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님의 손을 얹어만 주셔도,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하여도 [마 9:14-26]
 – 2023년 02월 08일
– 2023년 02월 08일 –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주님에 대항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의문을 제기하며 금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지금은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누리며 기뻐할 때라고 말씀해 주신다. 두 번째 기적 이야기들의 결론을 금식에 대한 가르침으로 결론을 맺는 것이다. 세 번째 기적 이야기 묶음의 시작은 관리의 딸을 살리시는 기적과 열 두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치유하신 기적이 한 쌍으로 묶였다. 아버지의 믿음이 죽은 딸을 살리고 혈루증 걸린 여인의 믿음이 그를 지독한 병마에서 자유하게 한다. 무엇보다 “손을 얹어주소서, 겉옷만 닿기만 해도”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이 큰 도전이 된다.
 
 
 
1.금식 논쟁(14-17절)
주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후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왔다. “금식”에 대하여 질문하는데, 금욕적 색체가 강했던 스승은 현재 투옥중이어서 더욱 금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님과 제자들은 잔치를, 바리새인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는 짙은 아쉬움이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을 통해 금식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이어가신다. 혼임집에서는 당연히 잔치를 해야 한다. 슬픔이 아닌 기쁨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의한 상황으로 신랑을 빼앗기게 되면 그때는 잔치가 아닌 금식을 해야 한다고 하신다. 주님의 현재 사역과 앞으로 마주할 고난의 사역의 의미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주님과 함께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지금은 잔치의 때라는 것이다. 복음이 선포되고, 병자가 치유되고 귀신들린 자가 자유케 되는 지금은 기쁨의 연회의 자리와 같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치유와 회복에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지만 신랑을 갑자기 빼앗기게 되면 금식해야 한다.
 
주님으로 인해 시작된 새 시대와 구약의 옛 시대의 금식을 “새로운 천 조각을 낡은 옷에 덧대지 않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 새 천조각의 당기는 힘을 헌 옷감이 감당하지 못하여 찢어질 거시고, 새 포도주가 발효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압력을 오래된 가죽 부대가 감당하지 못해 터지고 만다. 옛 것과 새 것을 대조하여 새 것이 갖는 힘을 옛 것이 감당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즉, 주님과 함께 하는 시대는 금식해서는 안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 시대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옛 구약의 질서가 감당할 수 없다. 이방인들, 죄인들과 함께 하는 잔치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참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새 시대를 가져왔다. 금식은 유익하지만 지금은 금식의 시대가 아니라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희락의 시대이다. 선지자들이 고대했던 바로 그 날이 왔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용서받고 , 구원의 은혜가 넘치는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이 메시아 되신 예수님께서 곤나 받을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울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울어야 할 고통과 누려야 할 기쁨이 공존한다. 이미 예수님께서 주신 회복의 은총과 앞으로 있을 온전한 날을 소망하면 소망하면 기뻐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제의적인 정결법의 한계에 묶여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 여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이 정한 정결, 제의적인 정결의 한곌르 넘어 “거룩함”을 추구한다. 이러한 시대에 전통을 고집만 하고 있다면 정신을 잃어버린다. 내게 익숙한 것만 고집하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누리지 못한다. 그저 익숙한 형식에 갇힌 삶에 머문다. 더 나아가 자기 의가 가득한 삶을 살게 된다.
 
 
 
2.딸을 살려달라는 믿음, 겉옷에 손만 대어도 낫겠다는 믿음(18-26절)
딸이 막 숨을 거둔 절망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마가와 누가는 회당장 야이로라고 소개하지만, 마태는 무명으로 기록했다. 그는 죽은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마가는 이 아이의 나이를 열 두해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투병 횟수와 평행하여 열 두살로 기록했다(막 5:42). 그는 주님께서 죽은 딸 아이에게 손을 엊어 주시면 살아날 것이라는 절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이내 걸음을 옮기신다. 제자들도 주님을 뒤따랐다.
 
*제자들은 이 걸음을 함께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
 
그런데 이 급한 걸음에 뜻밖의 상황이 발생한다. 열두 해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이 그 무리들 사이로 끼어들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다. 혈루증은 부정한 질병으로 규정한다(레 15:1-12, 25-30). 부정한 그녀가 만지면 모든 것이 부정해 진다. 그렇기에 이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 철저하게 공동체로부터 격리된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율법을 어기고 은밀하게 무리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다면 이 저주스런 질병에서 자신의 몸이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이 부정하게 되겠지만, 도리어 주님을 만지면 자신이 깨끗하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몰래 만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이것을 주님이 단박에 알아보셨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새번역_22절) 기나긴 병으로 인해 공동체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격리되었던 그녀에게 “딸아” 라고 불러 주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주셨다. 여인은 주님이 옷자락을 만졌지만, 주님은 그녀의 마음에 하늘 아버지의 딸이라는 구원 받은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셨다.
 
 
한편 관리와 함께 부지런히 그의 집에 가신 주님은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들에게 “모두 물러가거라.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새번역_24절) 라고 말씀하셨다. 당연히 사람들은 비웃었다. 이미 장례 절차는 보통 사망이 확인되면 하루가 되기 전에 매장을 하는 관습에 따라 신속하게 진행 되었을 것이다. 죽은 자의 마지막 장례 절차가 진행 되는 곳에 주님께서 들어오신 것이다.
 
*사람들은 생명의 주님께서 오셨어도 어떤 희망을 기대하지 않았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철저히 여겼기 때문이다. 이미 끝난 것을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되돌릴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표현하셨다.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리들은 믿지 않고 비웃었다.
 
*주님은 소녀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셨다. 그리고는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곧바로 소녀는 일어났다(25절). 개역개정은 “일어났다”로만 번역을 했지만, 다른 번역본은 “벌떡 일어났다”고 더 극적으로 번역하였다. 완전한 생기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축 늘어진 상태로 회복이 된 것이 아니라 건강한 상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다.
 
*마테는 모든 주위의 반응에 대해 철저하게 생략했다. 오직 치유함과 다시 살아난 소녀가 예수님으로 인해 치유와 소생의 기적을 맛보았다는 것을 담백하게 기록했다. 이 한쌍의 기적 이야기는 다른 것 보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의 위대함을 한층 더 강조하였다.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고, 귀신을 제어하며, 온갖 부정한 질병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깨끗케 하시며, 죽음조차 압도하는 예수님의 권위가 그 온 땅에 퍼진 것이다.
 
 
 
나는?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이는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에서 언제나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지침이다. 구약의 외적 형식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포하시고 더 나은 의로 알려주신 하나님 나라 백성 답게 살아내는 의미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틀에만 집착하는 신앙이 아니라 그 솜에 함의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일상에서 누리는 삶의 중요성을 말한다.
 
-기존의 유대교의 한계는 분명하다. 늘 정죄하고 판단하며 본래의 뜻이 왜곡되어 사람을 옭아맨다. 정작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려고 하락하신 제사법은 이미 일상의 삶을 경직되고 도리어 정죄당하는 구실이 되어 버렸다. 옛 계명(구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수한 인간의 생각들이 가미되어 이미 그 뜻에 멀어져 버렸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주신 본질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는 그 방식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없다.
 
-이미 왜곡이 바탕이 된 유대교의 전통과 계명들은 백성들의 영혼을 자유하게 할 수 없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새롭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법을 따라 살아가야 함을 이미 가르치셨다. 그리고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방식의 삶을 보여주고 계신다. 그러나 기존의 방식에 익숙하고 전통의 굴레에 맞춰진 이들에게는 매우 거북스러운 모습이었고, 하나님 나라에 초청되어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죄인들에게는 이미 하나님 나라 구원의 잔치에 동참하여 기쁨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한 관리(다른 복음서에는 회당장)의 믿음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기존 유대교의 방식에 철저히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삶의 방식에서는 생가지도 못할 믿음을 행사한다. 그것은 죽음 앞에 무력하기만한 세상에서 “주님께서 죽은 딸의 몸에 손을 엊어 주시면 살아나겠다”는 믿음으로 감히 꿈꾸지 못했던 생명의 구원을 바라본 것이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의 믿음도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낫겠다”는 소망을 충분히 품게 하고 기존의 정결법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치유됨의 간절한 소망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무리속에 계신 주님께 나아왔다. 부정함의 율법의 체계에서는 내딛을 수 없었던 것을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서는 치유함의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온 것이다.
 
-죄와 사망의 세상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정죄와 심판의 세상에서는 감히 나설 수도 없었던 믿음의 걸음이 주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담대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손이라도 얹어 주시면….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이 가능하게 했고, 이 믿음에 화답하여 살려주시고 치유하여 주시는 주임의 능력이 부활과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듯 소망을 주는 나라이며, 소망이 실제가 되는 역동적인 나라이다.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소망을 믿음으로 행하여 누리는 나라이다. 소망이 실제가 되게 하는 것은 “믿음”이었다. 주님 손 얹어만 주셔도,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이라는 믿음이 소망을 누리게 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방식, 지금껏 익숙한 종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다면, 소망을 누리기 위해 믿음으로 도전하여 지금껏 익숙한 경계를 뛰어 넘어야 누릴 수 있는 나라이다. 죽음이 주는 좌절감이 아니라 주님의 손을 얹어 주시면 다시 살겠다는 믿음, 혈루증이라는 부정한 질병으로 인해 스스로 격리되어야만 했던 옛 율법의 경계를 뛰어 넘어야 누릴 수 있는 나라다.
 
 
 
*주님, 저에게도 주님의 손만 얹어주시면,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이 나라 안에서 이미 살고 있는 기쁨으로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 소망을 품게 하고 믿음으로 살게 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 답게 전하고 가르치고 살아내는 삶을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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