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마 16:1-20]
 – 2023년 03월 03일
– 2023년 03월 03일 –
유대로 돌아오신 주님을 향해 종교지도자들의 도전이 시작된다. 시험을 목적으로 표적을 구하는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질타하신다. 또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누룩(교훈)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신다.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직접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드린다. 본문은 주님의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하는 단락이다.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도 갈릴리에서는 마지막이다.
 
 
 
1.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1-4절)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돌아오신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다.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이 두 부류가 함께 등장한다. 이 그룹은 성격이 매우 다른 집단이었다. 그럼에도 주님을 공동 타켓으로 삼고 연합한다. 
 
그들은 다짜고짜 주님께 하늘의 표적을 행하시기를 구한다. 이에 주님께서는 날씨와 관련된 속담을 통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무지를 질타하신다. 날씨 분별은 현재의 현상을 통해 볼 수 있는 직관적인 것이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내일 날이 좋다. 아미에 하늘에 붉고 희리면 궂을 것이다. 이는 매우 일반적인 지혜이다. 그러나 시대를 분별할 지혜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하늘로부터 메시아가 왔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분명한 증거들이 차고 넘쳤지만 분별하지 못하고 또 다른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그들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규정하셨다.
 
*시대의 표적은 하나님 나라에서 펼쳐지는 주님의 모든 사역을 가리킴과 동시에 주님 자체를 의미한다. 주님께서 친히 밝히신 것 처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 이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 예루살렘 사역(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으로 드러난다. 주님께서는 이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시면서 갈릴리 지역에서 떠나셨다. 사실상 종교지도자들과는 갈릴리 지역에서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는 이미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표적을 감사히 믿고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또다른 표적을 달라고 요구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가?
 
 
 
2.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5-12절)
주님과 제자들은 다시 갈릴리 바다를 건너 어딘가로 향한다. 갈릴릴 바다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이동하셨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이 여행을 위한 음식(빵) 챙기는 것을 잊고 만다. 하지만 이 실수가 주님의 주옥과도 같은 교훈을 이끌어 낸다.
 
주님께서는 빵을 챙기지 못해 당황하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 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들어오질 않는다. 서로 빵을 챙겨오지 못한 것을 이야기 한다(5절).
 
주님께서는 빵을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없는(적은) 자들”이라고 꾸짖으신다(8절). 제자들은 이미 빵이 없어도 수천 명이 먹고도 남음이 있는 두 번의 기적을 체험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빵을 걱정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샌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그들의 “교훈”을 가리킨다. 빵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나 이것에 집착하면 동시에 내면에서 염려가 커진다. 종교지도자들의 최대 관심은 빵이었다. 그들은 많은 빵을 확보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다. 이렇게 탐욕으로 부풀어 오른 삶의 방식이 바로 “누룩”이다. “누룩”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하나로 만들 만큼 강력하기 그지없다.
 
제자들은 단순히 먹을 빵을 가져오지 않아서 염려했다. 즉 먹을 빵이 없는 것에 염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제자의 삶의 방식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제자들은 이미 빵을 배불리 먹은 두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 조금만 틈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와 내면을 흐트려뜨리는 누룩을 늘 경계해야 할 것이다.
 
*기적을 경험하고도 영적인 깨달음이 없어 금방 잊어버린 제자들에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말씀 하신다. 혹시 나으 ㅣ삶은 어떨까? 주님께서 탄식하시며 “아직도?”를 반복하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사모한다.
 
 
 
3.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13-20절)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까지 옮기신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드러 내셨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는지 물으셨고, 무엇보다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물으셨다.
 
먼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한 분이 아닐까 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한다. 그러자 주님이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신 것이다.
 
이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였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시며 이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러한 신앙고백을 한 이들을 교회로 세우고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을 약속하신다. 동시에 천국의 열쇠도 주시겠다고 하셨다. 물론 주님의 그리스도되심을 아직 사람들에게 이르지 말라고 경고까지 하신다.
 
*하나님 나라 왕으로 오신 주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여전히 부족함을 드러냈다. 가이사랴 빌립라는 도시는 헤롯 빌립왕이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황제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도시를 세우고 건립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있었고 학자들은 주님께서 그 신전이 세워진 거대한 바위산 위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가짜 왕들의 도시 한 복판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신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 곧 주님께서 만왕의 왕 되심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사람들은 엘리야나 예례미야가 다시 온 것으로, 또는 그런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사람들의 이해는 자신들의 지식과 기대, 이제껏 지켜온 신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주인이 왔음에도 그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상 왕들의 주인으로 보고, 자신들이 주인 삼은 것에 매여 알아보지 못한다.
 
 
*이와같은 인식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주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하신 것이다. 주님은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가르치고 치유하심을 통해 이를 증거하신 것은 결국 주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주님께서 주원받은 백성들의 삶을 여러 은혜의 모습들로 채우시고 이끄시는 것은 결국 주님의 그리스도되심,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깨닫기 원하시는지,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로 우리를 세워주신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주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원자)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는 거룩한 그의 백성, 그의 자녀처럼 살면서 제사장 나라, 즉 “축복의 통로(열쇠)”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가라고 부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완성하시기 위한 주님의 일이 끝나지 않았고, 사람들의 이해 또한 부족하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자신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기에 그들이 바르게 깨달아 하나님의 때를 따라 주님께서 가셔야 할 십자가의 길을 완성하기까지 이와 같은 목적과 사명을 오해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또 베드로의 고백은 비록 하나님의 깨닫게 하심으로 고백하게 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제자들은 이 고백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이 고백의 의미를 간단하게 가르쳐 주신다. “이것을 깨닫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 고백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나라가 세워질 것이며, 이전의 악한 것들의 권세가 결코 넘보고 흉내낼 수 없을 것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아울러 교회의 사명은 결국 이 땅에서 제사장 나라 곧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심자가으 ㅣ길을 지나는 여정이 있어야 하고 그 후에 오는 영광이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찾지 않는 좁은 길이고, 제자들의 믿음과 이해가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에게 아직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나는?
-베드로에게 깨닫게 하고 고백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나에게도 역사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내 눈을 열어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 119:18)의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사모하는 아침이다. 동시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언제나 감격하며 고백할 수 있는 은혜가 마르지 않기를 사모하는 아침이다.
 
-나에게 맡기신 목회의 여정도 결국 하나님이 알게 하여 주셔야 함을 잊지 않는 겸손함을 꼭 붙잡아야 하겠다. 주님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여 주시고 깨닫게 하셔서 감당할 수 있음을 잊어버리는 순간,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인식하는대로 백성들처럼 주님을 바라보는 “자기 신앙”에 빠지게 됨을 꼭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오랜 시간동안 주님을 믿는 삶을 살았어도 “자기 신앙”, “자기 인식”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 만큼 헛된 것은 없다. 이를 도와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셨고, 성령님은 늘 “깨닫게 하고 알게 하여 주심”으로 올바르게 믿음의 삶을 살도록 이끄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이를 신뢰하며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듣고 기억하여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은혜로 믿음의 삶을 살아내야 하리라.
 
-그래서 기독교는 “자기 학습과 사상”만의 종교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여 올바로 순종하는” 종교이다. 오늘날 교회가 큰 위기 가운데 있다고 하는 원인은 “자기 생각, 자기 인식, 자기 지식”에 매여 주님의 주님되심을 깨닫지 못하여 “자기가 왕노릇”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않고, 배우지도 않은”것이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배운 것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깨우쳐 주시고 능히 순종하며 감당하도 이끌어 주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심을 신뢰하고 하루 하루를 살아내야 하겠다.
 
 
*주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고 고백하는 교회이다. 이렇게 고백하며 행하는 교회가 세상의 축복의 통로(열쇠)가 될 것이다. 내가 끝까지 꿈꾸고 붙잡아야 할 교회가 아니겠나!
 
*이와 같은 고백은 사람의 가르침과 여러 프로그램으로 보여주어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즉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에게 맡겨주신 교회를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넘치는 교회로 세워가기를 포기하지 않겠다. 성령님을 통해 신비한 이적과 기사가 넘치는 교회라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고 고백할 수 없는 믿음의 고백들이 담대하게 선언되고 증거되며 행하여지는 교회가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교회되기를 간절히 꿈꾼다.
 
 
 
 
*주님, 주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대로 순종하고 나아가는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저에게 맡기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되기를 꿈꿉니다. 도와주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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