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위대한 제자도…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순종 [마 16:21-28]
 – 2023년 03월 04일
– 2023년 03월 04일 –
주님의 공생애 사역은 지리적인 구분으로 크게 갈릴리 사역,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사이의 사역, 그리고 예루살렘 사역으로 나뉜다. 본문부터 20장까지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사이의 사역”이다. 특히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의 대전환점이다. 주님의 메시아 사역의 특징을 선포하고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영원한 승리를 얻을 인자(주님)의 모습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영원한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침으로 도우신다. 주님은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 완성의 위대한 청사진을 제자들에게 들려 주시고 그들을 영적으로 재무장하고 계신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내용을 상세하게 알려주신다. 믿음의 고백을 드린 베드로가 강렬히 반대할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베드로가 강한 책망을 받을 정도로 이 일은 확고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께서 반드시 이 일을 이루실 메시아 이심을 확증하신다. 동시에 이와같은 주님의 길을 제자들이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 “위대한 제자도”를 교훈하신다.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우리가 평생 잊지 말아야 할 위대한 제자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것처럼, 각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1.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21절)
베드로의 신앙고백은(16:16) 제자들의 주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의 변화를 드러내는 대표성있는 고백이다. 그의 고백은 주님에 대한 정확한 정체였다. 이 고백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그러나 단지 고백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고백의 참 의미를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어설픈 고백은 위험하다. 주님은 머뭇거림없이 예루살렘에서 펼쳐질 고난과 죽음, 부활의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 제자들이 주님의 주님되심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우치기를 기대하신 것이다.
 
주님은 앞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신 적이 있었다(9:15; 12:40). 하지만 정확하고 분명하게 고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신 것은 본문이 처음이다. 주님의 고난 예고는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시는데, “올라가 – 고난받고 – 죽임 당하고 – 제3일에 살아나리라”이다. 이 모든 과정은 수동적으로 끌려가시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 모든 과정을 스스로 주도 하시며서 나아가신다(이를 신적 수동태라고 일컫는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아래 있는 것이었다.
 
*주님의 메시아 사역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셨다. 주님은 이 사역을 철저히 순종함으로 감당하신다.
 
 
 
2.베드로의 폭주, 주님의 책망(22-23절)
앞서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지만, 본문은 주님의 위대한 계시에 대하여 위대한 불신고백을 한다. 베드로는 거칠게 주님을 붙들고 “절대 그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마치 자기가 온 몸을 던져서라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질 정도다.
 
문제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제자들의 고백을 대표했듯이 이 위대한 불신항변도 역시 제자들의 마음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바라는 주님의 메시아됨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마태는 이 과정을 베드로의 과격한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붙들고 항변하여”(22절)라는 기록은 매우 충격적이다. 새번역은 “따로 붙들고”라고 순화하여 번역했지만 “항변하다(에피티마오)”는 단어는 직역하면 “비난하다, 꾸짖다, 견책하다, 벌하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주님께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런 때가 있었을 것이다. 나의 마음과 다른 주님의 행하심에 얼마나 많은 “항변”을 했는지 셀수조차 없다. 그래서 베드로의 과격한 항변에 나도 죄송스러워진다.  나도 그랬으니까….
 
 
주님께서는 이런 베드로를 향해 평소와 달리 강하게 질책하신다. 선의로 한 행동이지만, 주님께서도 꾸짖으심을 주저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말은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거스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새번역_23절)라고 하셨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의 폭주는 하나님의 일만 생각하시는 주님의 책망을 불러왔다. 한순간에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에 대한 칭찬은 위대한 불신항변에 대한 강한 책망으로 돌변되었다.
 
*적어도 이 순간은 베드로가 하나님 나라를 함께 걷는 제자가 아니라 그 길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나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더온누리교회 공동체의 걸음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주님의 공동체로 세워가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나의 마음과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뜻으로 분별하고 결정하며 선택해야 하겠다. 주님의 뜻이 온전하게 세워지도록 주님과 함께 걷는 제자들의 공동체로 빚어가야 하리라.
 
 
 
3.제자도(24-28절)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대표한 제자들의 주님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선명하게 바로잡는 제자도를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주님을 통하여 꿈꾸는 인간적이고 강력한 메시아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펼쳐질 고난을 통해 영광의 사역을 준비시키는 가르침으로 들려 주신다.
 
제자들이 고백은 나무랄데 없었지만, 그 고백에 담긴 내용이 주님의 생각과 달랐기에 이를 수정하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여정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과 동일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의 요청에 순종해야 한다. 먼저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은 베드로가 항변하듯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에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제자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던져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걸어가신 주님의 삶처럼 살아내는 것에 모든 것을 던진 자이다. 주님과 동일한 삶을 살아내리라고 결단하고 순종해 내는 사람이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이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마땅히 따르는 것을 말하며, 십자가를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지금 제자들이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목숨과 바꿀만한 소중한 그 어떤것도 없듯이 제자는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보면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다. 주님은 “죽음 이후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21절)”을 미리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제자의 길은 죽음의 길만 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길도 바라보며 죽음의 길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주님의 재림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될 것이며, 모든 이들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이때 제자들은 잃었던 묵숨을 찾는 영광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에 있는 제자들 중에서 죽기 전에 이 일을 볼 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십자가 없는 영광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믿음 임을 강조하신다. 예수와 함께 죽으면 살겠지만, 예수를 죽이고 자기만 살겠다면 다 잃게 될 것이다. 천하를 위해 예수를 죽일 것인가?, 천하의 주인이신 예수를 위해, 그 복음을 위해 내가 죽을 것인가? 제자도는 이 물음 앞에 늘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주님을 신뢰하며 창조와 생명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을 때 진정한 생명으로 다시 산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이다.
 
 
 
 
나는?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다. 또한 온 세상과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목숨을 주님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는 것이다. 즉,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권리와 기대를 스스로 내려놓고 모든 일에 오직 주님만 붙드는 것이 제자도이다.
 
-베드로는 메시아에 대한 그릇된 기대를 품고 있었기에 주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씀에 폭주를 하고 만다. 주님께서 죽지 않고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베드로의 항변은 사탄이 주님을 유혹할 때 한 말과 동일하다(4:8-9). 이는 하나님의 계획을 막아서고 있는 순간 사탄의 계획을 지지하고 주장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과 같다.
 
-오늘 나의 생각과 유익에 따라 주님을 이용하려는 마음으로 주님께 항변하듯 매달리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사탄의 역할을 하는것과 다를 바 없다. 주님의 제자는 매 순간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순종하는 사람이다.
 
 
*마태복음은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4:17; 16:21)의 동일한 단어와 문장으로 내용을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인성),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리가 그것이다.
 
*4:17의 “이때부터”는 세례 요한의 잡힘을 들을 때”였고 이때부터 공생애가 시작되었다. 16:21의 “이때부터”는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이다. 이때부터 주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런 측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한 고백임을 강조하셨다 (16:17). 주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린 고백이었다는 것이다. 이 고백을 고대하고 있었던 이유는 먼저 제자들의 바른 신앙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 고백이 하나님 나라를 여는 열쇠라고 하셨다.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고백이 없다면 주님께서는 다음 단계의 사역으로 넘어가실 수 없었다. 대속을 위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향한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주님을 향한 올바르고 건강한 신앙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적어도 올바르고 건강한 신앙고백이 고백되어진다는 것은 성령님을 의존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고, 고백한대로 순종하며 나아가기 위한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의 고백이 점차 사라지는 교회들이 많아지고 있다. 올바르고 건강한 믿음의 고백이 없는 교회와 자신의 뜻을 관철 시키는 고집과 열심이 믿음인양 착각하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는 몰라서 고백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고백에 따른 믿음의 행함 조차도 거부하고 있다. 건강한 신앙이란 올바른 믿음의 고백이 주저없이 선언되고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동도 균형있게 발휘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내는 제자의 삶이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다. 나도 이 제자로 부름받았으니 이렇게 살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뵈어야 하리라!
 
 
 
 
*주님, 더 예수님처럼 사람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겠습니다.
*주님, 이처럼 살아내기 위해 더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흉내라도 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머뭇거리지 않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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