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님을 따르는 길[마 8:14-22]
 – 2023년 02월 05일
– 2023년 02월 05일 –
안식일이 끝난 그 날 밤에 베드로의 집에서 일어난 놀라운 치유의 사건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실까?
 
 
 
1.주님의 손이 나를 어루만지실 때(14-15절)
나병환자와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신 주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섰다. 그때 주님의 시선은 베드로의 늙은 장모를 향하였다. 열병으로 신음하는 그녀를 보시고는 다가가셔서 그녀의 손을 만져주셨다. 그 즉시로 열병은 떠나가고 그녀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리고 주님과 제자들, 밀려오는 마을 사람들이 데리고 오는 귀신 들린 자들과 병자들을 기꺼이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주님의 인자하신 손길에 붙잡혀 일어난 베드로의 장모는 완전히 회복되어 그 손으로 주님을 섬긴다. 주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경험한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온 몸으로 맞아들인다. 기꺼이 집의 문을 활짝 열었다.
 
*주님이 내미신 손 때문에 나의 손도 주님께 붙들렸고, 그 손으로 세상과 교회를 기꺼이 섬기기를 주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주님 손 기억하고 굳게 붙잡고 나의 손도 기꺼이 세상을 향해 내밀어 주님께 받은 사랑처럼 사랑을 베풀어야 하리라.
 
 
 
2.주님이 친히 담당해 주신 연약함, 짊어 주신 병(16-17절)
마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사야의 말씀이 성취 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새번역_17절)
 
마태는 주님의 치유사역이 백성의 고통을 짊어지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믿은 것이다. 온갖 병이 들어 연약하기만한 병자들에게 손을 대시고(3절, 15절), 말씀하심으로(16절) 치유하시는 주님의 권능이 개입하자 몸과 영혼의 질서가 다시 회복되어 온전하여졌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정복자요 통치자였지만, 이사야가 질병과 연약함을 대신 짊어지는 종의 모습임을 예언한 대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주님의 치유 사역을 통해 성취 되었다.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쳐 주시는 증거를 통해 이사야가 약속한 메시아의 약속이 성취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는 주님께서 단지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시는 주님이 아니라 죄인들을 대신하여 속죄하시는 구원자로 오셨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님을 세상을 힘으로 통치하는 강력한 왕이기 보다 질병과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긍휼의 왕이시다.
 
 
 
3.주님을 따라가는 길(18-22)
수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에워싸기 시작하였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체하지 않고 이들을 피해 건너편으로 가자고 독촉하신다. 주님을 에워싼 무리들의 관심은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신유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간 무리들이 불어날 수록 주님은 늘 무리에게서 멀찌기 떨어지셨다.
 
그런데 이 날은 좀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일 수도 있다. 이미 날은 저물었는데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자고 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잔뼈가 굶었다. 그런 그들도 밤 바다를 건너가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수많은 무리들의 환호를 뒤로 하고 가야 한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사람들의 환호와 관심보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에 순종하며 가는 길이다. 그 명령이 지금 접하는 인기과 명성을 내려놓으라는 것에도 주저하지 말고 순종하며 바다를 건너가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내 마음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서기관이 주님께 나아왔다. “선생님”이라 부르며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한 것이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널 배를 준비하고 그 위에 오르시기 직전에 주님께 말했을 것이다. 수많은 무리들의 환호성과 주님이 가르침의 특별함, 이전에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서는 들어보지 못한 권세있는 가르침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이 랍비(선생)에게 배우면 자신의 길에도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속마음을 가졌을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새번역_20절)고 하시면서 그의 기대와 다른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설명해 주셨다.
 
*서기관은 예수님 시대 보편적인 제자들이 스승을 선택하는 관습에 따라 자신이 주님을 선택하여 따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주님은 이미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통해 이 관습을 역행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따름으로 기대되는 유익과 만족을 상상하며 주님을 따라가겠노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이런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 질것을 알려 주셨다.
 
*주님을 따르는 동기가 자기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인 서기관의 모습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철저히 자기 부인과 자기 부정의 삶을 살지 않고서는 주님이 걸어가시는 길을 따라갈 수 없다.
 
*나는 어떨까?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기필코 주님을 따르겠노라 고집하고 있지는 않을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길임을 말씀해 주시는 주님을 기꺼이 따라 나설 수 있을까?
 
*위대한 스승처럼 보이는 주님의 길은 발벗고 따라 나서려고 하지만, 머리둘 곳 조차 없는 고난받는 종의 길을 따르겠다는 주님의 제자는 많지가 않다.
 
 
그렇게 서기관에게 말씀하시고 배에 오르시려고 할 때 이번에는 주님의 제자 그룹중 한 제자가 주님께 조심스럽게 여쭙는다. “주여 (주님을 따라 가기 전에)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절)
 
유대인에게 가족의 장례는 중요하다. 그리고 레위기에서는 제사장으 ㅣ직무보다 우선 되는 일로 장례를 꼽았다. 그 정도로 부모님의 장례식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주님께서 이를 모르실 리 없다. 그런데 놀라운 답변을 하신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22절)
 
충격적이다. 하지만 본문의 의도는 중요한 장례식을 포기하라는 패륜적인 행위를 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우선순위의 문제를 지적하신 것이다. 서기관과 달리 “한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삶의 모든 우선 순위가 주님께서 이끄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어야 한다.
 
*주님으로 인해 “산 자”는 가장 중요한 일이 “생명 되신 주님”께 최우선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부모를 장사 지내는 일은 율법의 어떤 명령을 지키는 것보다 더 우선시 되는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율법을 완성하고 더 나은 의의 나라와 삶을 시작하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보다 앞설 수는 없다.
 
*제자로 부름받았다면 주님께서 “건너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주님께서 가시려는 곳에 끝까지 함께 따라가야 한다. 혹시 그 여정에서 이 제자처럼 다른 마음을 품거나 유혹받고 있지 않는가? 유혹 받을 때 더욱 주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하리라.
 
*나는 주님께서 가라 하신 방향을 함께 향하고 있는가? 그 방향을 따라 함께 걸어가고 있는가?
 
 
 
*주님, 사람들의 인기보다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렵니다.
*주님,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주님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걷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겠습니다.
*주님, 제자 답게 머뭇거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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