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기적에 취하기 보다 기적의 주님을 더 알아가도록…[마 8:23-34]
 – 2023년 02월 06일
– 2023년 02월 06일 –
주님의 말씀 앞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한다. 가다라 지방의 두 광인을 옭아맸던 어둠의 권세들도 떠나간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왕권이 임하자 하나님 나라 질서가 바로 세워진다.
 
 
 
1.왜 두려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23-27절)
밤중에 갈릴리 바다를 가버나움에서 출발하여 가다라(거라사)를 향해 가로질러 나아갔다. 주님께서는 연이은 사역들로 인해 피곤하신지 주무시고 계셨다. 그런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 그 거센 물결에 배가 뒤집힐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제자들은 주님을 급하게 깨웠다. 주님께서는 “왜들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라고 말씀하신 후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새번역_24-26절) 사람들은 놀라워 하면서 고백했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새번역_27절)
 
*바다의 광풍과 파도를 잠재우시는 주님이시다. 당시 사람들은 바다는 악한 세력이 거주하는 곳이고 파괴와 혼돈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 한마디”의 꾸지람이면 충분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두렵게 여기는 것이라도 주님께는 피조물에 불과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큰 놀”에 평생 뱃사람으로 살아온 제자들도 혼비백산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껴 절망할 정도의 “큰 놀”이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아수라장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사람들이 좌절하는 큰 놀도 주님의 쉼을 방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님의 쉼을 제자들이 방해한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죽음의 두려움을 내비친다. “큰 놀”이 방해하지 못한 쉼은 제자들의 아우성에 끝이난다. 주님은 “큰 놀”에게는 꾸짖음을 제자들을 향하여는 아쉬움을 표하신다.
 
*인생의 항해 중에 큰 놀을 갑작스레 만날 수 있다. 삼키려고 덮치는 그 놀앞에 두려움에 더 무릎꿇을 수 있다. 그러나 “큰 놀”을 향해 꾸짖어 잠잠케 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잊으면 안 된다. 그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큰 파도 속에서도, 죽음의 위험으로 가득한 세상 한 가운데에서도 고요히 주무시고 쉼을 누리시는 주님의 평안을 소망한다. 그 평안이 절실하다.
 
 
 
2.가다라(거라사) 두 광인을 해방시키시다(28-34절)
큰 놀이 복종하는 주임의 권능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에 배는 가다라(거라사) 지방에 다다랐다. 그런데 그곳에는 몸시 사나운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사이에 있었다. 사람들은 감히 그 길을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28절).
 
그런데 그 둘에게 들린 귀신들이 먼저 주님 앞에 소리를 지르면서 주님의 빛 앞에 섰다. 그 둘은 마침 멀리에 모여있던 돼지떼를 가리키며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한다. 주님께서는 “가라”명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떼로 들어가고 온 떼가 그대로 내달아 갈릴리 바다로 들어가 몰살당한다.
 
 
*주님께서는 악한 세력에게 억눌린 두 사람에게 자유함을 선물해 주신다. 귀신들을 주님을 향하여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오셨습니까?”(새번역_29절)라고 외쳤다.
 
*귀신(악한 세력)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옭아메고 통제하여 조정했다. 주님께서는 그 존재들을 향하여 “가라”고 명령하셨다. 이에 주저함 없이 근처 돼지떼에게 들어갔고 귀신이 들어간 돼지떼들은 주체하지 못하고 비탈을 내달아 바다로 빠져들며 죽었다.
 
*귀신은 두 사람을 사회로부터 단절 시키고 소외감 속에 철저히 억눌리게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주님의 방문에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벌써 이 일을 하는가?” 따지듯 묻는다. 이들의 절규를 통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가 밝게 드러났다. 큰 놀, 바다의 풍랑 뿐 아니라 귀신도 주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한편 귀신들린 두 사람을 치유해 놓았더니 마을 대표자들이 와서 두려워하며 공손하게 부탁한다. 겉으로는 주님의 권위를 감당할 수 없어 떠나달라는 간청처럼 보이지만, 되지떼 삼천마리가 몰살 당하는 것을 보고 손익계산에 빨랐던 것이다. 귀신 들렸던 두 사람처럼 그 지방에 있는 무수한 병자들, 약한자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분명한 기회가 될 수 있음에도 경제적인 손실 계산에 주님을 밀어내고 있다.
 
*자기 계산, 자기 유익의 가치에 함몰된 이들은 이웃의 회복이 달갑지 않다. 오히려 그 둘 때문에 돼지 삼천마리가 몰살당했다고 투덜거리는 모양새가 역력하다. 영혼의 가치보다 물질의 가치가 더 소중한 이들에게 구원의 문제는 실로 관심밖의 영역이 분명하다.
 
*가다라 주민들이 주님을 밀어내는 모습은 가버나움에서 예쑤님을 에워싸던 모습과 비교가 된다. 하나님의 능력의 권세를 아는 이들과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이 바라본 귀신을 쫓아낸 사건은 이렇게 다른 반응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좋은 소식,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돼지떼를 몰살한 귀신보다 더 강력한 귀신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거부한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따라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오른 이들은 수많은 무리가 아닌 소수의 제자들과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그저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큰 놀 속에서 아우성 치는 제들에게 주님께서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새번역_26절) 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물리적으로 늘 주님과 함께 있었지만, 주님의 주님되심이 아직은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했다.
 
-이보다는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놀라는 것을 보면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직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움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잘 모르는 것이다.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따르고만 있는 것이다. 수많은 무리들이 주님의 치유사역에 열광하고 따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가다라 지역의 유명한(?) 두 광인을 옭아매던 귀신들이 주님께 반응하는 소리를 똑똑히 듣는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새번역_29절)
 
-제자들은 세례요한의 세례장소에서 주님이 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 하늘에서 들렸던 그 소리과 같은 소리를 귀신의 입을 통해 다시 듣는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는 바람과 파도도 무릎을 꿇고 귀신들도 먼저 알아보고 두려워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했다. 지난 밤에 바람과 파도가 주님께 순복하듯 자신들도 주님께 순복해야 한다는 것과 귀신들도 두려워 하는 것처럼 자신들도 주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제자로 부름받자마자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씩 하나씩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내려놓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가 분명하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좁은 길을 차근 차근 멈춤없이 걸어가야 할 때라는 것이다.
 
*제자들도 주님을 따르는 길이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하난미 나라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며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여 주시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차근 차근 배워 나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믿고 살아내는 인생이라는 시간들은 주님과 함께 걷는 삶을 차근 차근 잘 보고 잘 배우고 잘 익혀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성급하게 먼저 완전하려하지 말고 매일 매일 허락되어지는 주님과 함께 가는 여정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주님을 알아가고 동시에 제자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어쩌면 당시 제자들보다 기록된 주님의 말씀이 완성된 지금 주님의 모습을 더 잘 알수 있지만, 제자들의 주님과 함께 하는 영성과 삶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적은 믿음”인 지금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한 믿음”으로 나아갈 것을 확신하기에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더욱 붙잡으련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역사에 잘 순종해 보련다.
 
 
 
*주님,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외치시는 주님의 마음을 보며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이나 저의 모습이나 오십보 백보인듯 하여 더욱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걸어가는 태도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주님을 밀어내는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의 이기심과 무지가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나에게도 있지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주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겠습니다. 깨닫께 해주실 때 더욱 주님께 가까이 서도록 힘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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