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아버지의 뜻대로….[마 7:21-29]
 – 2023년 02월 03일
– 2023년 02월 03일 –
산상설교의 마무리 부분이다. 앞서 거짓 선지자를 주의하라는(15-20절) 경고에 이어 마지막 두 번째 세 번째 경고가 주어진다. 경고로 당부하며 산상설교를 마무리 하시는 것이다. 그만큼 이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우시는 의도가 분명하다.
 
또, 본문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그들이 듣기에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들은 모두 주여 주여 하고 고백하고 나름 예언도 하고, 축귀와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충격적인 선언이 모두를 충격에 빠지게 한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마무리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의 삶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
 
 
 
1.참 제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 주님은 겉만 번지르르한 제자들에게 경고하신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거짓 확신 속에 살 뿐이다. 주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로 믿고 바라는 것이 아닌 자신이 추구하는 것만을 신뢰하는 불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산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업적과 신앙을 혼동한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22절) 자신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담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열심히 노력하여 축적한 업적이 생명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훌륭하게 보이는 것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히 다르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항변한다. 특히 “선지자 노릇”이란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선지자 노릇”이 아닌 “선지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세상 가운데 잘 전달되도록 “선지자의 삶”을 살아냄으로 감당해야 한다. 말을 청산유수처럼 막힘이 없이 하고 글을 화려하게 쓴다 할지라도 선지자의 삶은 안 된다. 하나님 나라 정신에 충만해야 한다.
 
 
*주여 주여 라고 부르짖고 삶 속에서 주(LORD)되심을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충격적인 경고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는 삶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신 것임을 놓치면 안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행위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지자 노릇, 귀신을 쫓아냄,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 뭔가를 많이 행한 자들이었다.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었다.
 
*주님께서는 “주여 주여 “하면서 무언가의 행위를 얼마나 많이 하는가에 초점을 두지 않으신다. “아버지의 뜻”에 초점을 두셨다. 어떤 기적적인 일을 행하여도 “아버지의 뜻대로”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와 상관 없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한 그들이었지만, 그 일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무관했다.
 
*아!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지 모른다. 겉으로는 주의 이름을 빙자하나, 결국 아버지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을 따라 산 것을 세상과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분명히 아신 것이다. “자신의 뜻, 나의 뜻”을 “주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자기 만족의 일을 했다는 것이다.
 
 
 
2.참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살아간다(24-27절).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을 판가름하는 것은 “말씀을 들은 이후의 삶”이다.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살아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다. “순종과 실천”이 든든한 반석 위에 세운 집인 것이다. 시련이나 유혹의 시험 속에서 끄덕없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이전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 사는 나라가 아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이후 하나님이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중에 여전히 자기들이 이해한 대로,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 이전과 다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루어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뿐이다. 아무리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 업적을 남겼을지라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하며 살지 않는다면 시험이나 환난의 창수가 범람할 때 견디지 못하고 휩쓸려 내려가고 만다.
 
*주여 주여 하는 하들과 모래위에 집을 지은 자들에 해당되는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 뜻대로” 행하는 삶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산다는 점이다. 세상에서는 그의 행위에 박수를 보내고 나름 만족하며 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수와 바람”으로 그것들을 허무신다.
 
*”자기 뜻”을 “주의 이름”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자기 의를 “아버지의 뜻”으로 포장하여 자기만의 집(성)을 쌓아놓고 만족하는 이들을 “창수와 바람”으로 허무하게 무너뜨리신다. 그야말로 헛수고임을 드러내신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창수와 바람에도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내는 반석위의 집과 같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다.
 
 
 
3.놀라는 무리들(28-29절)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무리들이 주님의 권위에 놀라고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다름에 놀란다. 서기관들은 구약의 권위 아래 말하지만, 주님은 율법의 권위 위에서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산상설교를 통해 말씀의 권위자로, 선포자로, 말씀의 기준을 따라 마침내 심판하시는 주님임을 보여주신 것을 바라보고 주님의 가르침에 기이히 여기고 놀란다.
 
하지만 모든 무리들이 긍정적으로 기이히 여기고 놀라기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께서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바라보는 무리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마태는 무리들의 반응에 대하여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정리했다.
 
마태는 무리들이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있게”가르치시는 주님의 모습에 놀랐음에 주목했다. 주님의 말씀에는 살아있는 “활력”이 넘쳤다. 어떤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듣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들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게 하였다. 그래서 무리들은 “놀랐다!”
 
 
*권위있는 가르침에 놀라는 무리들의 모습을 보며, 말씀 선포자의 권위를 고민해 본다. 주님께서 부족하기 그지 없는 입술을 사용하셔서 하난미 나라 복음을 순전하게 선포할 때 듣는 이들의 마음에 놀라는 요동이 일어나기를 사모해 본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놀라는 차원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경고까지 하시면서 당부하신 것 처럼 주님꼐서 가르쳐 주신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좁은 길의 걸음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순종의 걸음을,반석되신 예수님의 터 위에 서서 꿋꿋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도 말씀을 읽을 때, 묵상하여 곰곰히 나의 삶에 빗대어 볼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주님의 가르치심에 놀란 무리들에게 하신 것 처럼 “말씀의 권위”, “말씀이 깨달아지는 충격”에 놀라며 더욱 굳건하게 그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도록 돕고 계심을 믿는다.
 
*2천년전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 안의 성령님의 깨우쳐 주심(조명하심)에 놀라고 반응하여 나의 뜻, 자기 의에 함몰된 화석화된 종교생활이 아닌 “아버지의 뜻”에 반응하는 활력있는 하늘 백성의 삶을 소망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
 
 
 
나는?
-주님의 경고를 통한 당부는 그만큼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좁은 길을 걸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서 굳건히 살아내라는 절실함이 아니겠는가!
 
-주님께서 구원받게 하고 구원받은 자 답게 살아내게 하시려고 이처럼 간절하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가치없게 여기고 “자기 의”에 함몰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한편 무리들이 주님의 가르침에 놀란 이유는 갈릴리 사역의 큰 틀에서 보면 좀 더 명확하다. 주님은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치유하셨다.” 즉 지식을 가르치신 것에 머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지식의 활력을 삶으로 보여 주셨다. 주님 자신이 이미 선포된 하나님 나라 법으로 살아가기면서 가르치신 것이었고, 율법학자들은 그저 배운대로 전달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통과한 가르침이 힘이 있는 법이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까지 30여년을 주님의 삶은 산상설교로 가르치신 내용을 오롯히 살아내셨을 것이다. 누가의 증언에 따르면 12살 되는 해 처음으로 성전에 올라가 절기를 지키고 내려오는 길에 낙오되어 부모가 애타게 찾으며 정전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제사장들과 대화하는 주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라고 말씀 하셨다. 주님은 드러나지 않은 30년의 삶에서도 이미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내셨다!
 
-그의 삶이 가르침의 권위가 되었다. 그렇다.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말씀을 순종하여 살아내는 삶이 영향력의 원동력이다. 전도는 확성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다. 삶에서 보여지고 가르쳐지는 권위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의 일상이 선포하는 가르침의 권위로 드러나도록 더욱 말씀대로 살아내야하지 않겠는가!
 
-배운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지적 호기심과 조금의 만족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권위는 느낄 수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아가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그 길을 걷고 계시기 때문이며, 이 미 그 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동행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삶을 관통한 말씀을 전하고 싶어서 오늘도 말씀의 뜻에,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내 아버지의 품안에서 살라보련다….
 
 
 
*주님, 먼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며 살아내겠습니다. 그리고 삶을 관통한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말씀 앞에 부끄러움이 없을 순 없겠지만, 내가 살아내고 있어서 담대하게 전하고 싶습니다. 힘을 주십시오.
*주님,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곧 좁은 길을 걷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살아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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