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가만히 끊고자”가 아닌 “분부대로 데려온” 순종의 사랑으로 [마 1:18-25]
 – 2023년 01월 20일
– 2023년 01월 20일 –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어진다. 1-17절이 예수님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라면 본문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절)”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예수님의 나심은 구약성경의 성취임과 동시에 성령으로 이루어진 역사이다. 요셉은 자신과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했음을 알게된다. 하지만 그녀를 추궁하고 의심하여 부정에 대해 공개적인 처분이 아닌 “가만히 파혼 하고자” 했다(19절). 요셉은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은 마리아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조용히 파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결정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그보다 더 참신하고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탄복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시면서(20절) 맞이 하셨다. 그리고 마리아를 영접할 것을 요청하셨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것이 다윗 자손의 할 임을 확고히 하였다.
 
*삶에서 나의 생각과 판단, 선택과 결정이 늘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다른 길이 있고, 더 나은 해결책이 있음을 경험했다. 나의 판단이 언제나 옳고 최선이다는 확신의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우쳐 주시는 지혜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의 나심은 먼저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 되었음을 밝힌다. 의로운 요셉은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르쳐 준대로 정혼을 끊지 않고 마리아를 데려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의 사자가 지어준대로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준다. 마태는 이 모든 일이 이사야 7:14에서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이 약속대로 성취된 것임을 밝힌다. 이 예언에서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려 준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세상은 인정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많은 논란이 있으나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정혼한 여인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탄생했음을 확언한다. 완전한 인간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와 같이 보내셨음을 믿는다.
 
 
 
*주의 사자가 지어준 “예수”라는 이름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로 알려 준다. 주의 사자가 알려준 이 이름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분명하게 담겨있다.
 
먼저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라는 것이다.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자는 없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외에 다른 구원자를 보내신 적이 없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세상이 이해하는 법률적인 죄이기 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와 죽음과 지옥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렇게 구원하여 주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살도록 하기까지의 구원이다. 그래서 셋째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불리게 된다. 믿는 자는 누구나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조건은 없다. 오직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해 주실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다. 참고로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는 “메시아(마쉬아흐_mashiach)”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독”은 중국어(한자)이다. 아람어도 히브리어와 비슷한 발음으로 “메시아”이다 .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christos)인데, 이것의 음역이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종말의 구원자라는 의미와 함께 이해한다. 이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준 “다윗 언약(삼하 7:7-17)”에 뿌리를 둔 사상이다. 다윗의 씨, 순(가지), 아들을 통해 종말의 구원자가 와서 다윗 왕국을 회복할 것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사상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강화되었는데, 이스라엘 멸망 이후 400여년의 시간 동안 숱한 제국들의 지배에서 정치적 독립을 이룰 구원자로 이해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와 죽음, 사탄의 지배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구원자로 오셨다.
 
무엇보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임명장을 받았다는 뜻으로 전통적으로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구약에서는 기름부음을 통해 임명을 받았다.
 
*우리가 흔히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만왕의 왕이 되시는 분이라는 고백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고,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직접 제물로 내어 주어 하나님께 단번에 드린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 또, 예수님은 왕으로서 모든 세상의 거짓 왕들(사탄)을 물리치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지셨다. 만왕의 왕으로 모든 만물을 다스린다.
 
*이와 같은 의미들 중에 가장 핵심은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나의 삶 뿐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인되시고 주권자되시며 왕으로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그의 통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또 다른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통치자로서, 보호자로서, 목자(인도자)로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이 이름은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이름이고, 죄 중에 거하는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이름이다. 억울하고 소외된 이들에게는 소망의 이름이고 방황하는 이들에게는 확실한 진리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든든한 이름이며, 구원과 소망, 사랑과 영광스러운 이름이다.
 
 
 
나는?
-이와같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의 과정 속에 본문은 요셉의 행동에 시선이 가게 한다. 마태는 그를 “의로운 자”라고 평하며 그로 인해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의 과정이 보호 받았음을 느끼게 한다.
 
-마태가 그를 의로운 자라고 평한 이유가 당시 문화적인 이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이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의로운 자라는 인식을 따라 이렇게 표현 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은 주의 사자의 계시에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려오고 예수를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인 것을 가리킨다.
 
-요셉은 정혼자 마리아의 임신을 설명해 주는 주의 사자의 계시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였다. 율법으로는 마리아에게 수치를 주고 당연하게 정죄할 수 있었지만, 율법의 굴레에 얽매이는 것 보다 “주의 사자”의 꿈을 통한 현몽에 순종하였다.
 
-묵상하면서 이 부분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꿈을 통해 받은 계시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마리아를 보호해 주고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을 예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율법의 굴레에 갇혀 있는 요셉의 마음을 깨뜨리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먼저 경험하게 해 주신 것인지 모르겠다.
 
-선지자의 글과 율법의 형식이 절대적이었던 시대, 꿈에서라도 강력하게 계시하셔서 하나님의 생동하는 구원의 역사의 문을 열게 해주신 것이다. 역시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온전한 은혜의 선물이 맞다.
 
-가만히 “끊고자” 한 율법적 정의로움이 주의 사자의 계시에 무릎을 꿇었다. 나 역시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늘 율법적으로 정의하고 판단하여 규정하기는 쉽다. 그리고 좀 더 인격적(?)인 방법으로 정의로움을 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 앞에 정의로운 정죄와 판단은 수용과 이해, 받아들임으로 까지 순종되어야 한다.
 
-나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하여는 철저히 정죄당하고 심판받아 저주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정죄보다 예수님을 보내신 사랑으로 품어주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을 받았으니 흉내라도 내봐야 하지 않겠는가!
 
-“가만히 끊고자”가 아닌 “분부대로 데려온” 순종의 사랑으로 살아내야지….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여 주신 “임마누엘”의 약속을 친히 이루어지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오늘도 말씀의 약속들 안에 거하고 누리게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늘 연약하여 불신앙과 죄악에 넘어지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낼 수 있다. 무엇보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정죄, 판단, 저주를 행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삶을 살아야 겠다.
 
 
 
*주님, 요셉이 보여준 “가만히 끊고자” 한 것에서 주의 사자의 계시에 순종하므로 “받아들임”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보게 됩니다. 정의로움보다 사랑과 수용이 더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 임마누엘의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 저의 삶도 정의로움보다 사랑함, 받아들임의 걸음으로 인도해 주실것을 기대합니다. 사랑 받았으니 사랑하겠습니다. 사랑 안에 거하고 있으니 사랑을 흘려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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