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구원의 날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날 [암 5:18-27]
 – 2024년 12월 10일
– 2024년 12월 10일 –
 
여호와의 날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그들은 절기, 성회, 갖가지 제사로 하나님을 찾았으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싫어하시며 거부하신다. 대신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흘려보낼 것을 요구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을 위해 만든 우상을 들고 다메섹 넘어 앗수르로 사로잡혀 갈 것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날(욤 아도나이)”은 선지자들이 종말을 말할 때 사용하는 전문용어이다. 아모스서가 예언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성경이니 여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예언서에서 발견된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회복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담는다. 악인에게는 심판의 날이, 의인에게는 회복의 날이 된다. 대상은 이스라엘과 이방이 모두 포함이 된다. “여호와의 날”의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여호와께서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 역사를 직접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날이 곧 임할 것이라는 긴박성을 통해 백성들을 돌이키려고 했다. 여호와의 날의 특징은 하나님의 신현의 상징으로 구름과 불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군대가 임하여 죄인들을 죽음으로 심판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데 있다. 여호와의 날을 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돌아와야 한다(욜 2:12~13). 아모스는 이러한 여호와의 날이 북이스라엘에는 구원의 날이 아닌 심판의 날로 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은 채 죄인의 모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5:17~18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에 대한 장송곡(애가)의 연장선에 있는 구절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날에 임하셔서 심판하심을 말하면서(18~20절), 하나님이 절기 대신 정의를 원하시며(21~23절), 정의와 공의가 없으므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을 예고한다(24~27절).
    
    
    
1. 심판으로 임하는 여호와의 날(18~20절)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날을 오해하고 있었다. 여호와의 궁극적인 임재가 나타나는 날인데, 의인에게는 구원으로 임하고 악인에게는 심판으로 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의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기에 여호와의 날은 자기들 구원의 날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고 속히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신다. 오히려 그들에게 “이 여호와의 날이 너희에게 어떤 날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신다. 이에 대한 대답이 18절 하반절이다. “그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날은 준엄한 심판의 날이지 구원의 날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착각과 오해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19절은 여호와의 날을 잘못 오해하여 맞이하게 될 심각한 결과에 대해 경고한다. 사자를 피하려다가 곰을 만난 것처럼, 집에서 벽에 무심코 손을 대었다가 거기 있는 뱀에게 물리게 된 경우와 같다고 말한다. 이 두 표현은 “대비하지 못한 채 당하는 저주”를 의미한다. 여호와의 날이 빛으로 임하리라 생각하고 있다가 막상 어두움으로 임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이 느낄 당혹감을 표현했다. 20절에서 다시 한번 여호와의 날이 빛이 아닌 어둠임을 확인하신다. 이스라엘이 심판당하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2. 절기보다 정의를 원하심(21~23절)
어떻게 여호와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을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날을 자신들에게 임하는 구원의 날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들에 대한 평가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헛되게 노력하는 잘못된 종교적 행위들을 지적하면서 그런 거짓된 노력보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참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을 당부한다.
    
첫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절기와 성회를 미워하고 멸시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절기와 성회란 이스라엘 총회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던 주요한 절기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곳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미워할 것이라고 밝히신다. 그 제사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향기조차 하나님은 기뻐 받지 않으신다. 번제, 소제, 화목제까지 그 어떤 제사도 받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려는 하는 찬송의 노래도 거절하실 것이다. 이러한 모든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참된 신앙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보다 그들에게 주어진 외적인 종교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잘못된 관점을 보여준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려는 진정성을 갖지 못한 모든 종교적 행위는 하나님께 온전히 열납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잘못된 종교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3.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한 예고(24~27절)
아모스는 이어서 “정의와 공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라고 외친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그들 사회 속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다시 회복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24절 자체로만 볼 때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해석은 정의와 공의가 흐른다는 것은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가 임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묻고 그들에게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 해석은 정의와 공의가 흐른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하게 된다. 24~27절의 문맥은 하나님 앞에 돌이켜 회개하고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 그들이 지금 해야 할 행동이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임하여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그들이 과거 출애굽 했을 때 광야에서 40년 지내는 동안 하나님께 번제물과 소제물을 드린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고 물으신다. 이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 하나님 앞에 드려야 했던 신앙의 전부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니요”이다. 24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이 먼저였다.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했지, 겉으로 드러나는 제사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제사 행위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하나님은 21절처럼 “나는 너희 절기와 성회를 미워한다”라고 하실 것이며, 2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의와 공의를 흐르게 하라”고 하실 것이다.
    
이와 같은 문맥은 26~27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이방 우상들을 몸에 짊어진 채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될 뿐인 것으로 이어진다. 26절은 식굿과 기윤이라는 이방 우상들을 이스라엘이 소중하게 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식굿과 기윤은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거짓 신들을 가리킨다. 식굿은 앗수르의 신인 ‘아달’ 신을 말하는데, 아달은 전쟁을 담당하는 신이었다. 기윤은 별자리 중에서 토성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토성을 신으로 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게 되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포로로 끌려가게 하실 것이다. “별 형상을 지고 간다”라는 표현도 고대 사람들이 자신들이 섬겼던 신들의 형상을 직접 가지고 다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식굿과 기윤을 소중하게 모시려고 했던 이스라엘은 이제 그 두 신을 가지고 멀리 포로로 잡혀갈 것이고, 그 두 신들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혀 도와주지 못할 것이다. 그 신들이 거짓 신임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절절한 애가다. 이 슬픈 노래는 절기와 성회와 같은 외적 종교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오직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여호와의 날이 심판으로 임하여 이스라엘이 멸망케 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심판으로 임하게 될 뿐이다.
    
    
    
나는?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신앙을 낳는다.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환상을 깨뜨리고 정의와 공의가 배제된 제사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잘못된 희망과 환상을 깨뜨리신다(18~20절). 아모스는 이스라엘에게 그날은 구원의 빛이 아니라 심판의 암흑이 임하는 날이라고 선포한다. 사자를 피해 도망가다가 예기치 않게 곰을 만나거나 집안에서 방심하다 뱀에게 물린 사람처럼 여호와의 날을 자신들을 위한 구원의 날로 확신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가 임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편에 서서 대적들을 물리치시는 “여호와의 날”이란 애초에 잘못된 신학적 신념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지은 죄도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연한 구원은 없다.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말씀을 해석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구원도 축복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순례의 절기와 예배하는 성회, 자원하여 드리는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 노랫소리와 연주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거들떠보지 않으신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삶의 길을 제시하는 통로요, 그 백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며 살게 하려고 주신 수단이지만, 어느새 이스라엘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 자체가 되고 말았다. 형식이 본질이 되어버렸다.
    
-사랑과 공의를 잃어버린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21~24절). 이스라엘이 지키는 절기와 모이는 성회를 미워하고 멸시하신다. 부정한 손으로 드리는 그들의 제물과 기도와 찬양을 아무리 간절하게 많이 드리더라도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예배의 본질과 정신이 사라진 화려한 예배당과 웅장한 찬양에 감동하시는 분이 아니다. 먼저 죄에서 돌아서서 깨끗해지고 율법의 요구에 따라 정의를 구하고 약자들을 선대하고 그들 편에 설 때 주님이 비로소 예배받으실 것이다. *예배당 문만 드나들 뿐 주님의 뜻을 찾고 구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으셨다. 하지만 풍요의 땅 가나안에서는, 제물은 넘쳤지만, 언약 의무에 소홀한 채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풍요와 번영 때문에, 그 오랜 사랑을 잊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변절한 이스라엘은 결국 그들이 섬긴 우상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든 도움이 안 되면 폐기 처분 할 수 있는 우상 중 하나였을 뿐이다. 숱한 예배와 예물을 드려도 인생의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 신자도, 예배자도 아니다.
    
-가나안의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제사가 사라져 버렸다. 이스라엘은 “결핍의 땅” 광야에서 희생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치지 못했어도 하나님과 얼마나 잘 지냈는가? 하지만 지금 “풍요의 땅” 가나안에서는 제물은 넘쳐나지만, 언약의 의무엔 소홀한 채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하나님은 언약에 매이지 않고 “욕망”의 포로가 된 그들을 앗수르 땅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여호와의 날”은 빛(구원과 영광)의 날이 아니다. 어둠(심판과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거절한 이방인들에게 닥치리라 했던 날이 선민, 언약 백성에게 닥칠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날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그들이 믿고 의지하던 우상과 재물과 권력이 그들을 구원해 주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정말 좋아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절기, 성회, 번제, 소제, 화목제, 노랫소리와 연주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거들떠보지도 않으신다. 이런 것은 단지 백성에게 삶의 길을 제시하는 통로요, 그 백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며 살게 하려고 주신 수단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느새 이스라엘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 자체가 되었다. 때마다 성물은 잘 챙겨 바치면서 성민으로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은 외면하였다.
    
*마른 땅을 적시는 풍성한 겨울비처럼, 아무리 소산이 풍성하고 나라가 강성해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없는 땅은 죽은 땅이요,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이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의 제사는 결코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상처럼, 우상을 하나님처럼 믿었다. 그래서 우상과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 누리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으실 것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우상 역시 그들에게 무기력한 허깨비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도리어 이스라엘이 원치 않는 것, 즉 그들이 숭배한 우상과 함께 앗수르로 잡혀가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오해와 착각이 부른 심판이었다. 자신들이 기뻐하는 것에만 몰두할 뿐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닫았기에 생긴 거짓 확신 때문이었다.
    
    
    
*주님, 주님을 예배할 때 비본질적인 것에 힘쓰기보다 공의와 정의가 생동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주님, 오늘 공의와 정의를 좇아 행하는 삶을 살도록 매 순간 주님의 말씀에 지배받아 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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