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의 이야기(History)가 나의 이야기(My story)가 되다 [요일 1:1-10]
 – 2022년 12월 19일
– 2022년 12월 19일 –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다. 이 말씀은 생명이다. 요한은 그 말씀을 들었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했다(1절). 그렇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나타내신 바 되셨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을 포함하여 제자들이 직접 본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언하여 전하였다고 했다(2절). 이렇게 전한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더불어 “사귐”이(3절) 있게 하기 위함이고 이로 인해 “기쁨”이 넘치게 하기 위함이다(4절).
 
“사귐과 누림, 기쁨”을 누리기 위해 전한 소식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였다(5절).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어둠에 있을 수 없다(6절). 예수님이 빛(하나님) 가운데 거하는 것처럼 우리도 빛(하나님) 가운데 행하는 것이 사귐의 증거이고 하나님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7절).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없다는 증거일 뿐이다(8절).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 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새번역_9절)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새번역_10절)”
 
 
 
1.예수님을 만난 요한(1-2절)
예수님은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으로 계셨다. 그리고 성육신하셨다. 그를 만난 요한은 그분이 전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빛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태초의 말씀이시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인간 세상 속에 오셨다(요 1:14).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를 직접 볼 수 있으며, 그를 직접 만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내셨다.
 
*태초에 말씀이셨으나 인간의 삶에 내려오셔서 살아있는 그의 이야기(history)로 우리에게 다가 오셨다. 그의 이야기는 2천년전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나와의 이야기로 연결 된다. 누구든지 그의 안에 있으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된다.
 
*내 삶속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와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 위해 요한이 먼저 자신의 삶을 통해 그 길을 알려 준다.  “들은 바, 본 바, 만진 바”가 있어야 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나의 이야기가 된 그의 이야기는 옛날 옛적 전설이 아니라 오늘 생동하는 이야기가 되어 나를 이끈다. 어떻게 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2.사귐과  기쁨이 있으니까!(3-4절)
들은 바, 본 바, 만진 바 되어 전해진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빛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게 하는 목적은 이 복음의 소식을 들은 이들이 서로 사귐(교제_코이노니아)이 있게 하기 위함이고 그 사귐 안에서 기쁨(즐거움_카라)가 있게 하기 위함이다고 했다.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은 삶은 홀로 내버려진 삶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었고, 믿음의 동역자들이 함께 있으니 그 안에서 기쁨이 소통된다.
 
요한서신과 계시록은 1세기 말 로마 도미티안 황제의 황제숭배적책으로 인해 성도들이 박해받는 시기에 기록되었다.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계시록과 함께 밧모섬에서 유배 당하면 기록했다.
 
주후 70년 로마의 티토장군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성취였다(마 24:2). 여기에 교회안에 거짓 선생들이 많이 일어났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예언이 성취 되었음을 보며, 이를 이루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묵과 할 수 없었다. 요한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제대로 전한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해 죄인이 돌아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그 안에서 참된 교제가(사귐이) 회복되기를 바랬다. 
 
 
*예수님의 참된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예수님과 참된 교제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참된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건전하게 시작되고 누릴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충만한 기쁨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요한은 예수님과 참된 교제의 누림과 기쁨을 1장에서만 무려 21회를 사용한 “우리”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님과 사도와 사도들의 증거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 교제와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 복음을 증거했다고 강조한다.
 
 
 
3.주님과의 사귐과 기쁨을 누리려면?(5-10절)
5-10절까지 “만일”이라는 가정이 네 번 반복된다. “만일” 하나님과 교제가 있는데 어둠에 행하면?(6절) 또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8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9절),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10절) 등이다.
 
6,8,10절의 가정은 각각 거짓말 하는 것, 자신을 속이는 것, 진리가 우리속에 없는 것,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반면에 9절의 가정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히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즉, 예수님과 함께 구원받은 공동체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와 기쁨을 누리려면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된다” 자백하다(호물로게오)는 ‘약속하다, 고백하다, 시인하다, 선포하다, 선언하다, 찬미하다, 칭찬하다’는 의미가 있다. 요한은 이 단어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의 복음이 실상이 되려면 복음의 필요성의 전제인 죄의 문제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죄의 심각한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이는 복음이 필요 없고 그런이에게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누리는 하나님과 교제와 기쁨의 가치는 자신들의 삶에서 진실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빛, 진리의 복음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려면, 그만큼 복음의 필요성이 절감되어야 하는데, 이는 죄의 한계에 대하여 절실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실함이 없어서 사귐도 없고, 죄를 용서받은 것도 아니고, 죄가 없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진실한 인정과 고백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따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다(9절).
 
*당시 교회는 거짓교사들이 있었고 그들로 인해 교회는 심각하게 분열되고 있었다. 이들이 교회에서 가르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심각한 왜곡들이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했는데(요일 4:3, 요이 1:7) 이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심각한 것이었다(요일 2:22)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를 무관하게 만듦으로 구속사를 부인하게 만드는 위험한 것이었다(요일 4:3). 즉, 하나님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무관하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어 천당만 가면 된다는 식의 구원관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종말의 구원(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을 믿는다면 반드시 그 구원을 오늘이라는 일상에서 살아내기 때문이다. 천국은 있는데 지금 이곳에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구원관이 없는 교회가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심각한 위협이 아닐까?
 
*오늘을 하나님 안에서 살아내는 하나님나라 신학에 무지하고 오직 죽어서만 가는 천국으로만 인식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이기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별된 삶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 믿어 하나님나라를 살자”의 정체성이 시급히 회복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일상을 하나님 안에서 누리고 살아내는 ‘사귐’이 실제가 된다. 요한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가르침의 근거가 주님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듣고, 보고) 인격에(만진 바_함께 함) 근거함을 고백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을 접촉한 자로서 선명한 확신과 당당함으로 하나님나라 복음을 가르쳤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요한은 3년간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고 십자가 아래에서 그의 죽음을 목도하였으며, 부활의 현장을 베들로와 함께 확인한 제자였다. 주님의 승천 이후에도 한결같이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렇게 일상을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이야기를 전하다가 밧모섬에 유배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과 교제하며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요한은 주님을 만나서 듣고 보고 만진 그의 이야기를 세상에 확신 가운데 전하였다. 나는 어떠한가? 주님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그저 역사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은 아닐까? 내가 보고 듣고 만진 그 말씀을 나도 선명하게 전해야 하지 않겠나!
 
*오늘날 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매일 묵상을 통해 여전히 나에게 일어난다. 진리되신 주님의 이야기를 읽고 생각할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마음을 공감케 하여 주시고 나의 이야기가 되도록 삶의 현장에서 간섭해 주신다. 그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전해야 할 때, 들어줄 영혼들을 미리 기다리게 해주시고, 인쇄된 활자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생각속에서, 마음의 감동과 함께 실제가 되도록 “고백”하고 “증언(들려줌)”하게 하신다.
 
*이렇게 묵상은 성경 속의 그의 이야기가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도록 탈바꿈 되는 복된 시간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경험되어 일상 속에 들어온 그의 이야기는 때가 되면 반드시 들려줄 이를 만나게 되고 나누게 될 공동체를 허락해 주신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오늘을 하나님나라 안에 살아내고자 한다면,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의지적으로 순종하려는 인격적인 발돋움이 있어야 한다. 마치 2천년전 사도 요한이 자신이 들은 바, 본바, 만진 바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와 성도들에게 힘써 전할 뿐 아니라 일상에서 성시랗게 살아내면서 실제가 되는 것을 증언하고 증거 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을 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주님, 말씀되신 주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하루를 살겠습니다.
**주님, 지난 18년의 청년사역의 이야기가 주님의 이야기로 가득 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달려갈 15년의 목양도 주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실제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매일 그렇게 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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