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경계를 넘어선 하나님 나라 복음 [마 15:21-39]
 – 2023년 03월 02일
– 2023년 03월 02일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격한 논쟁을 마치신 주님은 급히 이방 지역으로 들어가신다. 주님의 사역 무대가 이스라엘 울타리를 넘어가는 지점이다. 거기서 한 여인을 만난다. 주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앞으로 펼쳐질 가나안 여인과 칠병이어의 사건은 가버나움 지역의 백부장 이야기와 오병이어 사건과 궤를 같이 하지만 특별히 이방인 역시 주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충만히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하시는 사건이다. 특히 가나안 여인의 남다른 믿음은 주님 안에서 이방인들이 누릴 구원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치유사역과 칠병이어 역시 갈릴리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주님 안에서의 충만한 구원을 경험하는 이방인들을 소개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모든 이들을 위한 복음이다.
 
 
 
1.가나안 여인의 “부스러기 조차”의 믿음(21-28절)
주님께서 갈릴리 북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올라 가셨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선명하게 보여 주시려는 의도이시다. 여기에서 가나안 여인과 마주하게 된다. 그녀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린 절박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왔다. 여인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22절)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이방 여인이 이렇게 부를 수 있을까 생각되지만, 여인은 다윗의 자손 예수님에게 긍휼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실 때는 긍휼을 구하는 이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지만, 이 여인에게는 다른 반응을 보이신다. 마태는 주님께서 일체의 반응이 없는 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여인이 처음 주님께 “나와서” 소리를 질렀지만(22절), 대답없는 주님의 반응에 “뒤에서”(23절) 소리를 지르게 된다. 주님의 냉대는 매우 충격적이다.
 
또 제자들의 반응도 호의적이지 않다. ”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새번역_23절) 주님은 철저히 냉대하셨고, 제자들은 소리를 계속 지르는 여인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마지못해 주님께 여인이 귀찮게 하지 않도록 돌려보내시라고 말씀을 드린 것이다. 치유해 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의 이방인에 대한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주님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새번역_24절)라고 하시며 철저히 외면하신다. 이 틈에 여인은 쏜살같이 주님 앞으로 나와서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도와달라며 다시 간구한다(25절). 주님은 계속해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새번역_26절) 하시며 거듭 외면하신다. 그러나 여인 역시 포기하지 않는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새번역_27절)라고 고백한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고백인 것이다. 이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이제까지와 다른 반전의 선언을 하신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새번역_28절)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러 오셨는지를 정확하게 보게 해 준다. 
 
*부스러기 은혜만이라도 달라는 여인의 간절함이 뚝뚝 묻어난다.  자신의 자격 없음을 인정하며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하는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길은 헛된 자부심이나 말씀 소유의 여부가 아니라 은혜를 갈급하는 마음이다. 나에게 그런 마음이 메마르지 않기를 소망한다.
 
*갈릴리 지역을 벗어나 두로와 시돈으로 넘어가신 것 만으로도 이방 땅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친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 것만으로 그저 만족하는 것은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 가나안 여인처럼 갈급하며 실제로 누리기 위해 소리지르며 나아와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갈급함이 아닐까? 말씀에 대한 지식이 풍성해져 갈 수록 은혜를 사모하는 갈급함도 더불어 풍성해져 가고 있을까?
 
 
 
2.산에 올라가 앉으시니(29-31절)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시작하고 가르침을 시작하실 때의 도입문구와 동일하다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29절, 5:1) 무리들(이방인들)이 나아왔다. 그리고 가르치셨고, 치유해 주셨다. 이방지역에서의 사역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그때는 유대인들이 말씀과 치유의 은혜를 입었지만, 지금은 이방인들이다.
 
이방인들의 치유사건은 이방인들 역시 믿음을 통해 유대인이 받은 권리와 특권을 함께 누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마태복음의 주된 관심은 유대인의 구원이지만, 이방인의 구원 역시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치유해 주신 내용(30-31절) 또한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이(사 35:5-6)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주님께서 이방인들과 사흘 동안(32절) 함께 있을 동안 칠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던 것이 분명하다. 말씀의 가르침과 치유의 분명한 증거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분명한 변화로 나타났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반응하면 그 나라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3.이방인에게도 하늘 잔치의 풍성함이(32-39절)
이방지역, 이방인들이었지만 주님께 말씀을 들으려고 사흘을 기꺼이 보낸다. 고향에서 받지 못한 환대와 존경을 이방지역에 받으셨다. 주님은 말씀을 듣기 위해 자신들에게 먹을 것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사흘동안이나 따라다닌 무리를 굶겨 보내지 않으셨다(32절).
 
제자들은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지만, 다시 빈 들에서 큰 무리들이 굶주림에 직면하자 당황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 빈 들에서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느냐고 회의로 가득하다(33절).
 
*은혜를 경험 했지만 불신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고난이나 어려움에 직면할 때 이전에 베푸셨던 주님의 행하신 은혜들을 붙잡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리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하늘 잔치를 베푸셨다.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는 인종에 상관없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허락하신 하늘의 떡을 이방인 여인에게도 주신 것처럼 이방인 지역에서도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늘의 성찬을 허락하신다. 이 하늘의 잔치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임하였다.
 
 
 
나는?
-주님께서 사용하신 “개”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다.
 
-주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사용한 “개”라는 단어는 “쿠나리아(반려견)”이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쿠신(들개)”과 차이가 분명하다. 이는 가나안 여인이 주님께서 사용하신 단어를 듣고 그 말씀에 담긴 의도를 읽는 지혜가 있었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여인은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라고 한 것이다. 가나안 여인 역시 주님께서 사용하신 단어인 “쿠나리아”를 사용하여 간청하였다.
 
-주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여인을 칭찬하실 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 라고 하셨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한 이는 백부장을 포함하여 모두 이방인이다. 마태는 이 사실을 빼놓지 않고 기록하여 이방인 유대인보다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마 8:11-12)는 주님의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이단적인 주장이었다.
 
-“가나안 여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분명한 간극을 선명하게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마태는 굳이 이 단어를 차용한다. 반대로 가나안 여인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친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은 매우 의외였다. 가나안 여인의 외침에 감격하실만도 하지만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으시다가 제자들이 채근하자 시큰둥하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쿠나리아_반려견)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단순하게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의 의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매우 의도적인 기록이다.
 
-직전 본문에서 안식일과 정결 문제등으로 시비를 걸어 주님을 대적하는 유대인,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과 분명한 대조를 할 작정인 것이다. 즉,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주님의 메시아되심(다윗의 자손)을 한사코 부인하고 부정하는데, 유대인들로부터 개(쿠신_들개) 취급을 당하는 가나안 여인은 주님을 깊고 끈질기게 신뢰하여 “다윗의 자손(메시아)”로 호칭하고 있는 것을 대비시키고 싶은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께 무안 당하고 거부되면서도 끈질기게 긍휼을 구한다.  이것을 큰 믿음이라고 인정하신 것이다. 반면 정통 유대인들은 스스로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것처럼 자부하지만, 주님을 무안주며 끈질기게 무시한다. 심지어는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더 우위에 놓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외식한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가나안 여인과 같은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이들이 하나님의 “쿠나리아(반려견)”이고 정통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경계하는 “쿠신(들개)”인 것이다.
 
*나는 “쿠나리아일까? 쿠신일까? 오늘 묵상이 주님께 인정받는 거룩한 쿠나리아가 복받은 인생임을 깨닫게 된다.
 
 
 
*주님,  하나님 나라 복음이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어서 오늘 나도 그 긍휼을 입었음을 깨닫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경계를 넘어서 주신 주님의 발걸음이 있었기에 제자들도 예루살렘과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저도 믿음으로 경계를 넘는 것에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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