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해박한 지식이 해로운 지식이 되어버렸다. [마 2:1-12]
 – 2023년 01월 21일
– 2023년 01월 21일 –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에 어떤 이는 경배를, 어떤이들은 당황하였다. 헤롯은 분명 충격을 받아 그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너무도 기쁜 마음으로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다.
 
마태는 다른 복음사와 확연히 다른 탄생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런 전개에는 흐름이 있다. 태어난 아기예수가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증명하는 목적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왕은 만왕의 왕, 온 세상의 왕이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방에서부터 별을 연구하는 박사들이 그 분명한 징조를 따라 나아온 것이다.
 
또, 생각해 볼 것은 이들이 동방에서 왔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슬엘을 패망시키고 포로로 끌고 간 그 지역의 후예들이다. 아기 예수의 왕 되심을 이방인, 그것도 자신의 조상들을 억압하고 패망시킨 나라의 후예들부터 알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기막히다! 이방인들이 왕의 출생을 먼저 알고 3개월 이상 걸리는 길을 찾아 온 것이다. 예수님의 만왕의 왕 되심을 이방인이 먼저 경배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방인도 하늘의 별을 보고 깨달아 알고 있었던 왕의 출생을 정작 왕이 태어난 유대의 왕궁과 성전 사람들은 알고 있지 못했다. 동방의 박사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그 징조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왔지만, 예루살렘의 어느 누구도 이를 알지 못했다.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박사들은 당연히 별의 징조를 보고 유대 땅의 왕궁에서 왕이 나셨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왕궁은 너무도 평온했고, 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신들이 온 목적을 말하자 그제서야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시 유대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왕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알현에 매우 기뻤을 것이다. 헤롯왕이 알현할 정도로 이들은 명망이 높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와서 자신들이 온 목적을 이야기할 때 당연히 당황했다. 왕 뿐 아니라 제사당들도 마찬가지였다.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왕의 출생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는 것의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상황을 마태는 “헤롯 왕과 온 이스라엘이 듣고 소동한지라.”(3절) 라고 기록했다. “소동(타랏소)”으로 번역된 단어는 “함께 뒤흔든다, 분기시키다, 선동하다, 어지럽히다, 불안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왜 뒤흔들리고, 어지럽히고, 불안해 했을까? 실현된 구약의 예언 앞에 기쁘고 즐거워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은 당연하게도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입고 있는 왕의 옷, 제사장의 의복은 그저 자신들의 삶을 부유하게 하고 자기 이름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입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은 말씀을 따라 산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딛고(이용하여)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부귀영화를 유지하게 하는 재료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찮게 여기던 말씀에서 예언된 왕이 나셨다는 소식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위기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 놓고 왕으로 나신 아기의 소재를 파악하였다. “….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겠느냐?” 그의 이런 관심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존재가 된 아기를 없애려는 마음인 것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려고 찾았지만, 헤롯은 아기 예수를 죽여 없애려고 찾았다. 동일하게 찾았지만 동기가 분명하게 다르다. 동방 박사는 경배하려고, 헤롯왕과 그의 백성들은 죽이려고 찾았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찾고 의지하려는 마음의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한 심정으로 나의 이익을 위한 욕심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런 나의 욕심을 쌓는 것에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을 수 있을까?
 
 
 
한편 구약성경에 정통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모습도 한심하다. 동방의 박사들의 출현전까지 하늘의 징조를 보지 못해 몰랐었겠지만, 그들이 와서 장소를 찾고, 왕이 어디에서 나겠느냐를 물을 때 주저함 없이 “유대땅 베들레헴”이라고 말했고, 이 또한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기록이 되어 있다고 막힘없이 말했다(5-6절).
 
그런데 아쉽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지식으로는 한치의 오차없이 알고 있었지만, 그 예언이 이루어 졌음을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축하 사절단을 보며 확인이 되었음에도 그들을 따라 경배하러 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왕으로 오실 이는 시골 구석에서가 아니라 왕궁에서 나야 한다는 “자기해석”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인물이기에 시골구석 베들레헴에서 났을리 없다는 “자기확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걸음의 가장 큰 함정은 “자기해석과 이에 따른 자기 확신”이다.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지 하나님께서 동방의 박사들의 방문으로 증거하고 그들의 입술을 통해 증거하는 것 조차 가치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아무리 저명한 학자들이라고해도 그들은 이방인일 뿐이라는 지독한 오만과 교만도 한몫 했을 것이다.
 
*목회의 여정에서 가장 두려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자기 해석과 자기확신”의 올무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 하나니의 인도하심에 겸손하게 반응하면 좋겠다.
 
*혹시 내가 오랫동안 하는 묵상이 주님의 섭리를 가로막는 “자기해석, 자기확신”이 되지 않도록 늘 겸손하게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도우심)을 의지하고 또 의지해야지…. 성경에 해박한데 정작 나의 해석과 확신이 아집이 되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싶지 않다.
 
*제사장들의 오만과 편견이 왕의 나심을 인정하지 않고 폄하한다. 절대로 촌 구석에서 태어날 리 없다는 편견이 왕의 나심을 경배하지 못하게 하였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의 구약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도리어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시작에서 제외시키는 해로운 지식이 되어 버렸다.
 
 
 
*주님, 왕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심을 알아채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더 황당한 것은 제사장들의 오만과 편견이 해박한 성경 지식을 죽은 지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에게 살아있는 지식이 되도록 말씀을 따라, 예민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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