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홀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사… 묵상과 기도의 산에 오늘도 오르리라 [마 14:22-36]
 – 2023년 02월 28일
– 2023년 02월 28일 –
오병이어 기적 후에 급히 제자들을 배에 태워 바다 건너편으로 돌려보내신다. 그리고 홀로 산에 올라 기도하신다. 배로 바다를 거너던 제자들은 새벽에 큰 풍랑을 만나 곤란에 빠졌고, 주님께서는 물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로 다가오셨다. 놀란 제자들 사이오 베드로가 자신도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주님께서 허락하셨고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다. 하지만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다 물에 빠졌고 주님은 그를 구해 배에 오르신다. 바람이 그치고 배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다. 게네사렛 땅에 이른 주님을 알아보고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데리고 나오고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
 
 
 
1.감격의 잔치 뒤, 홀로 기도하신 예수(22-23절)
오병이어의 기적은 풍성한 만족과 너미치는 기쁨이 있었다. 주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생명 잔치의 단상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흥겨움과 감동, 즐거움이 가득 한 현장에서 제자들을 “재촉하사(아낭카조_억지로나, 강제로 시키다. 강제하다)” 잔치 자리를 떠나게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마태는 본문에서 그 이유를 제자들과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23절) 가셔서 저물어 혼자 계셨다는 기록을 통해 기도하기 위해서 였음을 상기시킨다. 이는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건너편으로 오실 때부터 목적했던 일로 추측한다. 해가 저문 시점부터 제자들을 새벽에 만나러 가실 때까지 상당한 시간을 홀로 기도하셨다.
 
*주님께서 홀로 있고 싶으셨다. 요한의 참수 소식을 듣자마자 배에 오르셔서 움직이신 것은 무리들에게 방해 받고 싶지 않아서 였다는 것을 염두해야 한다. 하지만 무리들은 주님을 앞서서 건너편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은 민망히 여기셨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해가 저물어 갈 때쯤 말씀을 마치셨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배고팠고 마을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주님은 이들을 그저 보내지 않고 하늘 잔치를 베푸시고 그 안에서 누리도록 하셨다. 그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저런 바쁨과 일정 때문에 기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을 때가 꽤 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한 단면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흥분과 감격의 분위기를 두고 두고 누리도록 하기보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이기에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다. 사역은 미루더라도 하나님과의 교제는 결코 빠뜨리거나 건너 뛰거나 하지 않았다. 성실하게 주님과의 만남을 유지하셨다.
 
*특히 오병이어와 같은 흥분과 감동의 시간 뒤에도 기어코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기 위해 잔치상을 먼저 정리하셨다. 나는 어떨까? 오히려 반대 일수 있겠다. 기도보다 사역을 더 이어가려 했을 것이다. 주님과 나의 간격은 이토록 멀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주목받고 칭찬받으며 명예를 얻고 사람들이 부르는 곳이 많아질 수록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가 더욱 더 유지되어야 한다.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믿음의 힘으로 살아내는 비결이다.
 
*문맥의 흐름상 세례 요한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바라보게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에게 필요한 것은 점점 다가오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직면할 용기가 필요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죽음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도록 담대함이 필요하셨을 것이다. 
 
 
 
2.물위를 걸으신 주님_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4-33절)
한편 먼저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수 리나 건너가던 제자들은 예기치 못한 돌풍(바람)을 만난다. 마태는 이 상황을 “고난을 당하더라(바사니조_고문하다, 고통을 주다)”고 기록했다. 그만큼 혹독하게 힘겨운 돌풍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또 “밤 사경(새벽 3~6시)”이라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시각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밤을 세워 기도하셨다는 것과 제자들은 밤을 세워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만만치 않은 돌풍을 만났다. 밤 세워 그 돌풍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이른 새벽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셨다. 동이 트기 직전, 아직은 어둠이 마지막 기승을 부릴 때 그 어둠을 꿇고 물위를 걸어오는 자가 있다면 결코 사람일 수 없다. 제자들은 “무서워 하여(새번역_겁에 질려서_26절)” 소리를 질렀다(크라조_크게 소리 지르다). 제자들의 반응은 돌풍과 사투를 벌이고 지쳐있는 상태에서 소름끼치도록 두려운 것이었다. 돌풍과는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당시 유대문화에서는 혼돈의 바다를 발로 밟고 오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는(합 3:15) 인식이 있었다. 바람과 파도가 일러이는 것은 바다의 혼돈의 신이 역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밤 사경에 물 위로 걸어오는 형체가 자신들이 ‘거스르는 바람’에 사투를 벌이게 한 혼돈의 신으로(유령으로) 착각할 만 하다. 제자들은 경악하며 놀랐다.
 
하지만 주님은 배에 가까이 오시며 즉시 제자들을 안심시키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절) 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사용하시던 용어들이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에서 고난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상 함께 하여 주심을 약속하시는 하나님꼐서 주로 사용하신 용어였다. 특히 “나니(나다_에고 에이미)”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 주실 때 알려 주신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계신다. 연악하고 아직은 깨우치지 못하는 제자들은 그저 돌풍과 파도 속에서 극도의 두려움만 있을 뿐, 이 기막힌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베드로가 반응한다. 한술 더 떠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제안을 주님께 드린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새번역_28절). 정말 무모해 보이는 베드로의 반응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 일어난 일이기에 아직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그 흥분과 감격이 사그라들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과 함께할 때 어떤 능력과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지 직접 경험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정말 주님이시라면 자신도 동일한 기적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오라”명령하셨다. 베드로가 배 밖의 넘실대는 바닷물에 발을 내딛었다. 주님께서 계신 곳으로 한발 한발 걸어갔다(29절).  분명 믿음 아니면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부는 바람과 다시 두려워 했고 몸이 물속으로 빠져갔다. 이번에는 주님께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소리친다(30절).
 
마태는 베드로가 물 속에 빠져 들어간 이유를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새번역)” 이라고 했다. 그의 시선이 주님에게서 바람으로 옮겨 간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나기 전 치유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큰 무리의 굶주림을 바라보고 있었던 그 모습처럼 말이다.
 
*주님을 바라보며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는 바람과 파도를 보자 그만 물에 빠져 버린 것이다. 8:23-27의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일어났던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그때도 제자들은 주님보다 풍랑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미 이 때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주님이신 것을 경험했지만, 베드로는 그만 거센 바람을 바라보면 그때와 동일하게 “주여 나를(우리를) 구원하소서!(30절, 8:25)” 외친다.
 
*주님께서도 8:26과 동일하게 “믿음이 작은 자(적은 자)”라고 책망하시고, 베드로가 “의심”하였다고 꼬집으신다(31절). 영적인 영역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특히 본문을 통해 신앙은 언제나 믿음의 대상이 누구로 삼느냐의 싸움인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수님을 바라보느냐, 아니면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느냐의 싸움이다.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신 주님께 배 위의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으며 경배하였다. 주목할 것은 배 위의 제자들에게서 동일하게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고백이 흘러 나왔다는 것이다(33절).     
 
*누구를(무엇을) 바라보느냐의 싸움을 기억하자…
 
 
 
3.게네사렛 치유 사역_주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누구라도 모두 나았다(34-36절)
주님의 사역은 쉴 틈이 없었다. 밤새 바람과 파도와 싸우며 도착한 곳은 게넷사렛 지역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주님을 금새 알아보았고 인근 주민들에게 이 소식을 알린다. 병든 자들이 다시 주님께 모여 들었다.
 
마태는 특히 병을 치유받기 위해 모여든 병자들의 태도에 주목한다. 그들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해도 자신들의 병이 치유될 것을 믿었고 실제로 그 믿음대로 치유받는다. 이미 9장에서 열 두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치유기사에서(9:20-21) 이와 같은 치유가 일어났었다. 이들의 믿음은 “믿음이 적은(적은) 자”라고 책망 받은 베드로의 믿음과 대비된다.
 
 
*결국 갈릴리 호수를 끼고 일어난 세 가지의 사건, “오병이어,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치유된 기적”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강조한다. *믿는 자는 놀라운 기적에 동참하게 된다.
 
 
 
나는?
-주님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 도취되지 않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야 할 사명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기도하셔야 했을 것이다. 이런 주님의 모습이 내가 걷고 감당해야 할 목양의 길을 바로잡아 준다. 나도 역시 주님께서 놀라운 은혜들을 부어주시는 감격스런 현장에서보다 주님과 더욱 깊이 교제하는 말씀묵상과 기도의 자리를 내내 지키며 나가야 하겠다.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현장을 경험하고,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에 대한 반응을 통해 확립하고 확립해야 할 것은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새로운 일을 창조하실 주님의 능력과 권위를 믿어야 했다. 게네사렛 사람들의 믿음과 제자들의 믿음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나으리라는 믿음으로 실제로 치유받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밤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서의 자신들의 믿음과 어제 베세다 들녘, 빈 들에서의 자신들의 주님을 향한 모습과 분명히 대비되었을 것이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도전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 늘 사역의 현장에서 주님을 놓치기 일쑤여서 불안하고 염려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베드로의 모습처럼 어느때는 담대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뮐 위로 발걸음을 내딛는 믿음이었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놀라 물 속에 빠져드는 모습도 영락없는 나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이 말씀을 통해 꼭 붙잡는 것은 제자들과 무리들을 다 보내신 후 “홀로 산에 오르사” 기도하신 주님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또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간절히 주님께 나아와 치유함을 얻는 게네사렛 주민들의 모습도 잊으면 안된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무엇보다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홀로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는 산(목양실)에 늘 올라야 하겠다.” “주님을 옷자락이라도 만지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붙잡고, 기도 가운데 깨닫게 해주시는 성령의 깨우침을 바라리라!”
 
*주님과 함께 있는 바람과 파도 치는 바다가 더 이상 두렵지 않고, 주님이 계신 곳에 나아가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온 게네사렛의 병자들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기를 갈망한다.
 
*결국 믿음이다.
 
*결국 주님만 바라보는 영적 집중력이다.
 
*결국 주님과 함께 있으면 된다. 함께 동행하면 된다. 말씀 안에서 교제하고 기도 가운데 누리면 된다. 그것이 목회다.
 
 
 
*주님,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홀로 말씀의 교제와 묵상의 산을 늘 오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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