하면, 하나님이 찾으셔서 공의를 비처럼 내리실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악을 밭 같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고 자기 길과 자기 군사력을 의지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믿던 요새를 허무시고 새벽 침공에 왕의 목숨을 거두게 하실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한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주의 백성에게 멍에를 메우고 배우게 하신다(마 11:30). 이스라엘은 죄악의 씨를 뿌려 거짓의 열매를 먹었다. 이제 그들이 살 길은 묵은 땅을 갈아 정의 씨를 뿌려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가 아닌 순종하는 자에게 의를 비같이 내려주실 것이다(11~13절). 나의 삶에서 찾을 수 있는 열매, 하나님께 오려 드릴 성령의 열매, 맺혀 있는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무거운 멍에와 곤고함을 허락하신다(11절). 한때 이스라엘은 길이 잘 든 암소처럼 말씀의 양육을 잘 받으며 행복했었다. 그러나 우상숭배의 죄로 말미암아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이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면 내게도 고통의 멍에를 메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진노 중에서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합 3:2)은 오늘도 역시 심판받아 마땅한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고 계심을 본다. 그것은 죄악으로 인해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한 땅을 갈아 엎으라는 것이다(12절). 이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 위에 의를 비처럼 내리실 것을 약속하신다. 지금, 여기에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라.
*간절한 회개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마음을 갈아엎는 회개보다 자기 길을 가며 지기 힘을 의지한다. 그 결과는 새벽에 망하는 것뿐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는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겠지만(시 46:5), 하나님의 길을 버린 자는 새벽에 멸절하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죄를 묻겠다고 거듭 경고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애절하다. 하지만 지도자와 백성은 이를 인식조차 못한다. 회복의 기회가 계속 사라진다. 우상을 섬긴 죄를 묵과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오늘 말씀에서도 선명하다. 지금 우리의 시대가 호세아 시대에 울려퍼진 이 말씀에서 어느 것 하나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고통스럽다. 교회지도자, 정치지도자, 성도, 국민… 모두가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고 있다. 참담하다. 주님께서 이 고통의 시간을 속히 끝내려 하시지만, 정작 호세아 시대의 백성처럼 하나님을 외면만 한다. 말씀을 묵상할 수록 한숨이 깊어진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지 외쳐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참담하다.
*하지만 용기를 내보리라. 그러면…
*묵은 땅을 기경하라, 흡족한 공의의 비가 내려, 풍성한 인애의 열매가 맺힌다.
*주님, 욕심과 죄로 묵혀 놓은 마음의 땅을 갈아엎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의 비를 흡족히 받기를 고대합니다.
*주님,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가짜 예배를 무너뜨려 주시고 우리의 예배를 예배 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