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용서에 대하여[마 18:21-35]
 – 2023년 03월 09일
– 2023년 03월 09일 –
용서… 참 쉽지 않은 것이다. 베드로가 던진 용서에 관한 질문은 개인 간의 용서의 문제를 다룬다. 이미 6:12, 14-15에서 등장했던 주제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을 대답해 주시면서 하나님 나라 제자들이 용서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가져야 할지에 대하여 비유로 교훈하신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이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는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제자들이 경험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형제를 향한 용서의 근거라는 점을 강조한다. 제자들의 용서하는 삶은 선택이 아니라 마땅히 행할 바이다.
 
 
 
1.몇 번까지 용서해야 할까?(21-22절)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공동체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자신에게 죄 지은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용서에도 한계가 있다는 전제를 가진 질문이었지만 주님께서는 무한대의 용서를 요구하신다.
 
당시 유대사회의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고, 베드로는 이보다 더 관대하게 일곱 번의 용서까지 생각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 즉 한계 없는 용서를 요구하셨다. 주님의 가르침에는 용서가 단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임을 깨우치신다. 죄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과정이며 내 상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그분의 주권에 맡기는 과정이다.
 
*생각해 보면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두 배로 갚아주어도 성에 차지 않는 심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같은 마음이 차근 차근 변하는 과정이 바로 용서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죄를 지은 그를 변화시키는 행동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러니 단번의 결심과 행동으로 어떻게 완성되겠는가! 용서는 끊임없이 하는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한 사건과 사람의 행동들은 용서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도 어느 순간 불쑥 불쑥 솟아 오른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끓게 만든다. 용서했다고 했는데 또 생각이 나고 그것 때문에 힘드는 내 자신이 더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용서하는 과정이다. 이때 나를 용서 해주신 주님의 용서의 깊이를 생각하며 내가 행한 용서의 얕음을 되돌아 보면 조금은 힘을 얻을 수 있다.
 
*당시 랍비들의 세 번 용서에 비해 베드로가 자랑스럽게 고백한  일곱 번의 용서가 매우 관대하게 비춰 질 수 있겠지만, 주님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용서를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당연히 힘들다. 나는 할만큼 했으니 이젠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있지만 여전히 견디기 힘든 감정이 올라오기도 한다.
 
*이럴 때 나를 향해서 용서의 한계를 두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해 보면 성령께서 분란된 마음을 진정시켜 주실 것이다.
 
 
 
2.용서에 대한 비유(23-35절)
용서에 대한 우리 속담 중에 “용서도 사람을 가려가면서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인식 때문인지 심한 죄를 범한 죄인은 더 용서하기 어렵고 가벼운 죄는 더 쉽게 용서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진 자의 빚을 탕감해주는 어떤 임처럼 우리가 받은 용서는 우리가 대가를 치를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먼저 일깨우신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인 죽음이 아니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내가 받은 용서가 어떤 용서인지 가늠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탕감받은 빚이 평생토록 다 갚을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임을 기억해야 한다.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면 자꾸만 마음이 강팍해 진다. 매일 내가 받은 은혜, 받고 있는 은혜. 받을 은혜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깊이 묵상해야 한다.
 
“달란트”는 당시 화폐의 최대 단위였다. 여기에 “만”은 헬라어로 표기할 수 있는 최대 숫자였다. 그렇기에 비유 속에서 주인이 탕감해 준 “만 달란트”는 한계없는 무한대의 용서를 상징한다(23-27절). 이 용서가 우리가 받은 것이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치루어야 할 대가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빚과 같다. 반면에 “백 데나리온”은 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이다. 16만 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빚을 면제 받았는데, 고작 백일치 품삯 때문에 동료를 무자비하게 대하였다(28-30절). 내가 용서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나는 용서하지 않는 삶을 사는 파렴치함이 혹시 나에게도 있지는 않을까?
 
*내가 용서하는 삶을 살려면 내가 받은 용서를 잊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가 받은 용서가 관습과 상식을 뛰어넘은 놀라운 용서이기에 내가 행할 용서도 능히 이렇게 행할 수 있다. 내가 경험했으니 나도 베풀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 “무자비한 한 종의 행동”을 들은 주인은 그 종에게 베푼 은혜를 거둔다. 무한대의 용서를 받았기에 하나님 나라 제자는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것을 용서치 않으신다. 이는 우리가 마땅히 용서해야 할 자들을 용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용서를 잃어버릴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단지 내가 용서 받으려고 억지로 용서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입은 자는 마땅히 그 긍휼을 실천하여 내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날마다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 속에서도 이를 당부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죄를 범하여 실족한 자, 작은 자, 약한 자에 대하여 그 죄를 권면하여 다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회복하도록 단호하게 행동해야 할 것과 그렇게 돌아온 형제에 대하여 과거의 죄의 흔적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조건 없이 받아주는 한없는 용서를 순종하는 공동체이어야 하겠다.
 
 
*주님의 비유처럼 내게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지 않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가? 분노하기 전에 내가 더 큰 빚을 하나님께로부터 탕감 받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나님께 나아가 내가 지은 큰 죄에 대하여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으면서 누군가 내게 지은 작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그를 향해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소름끼치는 행동이다(31절).
 
*하나님 나라 백성은 “용서 받은 자가 용서한다”라는 가치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나는?
-베드로가 용서의 한계를 질문했다. 이는 자신은 용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그릇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보다 내가 용서받은 자임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신다. 내가 받은 용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큼에도 내가 해야 할 용서에 인색 한다면 주인이 베푼 용서가 철회되는 어리석은 결말앞에 서게 될 것이다.
 
-용서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용서 받은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용서는 목회의 여정에서 늘상 직면해야 할 영역이다. 무한대의 풍성한 용서를 받은 내가 일상에서 인색한 용서를 베푸는 옹졸한 삶이 되지 않기를 결단한다.
 
* 용서의 비유를 마치시면서 주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셨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새번역_35절) 하나님 나라 비유 중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이와같이 강력한 메세지가 또 있을까?
 
 
*’용서’란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주는 일이다. ‘관용’은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일이다. 기독교는 용서와 관용의 터 위에 신앙과 삶의 가치를 세운 종교이다.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고 하셨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기독교의 유명한 변증가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 말씀을 “원수에 대하여 호감을 갖거나 근사한 사람으로 오해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잘되기를 바라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주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사랑할만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기 때문이듯이 용서란 원수를 대할 때 자기처럼 대하는 태도이다. 남의 작은 실수는 침소봉대하여 지탄하면서 자신의 큰 허물은 모른척 하는 일은 위선이다(마 7:5). 마치 지금 한국사회를 보는 듯 하여 참담하다. 교회의 역사가 이런 역사여서 더 그렇다. 가르침은 가르침일 뿐, 역사가 전하는 교회의 모습은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용서’할 일이 넘친다. 특히 민족의 역사와 품격을 스스로 후퇴 시키는 무지와 무책임한 발언이 도를 넘어 독립운동과 일제식민을 편드는 대통령과 그 지도자들이, 서민의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제인사들을 용서하라는 말씀이어서 참 쓰라리다. 이들이 저지르는 무지함과 악행 때문에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과 후손들의 몫이 되는 것이 속상하다. 이런 자들을 용서하라는 말씀을 C.S.루이스의 해석으로 가름해 보고 싶다. 주님께서 이들에게 긍휼의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의 무지와 무책임함이 아닌 나라와 국민을 위해 상식적으로 잘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라와 민족이 상식적으로 회복될 테니까….. *주님, 어떻게 좀 안될까요?
 
*그런데 이런 해석이 무지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들에게만 해당될까? 무엇보다 내 자신이 그래야 할 것이다. 나도 주님께서 비유로 드신 악한 종처럼 용서의 은혜를 받았지만, 용서할 줄 모르는 무지하고 무책임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이런 사람 되지 않기를 늘 결심하고 결심해야지….
 
 
 
*주님, 용서 받았으니 용서하겠습니다.
*주님,  용서하려 할 때 한계에 직면하면 나를 위해 베푸신 무한대의 용서가 생각나게 해주십시오.
*주님, 무지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일 수 있어서 더 괴롭습니다. 용서받은 은혜를 잘 알고 책임감 있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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